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무리 여왕 (3)
* * *
강후는 K와 무리 여왕의 시체 정리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먼저 정유리와 작별 인사를 했다.
딱 하루만 쉰 정유리는 오늘부터 다시 던전 공략을 이어가는 강행군을 시작한다고 했다.
의욕적으로,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강후도, K도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안전 리무진을 타고 떠나면서,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한참 동안 정유리와 작별의 손 인사를 나누고 난 K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강후에게 말했다.
“유리가 나보다 자네에게 더 많이 인사를 하는 것 같은 건, 어디까지나 내 착각이겠지?”
“네, 착각일 겁니다.”
“뭐…… 칙칙한 늙은이보다야, 잘 생기고 마음에 드는 청년이 더 좋기야 하겠다만.”
“질투나십니까?”
“어, 맞아. 손녀가 영원히 내 손녀로 있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농담입니다.”
“끌끌. 나도 농담이야.”
어지간해서는 농담을 잘 안 하는 강후.
하지만 K에게는 말하다가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랄까?
“걷지. 어차피 꼭 사무실 안에서만 논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예, 그러시죠.”
강후가 보폭을 맞춰 걸었다.
K는 강후보다 걸음이 세 배는 느렸다.
애초에 암살자이다 보니, 일상의 기본적인 움직임도 빠를 수밖에 없는 강후와.
늘 느긋한 마음으로, 최대한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K의 스타일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강후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으로 둘에서 셋을 셌다. 그래야 얼추 걸음이 맞았다.
“무리 여왕 시체는 두 가지 루트로 처분이 가능해. 첫째는 내게 즉시 팔고 75억 원을 받는 것.”
“생각보다 금액이 높네요.”
“내가 나름 수완을 발휘해서 높여 팔 수도 있으니, 높고 낮음은 글쎄? 속단하긴 이르지, 후후.”
“너무 솔직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게. 너무 솔직했나? 어쨌든 첫 번째는 그 방법이고, 둘째는 무리 여왕의 담즙을 받는 것.”
“직접 작업하시는 겁니까?”
“아냐. 업자가 있어. 누군진 알려줄 수 없어. 다만 담즙 한 병은 무조건 보장하지.”
“결국 담즙 한 병이 75억 원의 가치를 하는 셈이네요.”
“맞아. 신속한 현금화냐 아니면 미래를 위한 투자냐의 차이겠지.”
무리 여왕의 담즙은 각성 버프나 각성류 약물의 효과를 3배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속 시간은 30초고 별도의 후유증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무리 여왕 하나를 죽여야 담즙 한 병을 겨우 얻기 때문에, 매우 귀한 액체에 속한다.
가격을 배제하고 희소성만 놓고 보면 매드 솔라키움이나 각신환보다도 높다.
“담즙 추출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정제를 하지 않으면 독이나 다름없으니까, 정제도 포함하면 빨라도 2일?”
“그렇군요.”
“제작만 완료되면, 내가 퀵이든 직접 뛰든 해서 갖다 줄 테니 배송은 걱정하지 마.”
“국외여도 가능합니까?”
“물론이지. 자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까지가 내가 말하는 ‘배송’이야.”
“그럼 둘째 선택지로 하겠습니다. 담즙의 가치가 몇 배는 더 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그럴 줄 알았어.”
K가 웃었다.
애초에 강후가 첫 번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무리 여왕의 담즙이 버프 증폭에 효과가 아주 큰 것은 맞다. 탐이 날 정도로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 여왕을 또 잡고 싶진 않았다. 오늘의 전투로도 충분히 지쳤다.
설령 다시 잡는 일이 있더라도, 그때는 곁에 보조할 헌터가 있었으면 했다.
그날 저녁.
몸도 무겁게 가라앉은 김에 K의 배려로 별장에서 쉬게 된 강후는 혼자만의 밤을 즐겼다.
어제 정유리가 있을 때는 그래도 북적이는 맛이 있었는데, 혼자 있으니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있었던 무리 여왕과의 전투를 복기하며, 각신환을 통해 느꼈던 기분을 떠올렸다.
그것은 분명히 절망과 비극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환희와 열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잠깐이나마 들었다. 말초적인 감각의 흥분도 이뤄졌다.
오르가슴의 일종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짧았지만 그 순간이 쾌감의 연속이었으니까.
만약 이 악물고 무리 여왕과 싸우고 있지 않았다면, 쾌감 자체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음.”
강후가 문득 몇 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유리의 할머니인 강복화.
그녀와는 1등급 부적 ‘인페르누스’와 관련해서 만나야 하는 일정이 있다.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국내에 부적을 가진 유족의 방문 일정이 잡히진 않은 모양.
부적에 대한 대응법은 생각해 뒀는데, 99%의 확신이라서 약간의 불안감이 있기는 했다.
“타카시는 부르면 내가 일본으로 가면 되고. 핫이슈는 역시 전세혁인가?”
스마트폰으로 열어본 헌터 관련 최근 뉴스의 지분 절반이 전세혁에 관련된 얘기였다.
이클립스의 지부를 한두 군데 건드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혼자 움직이는 것도 확실히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강동현이 ‘특급 척살령’을 내렸다. 강후에게 건 1급 척살령보다 상위 개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특급 척살령이 발동된 시점부터는 아예 전담팀을 꾸리게 된다.
이클립스 내부에 전세혁을 상대할 특수팀을 구축하는 것이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고경호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성좌 시험을 완료하고 싶지만.
고경호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혼자 멍청하게 다닐 리 없다. 전세혁의 ‘팀’과 호흡은 필수적이다.
다만 특급 척살령이 떨어진 만큼, 강동현의 심복인 고경호가 곧 나서게 될 듯했다.
전장에서 고경호와 접점이 마련되는 시점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그럼 접근이 더 수월해진다.
“봉인이나 풀자.”
강후가 앞에 놓인 테이블에 랜덤 스킬북을 올리고는 바로 무리 여왕의 심장을 준비했다.
꽤 오랫동안 밖에서 보관했음에도 심장은 쪼그라들거나 부패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상태였다.
봉인 해제법은 간단하다.
대상이 봉인 해제를 위해 요구하는 제물을 접촉시킨 후, 마력을 불어넣어 활성화하면 된다.
그다음에는 알아서 대상이 자신에게 설정된 과정에 맞게 봉인을 푸는 과정을 거친다.
바로 스킬북에 심장을 갖다 댔고, 강후가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푸른빛 기운이 감돌면서 스킬북이 반짝이더니, 이내 심장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흑마법인가?’
마치 빨대를 꽂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스킬북이 탐욕스럽게 심장을 탐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생기 가득한 핏기가 돌던 심장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조각이 됐다.
그 대신, 푸른빛이 돌던 스킬북은 어느새 자줏빛이 도는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색깔이 특정 직업군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색은 흑마법사가 연상되는 색이었다.
‘바뀌었다.’
곧바로 일어난 이름의 변화.
【스킬북 – 죽음의 불꽃】
【특이 사항 : 흑마법사 전용】
역시 흑마법사 전용 스킬북이었다. 학습은 예전에 야만의 시대를 배웠을 때처럼 꼼수를 쓰면 됐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흑마법사의 스킬을 페널티 없이 얻을 수 있는 특전이 있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던가.
여기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내일 아침 출발하려던 계획을 즉시 수정했다.
수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거기에 온누리 길드가 관리하는 발트만 던전이 있으니까. 가장 가까우며, 꼼수가 통하는 곳이다.
* * *
늦은 밤.
예약 없이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비서의 보고에 짜증부터 내려던 남자.
그가 방문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뭐? 신강후?”
“예, 맞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지! 그때만 해도, 이렇게 성장할 줄은 몰랐던 헌터였는데…….”
남자의 이름은 한승혁.
예전에 강후에게 10억 원을 받고 온누리 길드의 발트만 던전 라이센스를 대여해 준 팀장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똑같은 자리에 있었고, 레벨도 거의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딱히 지금의 수준에서 무리해서 성장하고 싶은 욕심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며, 던전 라이센스 대여와 수수료를 챙기며 지내던 중이었다.
처음 강후를 봤을 때는 지금처럼 이름과 얼굴이 제법 팔렸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후가 10억 원이나 주고 던전을 대여하겠다는 말에 웬 호구가 왔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름 거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버선발로 달려 나가 맞이해야, 강후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듯했다.
거물과 인맥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비서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길드 VIP 전용 응접실로 모셔. 응대는 내가 하지. 신속하게 모시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아직 강후를 만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허리가 반쯤 숙여져 있는 한승혁.
강자에게는 약하게, 약자에게는 강하게 구는 몸가짐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한승혁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강후를 ‘강자’의 영역에 완벽하게 두고 있었다.
* * *
다음 날 새벽.
발트만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강후가 스킬창에 추가된 새 스킬을 확인했다.
앞선 한승혁과의 만남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저자세였던 것만 기억 난다.
다만 앞으로도 타 클래스 스킬북 학습을 위해 발트만 던전을 찾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존 라이센스 대여비보다 웃돈을 크게 얹어서 한승혁을 챙겨줬다. 저런 놈들은 돈에 약하니까.
덕분에 온누리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에 관련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꼭 발트만 던전이 아니더라도, 외부에 라이센스를 대여할 수 있는 던전이 꽤 있는 모양.
온누리 길드의 규모가 크진 않아도, 알짜배기 던전을 제법 갖고 있는 곳인 만큼.
한승혁과의 인맥은 꽤 필요하겠다 싶었다.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녀석을 돈으로 구워삶을 생각이었다.
가진 능력과 실력에 비해, 온누리 길드에서 부여받은 권한이 꽤 많은 헌터였다.
개인적인 됨됨이와 무관하게 일적 수완이 좋으니까, 길드 마스터도 그에게 권한을 위임한 거겠지.
“기대되네.”
스킬 화력 측정과 사용법 숙지를 테스트할 겸, 강후는 인근 공터에 와 있었다.
종종 헌터들이 스킬 시험을 해 보기도 하는 공간이라, 돌출 행동이 되는 장소는 아니었다.
【죽음의 불꽃】
【스킬 숙련도 : Lv. Max】
【암흑기를 불어넣어 꺼지지 않는 어둠의 불꽃을 만듭니다.
설치형은 암흑기를 적게 소모하되 범위가 제한적이고, 활동형은 자신의 손에 불꽃을 만듭니다.】
【숙련도 최대 달성 효과로 ‘진멸’이 활성화됩니다.
추가로 암흑기를 활용해 불꽃을 폭발시킬 수 있습니다.】
설치형으로 쓰면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염의 벽 형태로 구현이 되는 느낌이고.
활동형으로 쓰면, 손 위로 화염 구체를 다룰 수 있는 형태가 되는 듯했다.
여기에 진멸을 활성화해서 폭발을 일으키면, 다수의 적을 광역으로 노릴 수도 있을 듯했다.
혹은 하나의 대상에게 여러 갈래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것이다.
“혼자 다 해 먹으려면 여러 경계에 발을 담그는 건 필수지. 흑마법사라고 다를까.”
회심의 미소와 함께, 강후가 왼손을 들어 죽음의 불꽃을 시전할 준비를 마쳤다.
지금 이 순간.
강후는 아주 잠깐이지만 암흑기를 다룰 수 있는 흑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암살자라는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을 묻는다면 하이브리드라는 단어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한 다양성이 강후에게는 분명히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