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북한 (2)
‘인간의 상상력이란…….’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흡혈 파리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등장시키지 않고, 폐기했던 몬스터 콘셉트인 흡혈 파리.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의식의 발현이 되어 이렇게 현실로 만났다.
일단.
강후는 함웅호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흡혈 파리들이 막 나무를 떠나서 날아오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림자 걸음】
우선 만약을 대비해 여러 방향으로 그림자들을 흩뿌려 놓았다.
그다음,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함웅호의 목젖에 그대로 단검을 꽂았다.
흑마법사로 보이는 함웅호는 흡혈 파리를 소환하는 과정에 힘을 다 썼는지, 반항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혈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드덕거리는 함웅호에게서 강후가 매드 솔라키움 꽃다발을 빼앗았다.
왜애앵!
이내 거리를 좁힌 흡혈 파리들이 더욱 날갯짓을 하면서 강후에게 접근했다.
‘물리면 살아서는 못 나가겠군.’
저 많은 파리에게 피 한 방울씩만 빨려도, 몸에 피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지경.
강후는 유리 랜드 부근에 지정해 둔 포인트로 ‘순간이동’을 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너무 속 편한 생각이니까.
【보호 결계】
그래서 보호 결계로 몸 주변을 두르는 강력한 보호막을 만들어 냈다.
왜애애앵! 왜앵! 왜앵!
크스슷! 스슷! 크시스슷!
이내 결계에 부딪힌 흡혈 파리들이 더욱 날갯짓하며, 전력으로 결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일부 파리는 흡혈에 미쳐버렸는지, 몸이 타는데도 불구하고 결계에 몸을 비벼댔다.
강후에게 방어 스킬이 있기에 1차적인 대응을 했지, 없었으면 곧바로 시체가 됐을 상황.
‘함웅호를 미끼로 쓴 걸지도.’
함웅호가 들고 다닌 매드 솔라키움을 탐낸 다른 헌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보니, 방금까지는 사각지대여서 보이지 않았던 위치가 보였다.
그곳에는 보란 듯이 쌓여 있는 뼈 무덤이 있었다. 한두 구의 시체가 아니었다.
‘몇 명이 당한 거지?’
대충 보이는 해골만 해도 20개는 된다. 최소 20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
이곳이 누군가의 지성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웅호라는 교잡종을 만든 무리 여왕일 수도 있고, 제3의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림자 위치를 체크했다.
다섯 갈래로 보내 둔 그림자 중에서 가장 최대 거리로 멀어진 그림자 하나가 보인다.
이후에 빠져나갈 길도 넓게 트여 있고, 흡혈 파리가 숨어있을 수도 있는 나무도 적다.
다음 순간.
【보호 결계】
【자의에 의한 강제 파괴】
강후가 의도적으로 보호 결계를 터뜨리면서, 황폐화 효과를 유발했다.
반경 10m의 마나가 모두 증발하는 황폐화.
마나의 흐름으로 헌터를 쫓기도 하는 곤충형 몬스터에게 일시적이지만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어서 바로 그림자 하나와 위치를 바꿨다.
파앗!
달라진 시야.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방금까지 있었던 자리에 여전히 흡혈 파리들이 몰려 있었다.
일부 녀석들은 사방으로 비산하는 보호 결계의 조각을 물어뜯고 있기도 했고.
일부는 강후를 덮치려다가 자기들끼리 충돌해서, 서로를 물어뜯기도 했다.
“…….”
가슴이 철렁한다.
크기가 작아서 심각성을 간과하는 일이 많은데.
곤충형 몬스터가 오히려 큰 몬스터보다 위협적일 때가 많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흡혈 파리, 수면 파리, 중독 파리, 마비 파리 등등.
헌터의 대응 시스템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녀석들은 차고 넘친다.
벌써 북한 특유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실감하는 중이다.
전적으로 원작자인 자신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떡밥만 잔뜩 뿌려놓고, 회수는 쥐뿔도 안 하는 바람에 생겨버린 대형사고.
그래도 대응할 방식이 있어, 타격 없이 매드 솔라키움만 챙겨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더 이상 흡혈 파리가 쫓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강후가 잠시 멈춰서서 꽃다발을 정리했다.
자신이 먹을 매드 솔라키움만 필요할 뿐, 꽃 전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단검을 활용한 능숙한 손놀림으로 꽃을 전부 쳐내고는 필요한 열매만 취했다.
오랜 시간 지면에서 뽑힌 상태로 있어서 그런지, 과자처럼 건조해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효과의 측면 차원에서 문제는 없다. 단지 식감이 촉촉하지 않고 퍼석거릴 뿐.
“그냥 공동묘지네.”
갈무리한 매드 솔라키움을 속주머니에 넣는 동안, 주변에 심심찮게 있는 백골을 발견했다.
아까 본 뼈 무덤과 별개로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도 제법 있었다.
무서운 것은, 가까이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에 백골들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는 얘기.
치울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모종의 이유로 필요해서 남겨 둔 것일지도 모른다.
강령술에 관련된 것일 수 있고, 혹은 숨겨진 저주에 연관되어 있는 것일지도. 상상의 폭은 넓다.
그 이후.
여섯 시간 정도가 흘렀다.
해가 뜨면서 날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이곳의 어둠은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란 거대한 나무들이 군락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정식 명칭은 몽달이 나무.
이름만 들어선 귀엽게 들릴 수도 있는데, ‘몽달이’는 보통 밤중에 나무 같은 것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몽달이 나무는 마치 사람을 나무처럼 만들어 세워 놓은 것 같은 몸뚱이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잎이 널찍하고 크다 보니, 햇빛을 차단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몽달이 나무 군락이 있는 이곳은 아직도 밤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동하는 동안.
강후는 짬짬이 암흑기 속도에 맞춰 가시 지옥 연습을 하기도 했고.
중간에 잠시간 숨을 돌릴 때면, 바로 왼손을 주력으로 하는 단검 공격 연습도 했다.
시간을 1분도 낭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더 채워 넣을 것이 없다면 마음 놓고 푹 쉬어도 되겠지만…….
자신의 성장은 늘 현재 진행형이었다. 성좌와 스킬 강탈이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후웅!
머리 위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소리가 들릴 일은 하나밖에 없다.
【신속 회피】
본능적으로 상황을 직감한 강후가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1차 판단을 끝내고는, 바로 뒤로 회피했다.
그러자 간발의 차로 강후가 있던 자리를 두꺼운 나무줄기가 훑고 지나갔다.
“그라운드 제로는 늘 이런 식이지.”
아슬아슬했던 상황이긴 하지만,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의 생태계적인 특성이니까.
여기는 식물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며, 돌이나 바위라고 해서 무조건 단단한 것이 아니다.
상식이 깨지는 곳이다.
휘이이!
나무줄기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 바람이 주변에 있던 꽃들을 거칠게 흔든다.
그러자 황금빛의 꽃가루가 부스스 날리며, 바람을 타고 강후에게로 흘러들어 왔다.
【중독 억제】
그때 역신의 숨결 목걸이에 있는 중독 억제 효과가 발동됐다.
꽃가루가 유발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수면 효과. 목걸이가 없었다면 바로 여기서 잠들었을 터다.
다음 순간.
꾸욱.
“……!”
낙엽에 가려져 있던 편평한 돌을 밟은 강후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바로 도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쿠우웅!
밟은 자리에 있던 돌이 아래로 훅 하고 꺼졌다.
마치 맨홀 뚜껑 아래의 내부처럼 밑으로 쭉 빠지는 경로였다.
이러니 그라운드 제로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살려고 들어오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 봐도 무방하다. 지뢰밭 위를 걷는 꼴이니까.
그래도 나름의 대응법이 있었기에 강후는 별다른 위기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 긴장이야 늘 하고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 *
매드 솔라키움 포인트 도착.
강후는 유리 랜드가 있던 위치에서 북쪽으로 30km 거리에 있는 지점에 와 있었다.
원래 도시였던 곳도 지금은 야생이나 다름없게 돼서, 모든 것이 과거에 멈춰 있었다.
버려진 차,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오래된 통조림들, 제대로 현장에 도착하지 못한 건축 자재까지.
그라운드 제로 북쪽, 북한과 맞닿은 세계는 이렇게 모든 것이 과거에 갇힌 상태였다.
“매드 솔라키움 3개인가?”
전방에 징벌자가 보인다.
그리고 녀석의 뒤쪽으로 아름답게 피어있는 매드 솔라키움 꽃 3송이가 보인다.
저것까지 획득하면 총 15개까지 확보가 된다. 당분간 쓰기에는 적당하다.
욕심 같아서는 더 채취하고 싶지만, 가까운 포인트는 여기가 전부다.
다음 포인트는 북쪽으로 30km를 더 가야 해서, 강후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징벌자는 전에 봤을 때도 그랬지만, 임의의 직업군을 카피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게다가 침입자의 레벨에 맞춰서 수준이 조절되는 만큼, 항상 체감하는 난이도는 같았다.
레벨 1이 오면 레벨 1에 맞게, 500이 오면 그것에 맞게 녀석의 수준이 보정되기 때문.
“기공수네.”
전에 상대했던 징벌자는 암살자였는데, 이번의 징벌자는 기공수의 모습을 빼닮아 있다.
기공수와 전투해 본 경험이 없다면 헤맬 수도 있지만, 강후에게는 뼈와 살이 된 경험이 있다.
바로 증선락과의 전투.
징벌자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결국은 증선락의 하위 호환 형태일 뿐이다.
물론 방심해서는 안 된다.
강후는 대(對) 기공수 전략의 1순위를 떠올렸다. 망설이지 않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가속과 도약을 번갈아 이어가며 징벌자에게 달려들었다.
기공수의 기공탄 공격이 까다롭고 위협적인 것은 맞지만.
여기에 움찔하거나 망설이게 되면, 기공수에게 연타 공격을 허용하며 죽거나 다치기 딱 좋다.
그렇기에 강후는 자신의 감각을 믿고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스윽.
이내 살짝 아래로 내려가는 징벌자의 손가락. 기공탄을 쏘아내기 직전의 동작이다.
경로가 예상된다.
기공탄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유도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갑자기 곡선이나 직각으로 꺾이는 일은 거의 없다. 징벌자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타앙!
징벌자가 기공탄을 날렸을 때.
강후가 무릎을 힘껏 굽히며, 몸을 낮춘 상태에서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날아드는 기공탄을 보면서 허리까지 뒤로 꺾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기존 추진력은 잃지 않는 가운데, 깔끔하게 기공탄을 흘려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강후는 전광비도를 활용해 징벌자에게 단검을 투척했다.
전진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진행하는 투 트랙 전략이었다.
“……!”
순간 당황한 징벌자가 반 박자 늦게 기공강벽을 세우며 단검 공격을 막아냈다.
밀쳐내기 효과가 같이 걸려 있었기에 징벌자의 기공강벽이 깨지며, 그가 뒤로 쭉 밀려났다.
징벌자가 연이어 기공강벽 하나를 더 세웠다.
기공수의 기공강벽이 투명한 형태인 것과 달리, 징벌자의 기공강벽은 불투명한 색깔이었다.
즉, 강후와 징벌자 서로가 기공강벽에 가려져 서로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됐다.
시야를 가려 기공탄을 다시 위협적으로 날릴 변수를 만들어 보겠다는 징벌자의 계산으로 보였다.
하지만.
【백일참】
강후는 징벌자의 알량한 전략을 인지하고는 이미 큰 건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벌써 단검 끝에는 마력이 쉴 새 없이 응축되는 중이었다. 재앙은, 그렇게 몸집을 키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