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북한 (1)
* * *
다음 날 새벽.
날이 개자마자 강후는 바로 별장을 떠났다.
일찌감치 저녁부터 잠이 든 정유리는 문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던전에서 강행군을 제대로 했던 모양. 살짝 코를 고는 듯한 소리까지 듣고는 밖으로 나왔다.
북쪽으로 향하면서, 강후는 타락귀를 소환해 계속 주변을 정찰시켰다.
그리고 중간중간 필요할 때마다 제3의 눈 성좌를 이용해서 후방을 살필 눈을 배치시켰다.
워낙 소리 없이 다니는 몬스터가 많은 그라운드 제로이다 보니, 만약을 대비해 둔 안배였다.
시이잇! 시이잇!
타락귀는 열심히 주변을 돌면서 암흑기를 뿜어내는 몬스터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녀석이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한다는 것은 관련 몬스터가 없다는 뜻.
그래서 어느 정도 몸의 긴장을 풀고, 계속 북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면 갈수록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음마저도 뭔가에 먹혀서 사그라드는 느낌.
마치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혼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
슬슬 백골이 보인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사람의 뼈를 보는 일이야 흔하다.
몬스터에게 죽은 헌터의 사체도 있고, 살 곳이 없어 북쪽으로 가려다가 죽은 일반인도 있으며.
어디선가 살해당한 다음 그라운드 제로에 유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라운드 제로는 지형적 특성상 외부인이 잘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치안청에서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헌터의 시체만 수습해도, 암수 살인이 수천 건은 발견될 것이라고 했을까?
별장을 떠난 지, 약 2시간 후.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했지만 매드 솔라키움은 없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뜯고, 먹고, 일부를 뱉은 흔적만 있었다. 야생동물의 소행이 분명하다.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곳은 보통 ‘징벌자’라는 수호자가 있다.
하지만 이 수호자는 인간에게만 반응하므로, 야생동물의 ‘고급’ 식사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매드 솔라키움이 없어지면 징벌자도 현장을 떠나는 만큼, 이렇게 빈 공간만 남았다.
그때.
키시리릿!
타락귀가 반응했다.
‘오.’
녀석이 쏜살같이 달려간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과연 몬스터 하나가 있었다.
검은 인도자.
예전에도 마주쳤던 녀석이다.
망토처럼 거대화시킨 몸에 휘말리면 시각을 잃고,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죽게 만드는 몬스터.
대재앙 – 어둠과 계약하기 전이었다면 암흑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일단 잡고 봤을 터.
하지만 이젠 검은 그림자를 사냥할지,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칠지 정할 수 있었다.
검은 인도자의 이름 위에 숫자가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3】
【검은 인도자】
암흑기를 무려 3이나 주는 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어떻게든 쫓아가서 잡아야 한다.
현재 그라운드 제로는 ‘경계기’다. 몬스터가 그만큼 강해지지만 보상도 늘어나는 시기다.
‘이것 봐라?’
그때, 강후가 검은 인도자가 아닌 다른 몬스터를 감지하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놓칠 뻔했는데, 10m 남짓한 거리에 돌연변이 해바라기가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마주쳤을 때는 녀석으로 하여금 산성액 발사를 유도하고 잡았었다. 살짝 위험했던 공략법.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참에 겸사겸사 연습도 될 것 같고.
【가시 지옥】
강후가 선택한 것은 가시 지옥이었다.
전체 이름은 잿빛 가시 지옥이지만, 별도의 설정이 없으면 생략해서 표기하는 모양이다.
가시 지옥 스킬을 사용하자, 강후의 왼손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른 암흑기가 지면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러더니 강후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을 선이 그려졌다.
마치 강후가 있는 자리에서 돌연변이 해바라기가 있는 자리까지 연필로 직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위치까지 직선이 그려지는 순간, 강후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가시 지옥의 발동을 위한 동작이었다. 스킬 학습과 동시에 학습된 시동 동작이기도 했다.
그때.
콰드드득!
지면 아래에서 검은 가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솟구쳐 올라왔다.
가장 먼저 올라온 가시는 강후에게 가까운 위치였고, 마지막 가시가 해바라기 밑에서 솟았다.
키히이이이……!
돌연변이 해바라기가 기분 나쁜 비명 소리를 냈다.
지금은 강후를 특정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감지하지 못하기에 녀석은 비명만 질렀다.
콰드드득!
가시는 그렇게 대상을 타격하고 다시 지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곧바로 다음 간격에 맞춰 올라왔다.
시간으로 따지면, 같은 자리에 가시가 약 1초 간격을 두고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모습이었다.
‘암흑기가 가시로 변하는 게 아니라, 주변 토질에 맞게 가시 형태로 변화를 유도하는 거네.’
스킬 메커니즘도 자연스럽게 확인이 됐다.
이런 형태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는 쓸 수 없거나, 암흑기로만 구현된 가시 형태의 모양만 만들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는 물리적인 공격보단 영적인 공격으로 기능할 듯했다. 망령 몬스터를 노리듯이 말이다.
‘집중을 계속해야 하네. 직선이 자꾸 흐트러지려고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는군.’
강후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돌연변이 해바라기를 제물 삼아, 할 수 있는 체크는 다 했다.
일단 시전 내내 계속 암흑기가 쓰이기에 소모량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고.
자신을 시작점으로 타깃까지 이어지는 암흑기의 선 혹은 띠를 정교하게 다루는 통제가 필요했다.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더니, 손끝에 뻐근한 느낌이 들면서 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화력은 확실했다.
땅 아래에서 흙이든 돌이든, 콘크리트든 해당 토질에 맞게 구현된 고체 가시를 올려치는 것이었기에.
물리적으로 줄 수 있는 피해가 상당했다.
식물인 해바라기이기에 여기저기 찔리고도, 비명을 내지르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사람이었다면 어딘가 관통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이었다.
콰드드득! 콰드드득!
키에에엑…….
치이이익.
이내 돌연변이 해바라기가 오므린 꽃봉오리 속에 잔뜩 머금고 있던 산성액을 토해내며 죽었다.
예전이었으면 양동이로 한 통은 족히 될 만한 저 산성액을 아슬아슬하게 유도하는 패턴을 썼을 터.
하지만 10m 거리에서 가시 지옥으로 해결하니, 손과 발에 흙을 묻힐 일도 없었다.
【사령의 침묵】
【은신】
바로 강후가 사령의 침묵을 쓰며 검은 인도자에게 접근했다.
꽤 가깝게 이동했지만, 검은 인도자는 강후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녀석의 후방에 자리를 잡은 강후가 바로 흑월참 준비에 들어갔다. 망령형 몬스터니까.
암흑기는 절반 정도만 썼다.
그리고 차징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검은 인도자를 향해 흑월참을 발사했다.
다음 순간.
스퍼엉……!
흑월참의 몸 정중앙을 관통당한 검은 그림자가 그 자리에서 풍선처럼 터졌다.
스스로도 죽었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암흑기 3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암흑기의 전체 보유량은 ‘452’입니다.】
‘이게 이렇게 쉽나?’
이런 힘의 차이라면 검은 인도자뿐만 아니라, 검은 그림자와도 해 볼 만하겠지 싶었다.
문지기 정도의 개념으로 전락한 느낌이랄까? 더 이상 과거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 위에 숫자를 달고 있는 녀석을 눈에 불을 켜고 찾게 될 정도다.
‘가시지옥, 이거 재밌는 스킬이다. 앞으로 쓸 일이 많겠어. 변수 창출에도 좋고.’
강후가 아직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손맛을 떠올렸다.
가시 지옥을 쓸 때만큼은 흑마법사가 된 느낌도 들었다.
흑마법사 헌터가 보통 이런 식으로 암흑기를 컨트롤하는 스킬을 쓰기 때문이다.
특이점이 있다면, 자신은 흑마법사가 아니라 암살자라는 것. 이 역시도 좋은 변수다.
* * *
그 이후, 2시간이 더 흘렀다.
중간에 검은 인도자 셋을 더 잡았고, 추가로 암흑기가 3이 더 올랐다.
암흑기는 1이 아니라, 0.5를 준다고 해도 감지덕지인 만큼 보상이 있는 놈은 무조건 잡았다.
【(긴급 알림) 경고. 현재 당신은 통신 불가 지역을 50m 앞두고 있습니다!】
계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통신 불가 지역 300m를 앞둔 시점부터 5m 단위로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통신 불가 지역으로 일단 들어가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연락은 불가능해진다.
사실 여기서 문제가 생겨도 누군가 도우러 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제 완전히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모양이었다.
다르게 본다면 국가의 영향력이 닿는 최후의 끝자락이라는 명시가 될 수도 있겠지.
이윽고.
강후가 통신 불가 지역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긴급 알림 문자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다음 포인트가…….’
지도를 보며, 새롭게 방향을 설정하려고 할 즈음.
스스슷. 스스스슷.
발소리가 들렸다.
강후가 바로 은신을 쓰면서 소리의 진원지를 살피니, 헌터 하나가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나시미 던전에서 봤던 ‘리권수’처럼 무리 여왕에 의해 되살아난 교잡종이 틀림없었다.
일단 교잡종으로 보이는 몬스터의 이름은 함웅호.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는 반 정도 까졌다.
특이한 점은 간부들이 입을 법한 제복을 차려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앞서 카나시미 던전에서 봤던 리권수와 달리, 전반적으로 몸에 살집이 있었다.
‘그러면 무리 여왕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네. 잠깐. 근데 저건 뭐지?’
강후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함웅호가 들고 있는 의문의 물체였다. 자세히 보니 꽃다발처럼 보였다.
그런데.
‘매드 솔라키움?’
그 꽃다발이 다른 꽃이 아니라 매드 솔라키움 꽃 열 송이를 뭉쳐서 만든 꽃다발이었다.
물론 손으로 뭉쳐서 꽉 움켜쥐고 있는 조악한 형태였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꽃도 그대로고, 여기에 같이 맺혀 있었을 매드 솔라키움 역시 원래 상태 그대로였다.
‘이건 생각도 못 했네.’
다른 포인트를 찾아가 봐야 하나 싶었는데,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셈이 됐다.
녀석만 죽이면 매드 솔라키움도 채집되니 일거양득.
강후가 은신 상태에서 함웅호를 향해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선수필승 아니던가?
바로 그때.
화아아악!
함웅호에게서 갑자기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홱!
이내 강후의 위치를 인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기교의 장막】
바로 장막을 깔았다.
절대 은신 상태에 돌입하자 함웅호가 강후의 존재를 놓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으로 직접 쫓지 않는 것을 보면 시각은 퇴화한 모양이다. 아니면 잃었거나.
‘흑마법사 쪽인가.’
따로 든 무기나 공수 전환 동작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 계열로 보였다.
이럴 때는 최대한 빨리 치고 빠지는 게 정답.
필요한 건 매드 솔라키움이니까 그것만 녀석에게 빼앗으면 될 듯했다.
강후가 다시 앞으로 도약하려는 순간.
크하아아아!
함웅호가 갑자기 두 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더니, 힘껏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젠장.’
강후는 함웅호가 홀로 보호 없이 당당하게 그라운드 제로를 거닐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애애앵!
지금껏 쥐 죽은 듯이 조용했었던 주변 나무들에서 일제히 ‘검은 점’이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흡혈 파리】
어림짐작으로도 수천 마리는 족히 되는, 그것도 사람 피를 빨아먹는 곤충 몬스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