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진입 준비 (2)
* * *
오후.
강후는 K의 배려로 유리 랜드 안에 있는 손님용 별장에서 쉬다가 떠나기로 했다.
막 시작된 비가 밤에 그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험한 그라운드 제로를 가는 데 있어서 날씨가 좋다고 딱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금은 빗줄기가 제법 거셀 때라, 조금 피하고 싶었다.
K에게 받은 지도를 토대로 동선을 다시 짰다.
“여기서 매드 솔라키움을 구하고. 조금 더 들어가서 여기서 무리 여왕을 찾으면 베스트.”
최단 동선이 기분 좋게 그려지지만, 낙관적인 예측은 보통 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몇 번 허탕을 치는 그림을 동선에 넣었다. 이게 좀 더 현실적이니까.
“북으로 제법 들어가겠는데. 여기서부터는 통신 불가 지역이라고 했는데, 피할 수 없겠군.”
어지간해서는 통신 불가 지역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선다.
현실적으로 계산하니 마음은 편했다. 북한 땅을 실컷 밟게 생겼다.
쉬는 동안 창밖으로 정말 많은 수의 트럭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전부 정화 길드의 인장이 찍혀 있는 트럭이었다.
정화 길드의 인장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형상화한 모양으로 제법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삽화로 인장 모양을 추가한 적이 있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 무너지지 않는 근성.]
아울러 인장과 같이 새겨진 슬로건도 보인다.
원작에서는 나름 뽕이 차던 멘트였는데, 신강후의 입장에서 보니 역겨움이 느껴졌다.
정화 길드의 헌터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릇된 신념과 강제되는 근성 속에 희생되는 걸까?
장시환과 채관형이 드리워놓은 그림자는 은밀하게, 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길드에서 이상하거나 문제가 될만한 요소를 발견해도, 길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우리 길드가 그럴 리 없어, 마스터는 그럴 분이 아닐 거야, 같은 현실 부정의 기제들.
놀랍게도 정화 길드는 장시환이라는 인물에게 깊이 취해 있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와도 같다.
모든 프로세스가 그렇게 짜여 있다.
소속 헌터들은 채관형은 껌처럼 씹어대도, 장시환에게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전적으로 믿는다.
‘K도 정화 길드를 100%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했었는데. 자본주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끝없이 오가는 정화 길드의 트럭을 보니, 새삼 K의 말이 생각나 강후가 웃었다.
물론 K의 속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차 거래를 많이 할수록 마진을 많이 남기는 것은 K니까. 돈을 쓰는 건 정화 길드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정유리의 전화였다.
“어.”
- 오빠! 어디야? 사흘 동안 던전에 있어 가지고 연락이 온 줄도 몰랐네! 잘 지냈어?
“유리 랜드.”
- 헐? 오빠가 여기는 왜?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온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정유리의 귀여운 착각에 곧바로 일침을 날린 강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넉살 좋게 너 보려고 왔어, 해도 됐을 텐데 그걸 못 해서 냅다 벽을 쳐버렸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면역이 확실한지, 정유리가 더 넉살 좋게 받아쳤다.
- 사실 오빠가 여기 올 줄 알고, 내가 던전 일정은 근처로 잡아 놨었어!
“그건 좀.”
- 하여간 재미 드럽게 없어! 어디야? 오빠 보러 갈게. 왔는데 안 만나면 서운하잖아!
“여기, 손님용 별장.”
- 아항, 거기구나? 심심하지? 형서도 없고, 보혜 누나도 없어서 말동무도 없고 말야.
“냉정하게 말해서 방금 말한 두 사람은 말동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냐. 있으면 더 어색하지.”
- 헷, 하긴 그래. 아무튼 기다려! 안 그래도 좀 쉬고 싶었으니까 거기서 같이 쉬어야겠다!
“그래. 이따 보자.”
별장이 매우 컸기 때문에 ‘같이’ 쉬겠다는 정유리의 말을 오해해서 들을 건 없었다.
저녁 무렵.
정유리를 만났다.
강후를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연신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하는 정유리의 모습은 어린아이 같았다.
반가움이 담긴 인사라고 해 봤자 손이나 몇 번 더 휘젓는 게 전부인 강후에게는 더 그랬다.
한달음에 달려온 정유리가 반가움에 포옹을 하려다가, 강후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멈췄다.
그리고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궁시렁거렸다.
“하여간 반가운 척도 못 해요. 멀리서부터 달려온 사람 민망하게 말이야.”
“알잖아.”
“알긴 뭘 알아? 흥.”
“그나저나 피부가 꽤 많이 탔네. 구릿빛이 보여.”
“그치? 이번에 간 던전이 하루 종일 낮인 던전인 데다가 햇빛이 장난 아니라서 완전히 탔어!”
“건강해 보이는데.”
“오빠랑 있으니까 더 비교되네. 와…… 이게 밀크 초콜릿과 그냥 초콜릿의 느낌인가?”
정유리가 구릿빛으로 변한 자신의 피부와 강후의 하얀 피부를 비교하며 큭큭 웃었다.
한편 강후는 못 본 새에 정유리에게 늘어난 성좌 하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화신(禍神)】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원념과 저주가 끊임없이 복수 대상의 무의식을 자극합니다.
신경학적, 정신학적 변화를 겪을 수 있으나 그 정도는 복수 대상의 정신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채관형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이제는 성좌를 불러들였구나.’
항상 웃고 활기찬 정유리를 생각하면,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성좌라고 볼 수 있다.
성좌 스캔 정보 외에 정유리에게 플러스가 될 만한 요소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확인된 성좌 정보만 본다면, 채관형에 대한 복수심의 끝판왕과도 같았다. 저주 그 자체다.
정유리의 아픈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강후이기에 이런 성좌 계약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단지 때 묻지 않았으면 하는 그녀의 순수함에 성좌의 독한 마음이 짙게 물들지 않길 바랄 뿐.
정유리가 화제를 돌렸다.
“오빠! 혹시 잠깐 시간 괜찮아? 나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생겼는데, 오빠는 알 것 같아서.”
“뭔데?”
“요즘 던전을 다니다 보니까 답답한 게 하나 생겼거든. 훈련장에서 좀 봐줄 수 있어?”
“얼마든지.”
두 사람은 별장 바로 옆에 있는 연습용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자주 사람이 올 것 같지는 않은 훈련장이지만, 내부는 깔끔히 정리정돈 되어 있었다.
먼지가 앉은 곳도 없었고, 오히려 내부가 밝아 칙칙한 그라운드 제로의 분위기보다 훨씬 나았다.
적당히 훈련장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선 정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오빠도 알다시피 내 능력 베이스는 마법이잖아? 공간 통로를 여는 능력에 공격 마법을 섞어 쓰고, 여기에 연기화까지.”
“알고 있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통로를 여는 능력은 켄지와 비슷하고, 검은 연기로 변하는 신체화는 그녀의 주 특징이다.
“요즘 공간 통로를 열면서 답답함을 많이 느껴. 전투가 급박하게 진행되면 쉴 새 없이 통로를 열어야 할 때가 많은데…….”
파앗! 파팟!
정유리가 시연을 보였다.
계속 연달아 통로를 여닫는 작업을 반복하자, 어느 순간부터 호흡이 안 맞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반 박자 늦는 것 같아. 내 생각보다 통로 구현이 늦으니까, 전투 호흡도 같이 꼬이는 것 같고.”
“계속 써 봐. 지칠 때까지. 조용히 보고 짚이는 게 있으면 말해 줄 테니, 계속.”
강후가 팔짱을 낀 채, 정유리의 공간 활용을 유심히 살폈다.
타카시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 자신의 기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중하고 보면, 확실히 보이지 않던 패턴이나 습관이 잘 보였다.
모든 움직임과 변화를 아주 짧은 시간 단위로 쪼개어 보고 판단할 수 있달까?
정유리의 능력 활용을 보면서.
켄지와 있었던 일을 상기했고, 아울러 원작에서 다뤘던 내용도 다시 떠올렸다.
그러자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해결책도 같이 떠올랐다.
“잠깐.”
“응? 왜?”
“더 안 해도 될 것 같아.”
“벌써…… 보여?”
“보이는 것도 보이는 거고. 왜 문제가 생겼는지 알 것 같은데. 솔루션도 줄 수 있겠어.”
“……진짜?”
정유리는 당황한 눈치였다.
강후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은 답답함을 토로한 거지, 해결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강후의 입에서 솔루션의 얘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강후의 눈에는 보이는 걸까?
“근데 맨입으로 알려주기는 좀 그런데.”
“뽀뽀……라도 해 줄까?”
“하찮은 뽀뽀가 대가가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냐, 지금.”
“오빠 너무 명치 세게 친다! 아파!”
“됐고. 들어 봐.”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다.
정유리는 앞으로도 같이 갈 파트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부분이 있으면 도와주는 게 맞다.
켄지 이상으로 공간 활용 능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충분히 재능이 있는 여자다.
강후가 말을 이었다.
“공간을 열 때 말이야. 입구와 출구를 생각하지 말고, 반대로 해 봐.”
“나갈 길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들어갈 길을 그리라는 거야?”
“어. 통로를 여는 과정이 너무 인과관계 식으로 엮여 있다 보니까 여기서 머뭇거림이 생기는 거야.”
“안전성을 자꾸 신경 쓰게 된다는 거지?”
“공간을 여는 능력의 핵심은 과감함이야. 망설일수록 늦어져. 신중한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거지.”
“……아!”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정유리가 탄성을 터뜨렸다.
조언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만, 듣고서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영역이다.
재능 있는 정유리인 만큼, 약간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이 상당한 자극이 된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다시 공간을 연달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과 다르게 막힘 없는 연계가 이어졌다.
반 박자의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피드백과 동시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조언을 해 준 강후도 당황했을 정도로 빨랐다.
“와……! 역시 오빠야. 오빠, 진짜 대단해! 보자마자 처음부터 그 문제가 보였단 말이야? 진짜?”
쪽쪽! 쪽! 쪽!
“…….”
강후가 어찌 방어(?)할 새도 없이 정유리의 볼 뽀뽀가 연신 강후의 차가운 볼 위에 작렬했다.
“아.”
“음.”
“어……. 이게 기분 좋으면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늘 하던 거라…….”
이내 강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시선을 느꼈는지, 정유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큭.”
강후가 피식 웃고 말았다.
혼자 어린아이처럼 크게 기뻐하고, 표현하고, 또 민망해하는 그림이 귀여웠다.
때려죽여도 강후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고.
“오빠, 정말 고마워. 어떻게 이게 보이는 거야? 순간 소름 돋았어. 오빠는 암살자잖아.”
“암살자라고 꼭 암살자의 움직임만 잘 보라는 법은 없잖아.”
“그래도 다른 직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지식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조언 아니었어?”
“해피 엔딩이니 됐지.”
“오빠에게 물어보길 진짜 잘한 것 같아. 역발상을 말해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
“앞으로 막힐 때가 있으면 뒤집어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 봐. 생각보다 괜찮아.”
정과 역, 역과 정은 다른 듯하면서도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원작에서도 많이 쓰인 접근법이었기에 이번에도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통했다.
‘결국은 내 세계다, 이건가.’
새삼 자신이 지금,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 실감하는 강후였다.
창조주인 ‘원작자’의 뜻대로 충실하게 설계된 세계.
그래서 이렇게 예리하게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미래와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비틀고 싶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면, 그 끝에 남는 것은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 뿐이니까.
순리를 비틀어야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다.
진작 죽었어야 할 이현석이 살아서 정화 길드를 괴롭히고 있고.
원작대로면 감옥에서 고생 중일 박동재가 잠재력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