221화 만남 (1)
이예린에게 전화가 왔다.
스킬 확인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만큼, 시전을 취소하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신강후입니다.”
- 통화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안 받았죠.”
- 아…….
대화 시작부터 강후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답을 들어서인지 이예린이 잠시 탄식했다.
이예린과 거래하는 의뢰꾼들 대부분이 넉살 좋고, 농담을 좋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 강후는 재미없는 축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재미없는 순위로 정렬하자면 바로 1순위.
“해외 의뢰가 들어왔나요?”
- 아, 그 문제는 아직 협의 진행 중이에요. 조율할 부분들이 좀 많아서요.
“그렇군요. 그럼 무슨 일로?”
- 정화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요. 강후 씨를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요.
“왜 직접 연락을 안 하고?”
-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싶다는 거죠. 다이렉트로 연락하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구 격이?”
- 강후 씨 아니겠어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저쪽이 주고 싶어 하는 거죠.
“음.”
강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남을 피할 이유는 사실 없다.
그게 더 이상하다.
강후야 장시환의 본질을 알기에 그의 모든 행동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지만.
장시환의 입장에서 자신을 본다면 그림은 전혀 달라진다.
그저 수많은 헌터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이를테면 전에 여수에 갔을 때, 군벌 ‘자강’에서 만났던 백선태를 떠올려 보자.
그때, 백선태는 자신에게 직접 연락처를 알려 주기도 했고, 정말 많은 관심을 보여 줬다.
하지만 강후는 백선태를 좀 특이한 암살자지만,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 이후에도 백선태의 소식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백선태의 위치에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장시환을 대입해 보면 얼추 추측이 가능하다.
장시환에게 자신이 흥미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두각을 드러내고 성장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장시환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신강후’는 약간 특별한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 어떻게 할까요?
“만나죠. 이렇게 된 김에 아예 청안 빌딩에서 보자고 하죠. 겸사겸사 한 번에 두 탕 뛰게.”
- 저를 만나고, 다음 일정으로 한 큐에 해치우겠다?
“중이 먼저 움직일 수 있나요. 절이 움직여 줘야지.”
- 큭. 방금 드립은 좀 재밌었어요. 저도 늙었나 봐요.
“이렇게 도매금으로 같이 늙은이 취급을 해 버리면……. 큭.”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 언제 만날까요?
“여기 수원이에요. 바로 대전으로 갈 겁니다. 정화 길드와의 미팅도 빠르게 잡아 주세요.”
- 알겠어요. 그러면 대전역으로 사람을 보낼까요?
“아뇨. 주변 분위기도 살필 겸, 직접 가겠습니다. 오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 네, 그럼. 기다릴게요.
통화를 끝낸 강후는 바로 수원역으로 향했다.
죽음의 불꽃을 훈련하고 다듬을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제대로 시연을 못 해 본 게 아쉽진 않았다.
* * *
대전역.
요 근래 안 왔던 사이, 대전역 인근은 예전과 분위기가 제법 달라져 있었다.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의 인장과 깃발이 전보다 훨씬 많이 나부끼고 있었고.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이클립스 소속의 헌터들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종적을 감춘 것처럼.
그래서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 충돌을 예상하고 대전역에 왔음에도 신경 쓸 것이 없었다.
현재 강후는 이클립스로부터 척살령이 떨어져 있는 터라, 눈에 불을 켜고 쫓는 놈이 많았다.
물론 어지간한 실력을 가진 헌터가 아니라면, 괜한 짓거리를 하다가 죽기 딱 좋다.
텁텁한 입이나 달랠 겸 해서 테이크아웃 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 동안.
근처에 있던 남자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오기에, 살짝 귀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요즘 이클립스 놈들은 왜 대전역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이클립스가 적이 좀 많아야지. 전력을 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여기부터 뺐다고 하더라고.”
“하긴 뭐 청안이랑 흑사자 자극한답시고 헌터들을 배치해 뒀던 거긴 하지?”
“딱히 대전역에 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냥 꼬장이나 부리는 수준이었잖아.”
“그래도 상징성 때문에 헌터들을 꽤 배치했다고 들었는데. 급한 불이 따로 있는 모양이네.”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몰라. 이번에 일본에서 죽은 차소혁인가? 걔는 차소희 오빠라며.”
“아, 그래?”
두 남자는 성좌 정보가 없는 민간인임에도 헌터 관련 이슈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떤 헌터 조직이 자신의 생활권에 영향을 미치는 가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지니까.
대전은 그래도 살기 좋은 축에 속한다.
청안 용병단, 흑사자, 이클립스가 삼분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탓에 역설적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지만, 그래도 균형은 잡혀 있었다. 무력 충돌도 거의 없었고.
‘윤상미는 뭐하려나.’
대전역에 오면 생각나는 사람.
윤상미와는 대전에서 제법 쌓은 추억이 많아, 잊을 만하면 늘 기억이 났다.
던전 공략에 매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갑자기 소식이 뚝 끊긴 느낌이랄까.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과하게 마음을 쓰는 건 사치다.
본인이 아쉬우면, 필요하면, 생각나면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 두 남자의 말대로 이클립스의 흔적은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사라져 있었다.
강동현이 힘들긴 한 모양이다.
* * *
얼마 후.
청안 빌딩 앞까지 마중 나온 이예린.
그녀를 만난 강후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성좌 정보를 봤다.
못 본 새에 성좌가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방어’ 쪽을 보강해 주는 성좌가 붙었다.
마법사인 그녀에게 방어 능력이 탑재된다는 것은 안정성의 극대화를 뜻한다.
극단적인 아웃파이터 스타일의 전투를 추구하는 이예린에게는 찰떡궁합의 성좌인 셈.
강후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자 이예린이 능청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와……. 그걸 면전에서 이렇게 대놓고 말해요?”
“거짓말은 못 하거든요.”
“농담이 늘었네요, 강후 씨!”
“농담 아닙니다.”
“쳇. 카운터 확실하게 치네. 자, 이쪽으로. 제가 직접 안내할게요.”
그래도 오래 얼굴 마주하며 지낸 사이라 그런지, 이예린과는 제법 친해졌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신강후의 몸으로 빙의하고, 청명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한서연 다음에 맺은 인연이 바로 이예린이었다.
적응 초반만 보면, 이예린의 지분이 가장 많았다. 윤상미도 있고.
VIP 전용의 응접실로 이동하는 동안.
이예린은 강후가 일본에서 활약한 내용을 얘기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다.
할머니와 손녀를 구한 일과 유우지와 켄지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인 일. 그리고 차소혁과 토우시 길드원을 박살 낸 일까지.
소식을 접한 사람마다 그 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다들 뇌리에 각인된 모양.
이내 응접실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앉은 이예린이 강후와 커피 한 잔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번에 강후 씨가 자의든 타의든 유명세를 탄 것 때문에.”
“타의.”
“네. 그럼 타의! 그래서인지 해외에서도 용병 요청을 하는 클라이언트가 꽤 늘었어요.”
“그것보다는 출혈 딜러 품귀 때문에 그런 거겠죠. 영상 하나로만 인식이 달라질 리가.”
“영상의 의미를 간과하시네요. 실력 좋은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도 바로 특별함을 알아 봐요.”
“좋은 소식인 건 맞네요.”
“그렇죠. 유리한 조건에서 판을 짜기가 수월해졌어요. 이건 또 제 전문이니까…….”
“잘 부탁합니다.”
“혹시 의뢰 수주에서 제가 참고해야 할 다른 사항이 있을까요? 편하게 말해 보세요.”
“최우선 순위는 독일이나 남아공에서 들어오는 의뢰로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이예린은 따로 이유를 묻진 않았다.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것도 유능한 중개자의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기에.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조사를 하면 되는 것이기도 하고. 드러낼 필요는 없다.
“혹시 잠깐 다른 얘기 해도?”
“네, 괜찮아요. 데이트 신청 같은 것도 받기는 해요.”
“그건 아니고.”
“……농담 좀 받아 봐요!”
“아야네를 만났습니다. 이 얘기는 해도 된다고 동의받은 겁니다. 자신에 대한 얘기를 이예린 씨가 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고요.”
“잠시만요.”
이예린이 잠시 대화를 멈추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강후는 누구에게 거는 전화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아야네겠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일부는 떠볼 생각으로 꺼냈던 말이기도 했다.
강후가 아야네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해서, 이예린이 술술 아야네에 대한 얘기를 했다면?
그녀의 자질을 의심했을 것이다. 중개자의 무게를 모른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아, 네. 알겠어요. 확인했어요. 그럼 동의하시는 걸로 알고, 연계되는 부분 있으면 진행할게요.”
서로 간의 동의 및 의견이 오간 듯한 대화가 마무리 되고.
이예린은 다시 강후에게 말을 이어 갔다.
“당연한 확인 절차라서 잠시 대화를 끊고, 전화를 좀 했어요. 괜찮으시죠?”
“물론.”
“우연이 그렇게 겹치니 신기하네요. 정문 제약 건이야 제가 둘 다 주선을 했으니 그렇다 치고.”
“일본에서 후쿠오카에 갔던 건, 계획에는 없던 일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요. 거기에 마침 제게 받은 의뢰로 아야네 씨가 가 있던 거죠.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덕분에 늦은 인사를 했습니다. 전에 연구소에서 서로 돕고도 못 나눈 인사를 말이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야네 씨가 진짜 깐깐하게 헌터를 보는 타입이에요. 파트너 구할 때 진가가 발휘되는데…….”
혀를 내두르는 이예린의 반응을 보니, 보통 눈이 높은 게 아닌 모양.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진짜 괜찮은 헌터를 찾아냈다 싶으면 눈이 돌아가 버려요. 좋은 의미로 반하는 거죠.”
“특이한 성격이네요.”
“맞아요. 실력 없는 헌터는 아예 쓰레기로 취급해요. 예의상 인사? 겸손? 그런 거 없어요.”
“음…….”
“그런 아야네 씨가 강후 씨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다는 건, 실력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이겠죠.”
“아야네도 실력이 좋더군요.”
“맞아요. 그래서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깐깐한 헌터의 마음을 빼앗다니, 멋져요.”
“딱히 빼앗을 생각은 없었는데, 본인이 이미 관심을 다 주고 난 후라서.”
강후가 후쿠오카 해방구에서 있었던 아야네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때.
이예린이 생각의 방향이 달라졌는지, 이내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해외 의뢰 중, 아야네 씨와 연계 가능한 의뢰는 상호 동의를 구하고 붙여 볼게요. 사실 오늘 중요한 얘기는 그게 아니에요.”
어떤 말이 나올지는 알 것 같지만, 강후는 의도적으로 모르는 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되는 ‘주제’에 대한 얘기는.
강후가 주절주절하는 것보다 그녀 스스로 깨닫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것은 바로.
“오늘 진지하게 강후 씨에게 정화 길드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해요. 귀담아 들어 줬으면 해요.”
그녀의 운명이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정화 길드에 대한 반감을 다루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