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무리 여왕 (1)
* * *
“타카시, 잘 지내?”
- 나? 나야 뭐, 원래 혼자서도 잘 지냈잖아? 그래도 걱정해 주니 기분은 좋네.
“운동은 좀 해?”
-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을 내가 왜……. 안 해.
“분신 다루는 것도 결국 네 몸이 건강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안일한데?”
- 꼭 이럴 때면 네가 엄마나 누나 같단 생각이 든단 말이지, 유청화.
그 시각, 유청화는 타카시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슈가 있어서라기보다, 타카시가 생각나서 안부도 물어볼 겸 화상 통화를 연결한 것이다.
평소에 전화를 하면 텐션이 꽤 떨어져 있는 목소리로 받곤 했는데, 오늘은 기운이 넘쳤다.
타카시가 음성 변조기를 쓰기 때문에 변조한 톤에 따라 그렇게 들린 것일 수도 있지만.
물론 화상 통화 화면에 보이는 것은 타카시가 아닌, 타카시가 띄워 놓은 이미지였다.
제법 타카시와 가깝게 지낸다고 자부하는 유청화도 타카시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한 번만 진짜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했는데, 타카시는 끝끝내 거절했었다.
“뭐 하고 지냈어?”
- 그냥 던전 몇 군데 돌고, 패턴 분석 필요한 곳은 내용 정리 좀 하고 있었지.
거기에다가……. 흥미로운 헌터를 하나 만나서, 걔랑 갈 던전을 물색해 보는 중이야.
“흥미? 사람 만나는 것도 따분해하는 네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어?”
- 너도 보면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기다려 봐. 사진 띄워줄게.
이내 화면에 뜬 것은 강후의 얼굴이었다.
유청화에게도 당연히 구면이다.
처음 만난 건 서울역.
외지인으로 보이는 강후에게 정신 스캔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그녀가 운영한 특설 마켓에서 강후가 아이템을 구매해 간 적도 있으니 모를 수 없는 얼굴.
최근 일본에서의 일도 헌터그램으로 본 그녀였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신강후?”
- 어, 역시 알고 있네. 얘한테 요즘 호기심이 생겼거든. 완전 내 과야. 타카시 2호기라고.
“오호, 그래?”
사람 깐깐하게 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타카시가 이 정도로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유청화처럼 타카시도 강후의 뭔가에 꽂힌 것은 분명하다. 눈으로 확인했다는 뜻도 된다.
- 이 녀석이 말야…….
그리고 타카시의 긴 얘기가 시작됐다.
* * *
같은 시각.
에펠탑이 정면으로 훤히 보이는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에밀리아가 홀로 섀클턴 위스키를 마셨다.
요새 들어 안 마시고 있다가 오랜만에 꺼낸 것이다. 그전에 마신 것은 강후를 만났을 때였다.
“파리의 야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네.”
에밀리아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헌터로서 성장하는 기반으로 삼기에는 가장 최악인 곳이라,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성장에 욕심이 많았던 에밀리아는 해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중, 저스티스에 들어가게 됐다.
장시환을 위시한 능력 있는 헌터들이 많은 저스티스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엘리트의 모임이기에 인맥을 확장하고, 그 인맥을 누리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혼자서는 가 볼 수 없었던 보상과 경험치가 넘치는 던전을 저스티스의 품에서는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저스티스와 함께 했다. 성장하는 재미를 항상 느낄 수 있어서. 끊임없는 자극을 주어서.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녀는 저스티스라는 모임 자체의 목적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단지 친목 도모라고 하기엔 섞인 헌터들의 색깔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를테면 빈센트 마이어는 연쇄 살인마다. 본인 스스로,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다.
에밀리아가 그런 빈센트에게 싫은 내색이나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저스티스가 주는 혜택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장시환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
“영웅 놀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악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에밀리아는 그게 불만이었다.
확실한 건 친목이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장시환은 이 모임의 목적에 대해 늘 애매하게 말한다.
미래를 위한 포석을 다지기 위해 뜻 있는 사람을 모았다고 하는데…… 무슨 뜻이 있다는 걸까?
장시환이 에밀리아에게 개인적인 신념이나 생각을 물어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 한 번.
장시환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정신 능력을 썼는데 통했던 것이다.
그때, 에밀리아는 특이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장시환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또 다른 자아가 있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고, 베일에 가려진 존재도 있었다.
그때부터 든 생각은 다른 인물은 몰라도, 장시환에게만큼은 이 모임에 숨기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녀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힘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그녀라고 다를 것 없지만, 빈센트의 선 넘는 살인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많았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장시환은 완벽한 위선자다.
그녀는 한 번도 장시환을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없었다.
이 생각은 비단 자신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 가까운 유청화의 오랜 생각이기도 하다.
* * *
그 무렵.
강후는 무리 여왕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 없는 극한의 난타전이었다.
매드 솔라키움은 진즉에 씹어 먹었고, 각신환은 입술에 물고 있었다. 언제든 삼키기 위해서다.
무리 여왕과 일대일 전투는 아직까진 버틸 만했다. 나름의 공방전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랄 났네.’
무리 여왕의 몸에서 나온 새끼 벌 몇 마리가 방금 죽은 헌터들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리 여왕에게 대검을 꽂아 넣었던 헌터도 죽었는데, 그도 어김없이 타깃이 됐다.
그 바람에.
“그으으으…….”
죽은 헌터 전원이 고스란히 교잡종화가 되어,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무리 여왕의 몸에서 자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온 시점부터는 주변 환경도 달라졌다.
마을에서 멈춰 있던 교잡종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무리 여왕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교잡종의 가세는 강후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강후가 승부수를 던졌다.
일대일 이외의 선택지는 여기서는 만용이다.
애초에 무리 여왕 자체가 강후보다 한참 높은 수준을 가진 몬스터였다.
여기에 생전의 헌터 능력을 그대로 승계하는 교잡종이 가세하면 사망 확정이다.
그래서 횡 이동으로 무리 여왕의 뒤로 이동한 다음, 곧바로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순간 이동하겠습니까?】
【2인 이상의 순간 이동은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정확히 50%입니다.】
성공하면 함께 전장을 이탈하는 거고, 실패하면 일단 마을에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무리 여왕의 심장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기에.
다음 순간.
파앗!
【순간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성공했다.
다른 전장으로 갑작스럽게 이동하자, 무리 여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힘을 보탤 교잡종도 사라졌고, 주변 식생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후가 앞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무리 여왕이 공세를 이어 갔다.
날이 바짝 오른 양팔이 강후의 몸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기공포】
강후가 기공포로 먼저 무리 여왕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기공포는 즉시 강후의 손끝을 떠나 날아가고 있었기에 무리 여왕도 일단은 막을 수밖에 없었다.
쿠웅!
충격파가 일며, 무리 여왕의 몸이 한 걸음 뒤로 밀렸다.
하지만 이내 뒤꿈치를 들고, 앞꿈치에 힘을 바짝 넣은 무리 여왕이 다시 돌진했다.
솨악! 솨아악!
그리고 위협적으로 양팔을 휘둘렀다.
강후가 뒤로 물러나면서 양손의 단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손이든 손가락이든 잘렸을 공격이었다.
‘인파이터 식으로 줄기차게 파고드니 더 까다롭군.’
방어라는 개념을 머리에서 삭제한 듯한 무리 여왕의 공격은 무척 까다로웠다.
애초에 수준 자체도 레벨로 따지면 500 레벨은 되는 듯했다. 아무리 낮게 쳐줘도 450 이상.
이런 그림이면 장기전이 당연히 좋을 리 없다.
시작부터 거칠게 공방전을 주고받은 탓인지 마나 사용과 무관하게 체력적인 부침도 있었다.
호흡이 무너진 건 무리 여왕도 마찬가지지만, 체감상으로는 자신의 페이스가 더 떨어진 듯했다.
‘서로가 서로의 패턴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끝을 보자.’
결정을 내렸다.
초반 공방전에서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공격 레퍼토리를 노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이 무리 여왕의 예측 가능한 범주로 들어가기 전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그래서.
카득!
입에 물고 있던 각신환을 깨물었다.
잘게 부서진 각신환이 혀를 따라 목구멍으로, 그리고 식도로 내려갔다.
깡! 깡! 까앙!
그사이에 무리 여왕의 공격 세 차례가 연타로 들어왔고, 강후가 뒤로 물러서면서 막아 냈다.
워낙 공세의 수위가 높다 보니, 제자리에서 방어하는 것도 어려웠다.
무리 여왕은 마치 오늘만 사는 것 같았다.
몸에 난 몇 개의 상처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고, 흔한 신음조차도 한 번을 토해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
“……!”
강후는 세상의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위장에 녹아든 각신환의 효과가 모든 감각과 신경 세포를 자극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하늘이 마치 광휘에 휘감긴 것처럼 밝아졌다.
태양이 있는 곳에선, 흡사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 정도의 광채가 돌았다.
게다가 무리 여왕의 피부, 솜털, 속눈썹의 흔들림, 눈의 미세한 깜박임까지.
모든 것이 잘게 쪼개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세밀하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리 여왕의 솜털과 속눈썹의 움직임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지듯 보였다.
내 움직임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느려진 느낌이라고 하면 딱 어울리는 비유가 될 것 같았다.
‘보인다.’
다시 파고드는 무리 여왕의 양팔, 날카로운 가시가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예측된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적의 공격 행위와 움직임에 대한 모든 연산이 가능해지며.
어려운 수학 문제의 해결도 가능해지고, 상대적이나 시간이 느리게 가는 체감 역시 가능했다.】
원작에 적어 두었던 각신환에 대한 내용 그대로였다.
한계 해제, 그리고 한계 돌파의 느낌.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효과의 유효 기간은 10초 남짓. 씹고 삼키고 퍼지는 시간을 제외하면 길어야 7초다.
【가속】
움직임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고는, 오히려 무리 여왕에게 공세적으로 가깝게 붙으면서 피했다.
평소 같았으면 공존하기 어려웠을 과감한 접근과 회피 시도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강후가 몸을 비틀었다.
신속 회피나 도약 같은 스킬을 활용하지 않고, 순수한 몸의 움직임만 활용했다.
그러자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히 강후를 건드리지 못하고 무리 여왕의 양팔이 지나갔다.
앞선 공방전에서도 공격이 빗나간 적이 없었던 건 아니기에 결과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지만.
문제는 강후가 뒤가 아닌 앞으로 피했다는 점이었다.
즉, 무리 여왕의 공격이 빗나간 시점에서 그녀는 치명적인 빈틈을 드러낸 셈이었다.
역시나.
푸욱!
강후의 대참수가 무리 여왕의 옆구리에 제대로 꽂혔다.
너무 세게 박혀서, 강후가 단검을 뽑을 생각보다 품에 있던 대체 단검을 꺼냈어야 했을 정도였다.
“꺄아아악……!”
단 한 차례의 비명도 질러 본 적 없던 무리 여왕의 입에서 고 옥타브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상황이 반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