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군계일학 (5)
* * *
나중에는 강후가 출혈을 유지해 둔 광전사를 죽이는 것만도 버거울 지경에 이르렀다.
에토, 미유키, 안영호가 계속해서 출혈이 걸린 광전사를 제거해 나갔지만.
그것보다 강후가 출혈을 유발한 다음, 계속 유지하면서 내성을 벗겨 낸 녀석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강후가 절반 정도는 직접 상대하면서 죽이는 그림으로 바꿨다.
미유키도 강후의 출혈 유지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들은 것이 있어 잘 알았다.
그루 길드에서 접한 소식도 그렇고, 안영호가 직접 체험한 경험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기 마련.
대단하다고 해도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는 것이 미유키의 솔직한 속마음이었지만…….
강후의 실력은 대단함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왜 안영호가 입버릇처럼 강후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단순히 출혈 유지에 유리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깎아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강후는 시간을 극한으로 쪼개어 썼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은 광전사에게 출혈을 묻혔고.
더 나아가 출혈이 걸린 광전사 중에 출혈이 풀려 다시 내성이 생기는 녀석이 없도록.
갱신을 꼼꼼히 했다.
최전방에서 강후가 직접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이후, 미유키는 출혈 없는 광전사를 보지 못했다.
사정거리권 안에 있는 광전사들은 전부 내성이 벗겨진 채, 야들야들한 고기가 되어 있었던 것.
“팀장님, 이게 이렇게 쉬운 구간이 되어 버리네요. 전에 왔을 때는 지옥이었는데…….”
“그러게. 내가 한 게 뭐가 있나 싶어.”
이곳이 처음인 강후와 달리, 미유키는 이 던전을 전담했기에 비교해 볼 케이스가 많았다.
전에도 암살자든 광전사든, 혹은 출혈 스킬이 있는 직업군을 대동해서든 왔지만.
출혈 유지에서 시간이 너무 짧았고, 다수의 몬스터를 타격할 수도 없는 탓에 속도가 느렸다.
결국 하나씩 죽이면서 가는 그림이었다. 인원이 넷이어도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 하나씩 맡아서, 순식간에 넷의 광전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당히 찔러서 양념해 둔 광전사들은 강후가 이따금 혈화로 터뜨려 죽이기도 했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는데, 이 스킬도 볼수록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암살자인 강후의 모습에서 미유키는 흑마법사, 광전사, 마법사의 모습 모두를 봤다.
그래서 왜 앞서 차소혁과 토우시 길드의 헌터 셋이 몰살당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예상이 전부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강후가 이 정도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것이겠지. 꿈에도 몰랐을 거다.
* * *
몰락한 광전사 구간을 쉽게 돌파하면서, 이후 공략에도 속도가 쭉 붙었다.
중요 구간마다 몰락한 광전사의 변형, 혹은 상위 호환 버전의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강후의 출혈 유발, 유지를 기반으로 하는 가운데 어렵지 않게 돌파에 성공했다.
덕분에 강후도 레벨이 229까지 쭉 올랐다. 나오는 몬스터가 하나같이 다 경험치 풍년이었다.
칭찬이 끊이질 않는 세 사람의 반응을 보면서, 강후는 새삼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인지했다.
자신에게는 너무 당연한 암살자로서의 능력.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특별하면서, 매우 귀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작금의 헌터 세계는 전 세계적으로 암살자의 부족에 크게 시달리고 있었다.
실력 있는 암살자가 적다 보니 생긴 현상인데, 이 역시 강후에게는 큰 호재였다.
해외 용병 활동을 할 때도 찾는 곳이 많을 듯했다.
어쩌면 의뢰도 입맛에 맞게 선택하거나, 기존 보수보다 더 높은 금액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 와서 성장을 많이 했네. 기분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
일본에서 정신없이 보냈던 일정에 대한 강후의 총평이었다.
그사이, 국내에서 해야 할 일거리가 확 늘기도 했다.
이현석과 얘기된 심연의 던전도 가 봐야 하고, 그와의 유대감도 더 쌓아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매드 솔라키움과 랜덤 스킬북 건에 관련해서 북한도 다녀올 필요가 생겼고…….
해외 의뢰 건에 관련해서 이예린도 한 번 케어해 줄 때가 됐다.
그 외에도 정유리를 통해 마스터 K와 강복화의 인맥도 다져 둘 필요가 있고, 여기에 김신령까지.
그만큼 파워가 있는, 가치 있는 인연들이라 허투루 넘길 것이 없었다.
특히 이현석은 정화 길드를 적으로 둬야 하는 강후의 입장에선 가장 핵심인 카드이기도 했다.
* * *
얼마 후.
“드디어…….”
“여기까지 와보네요. 진짜 가짜 판독법과 그 효과만 조사하고 바로 도망쳤던 보스 몬스터.”
일행은 이 던전의 최종 보스 몬스터인 ‘뤼게’ 앞에서 마지막으로 정비를 하고 있었다.
녀석의 특성은 인지한 상태.
수시로 몸을 분열해서 두 개로 만드는데, 모든 분신 형태가 그렇듯 진짜와 가짜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진짜 뤼게를 때리면 체력이 평소보다 2배 빠지지만.
가짜 뤼게를 때리면 그 대미지의 5배만큼 체력이 회복된다는 점이다.
실수가 치명적이다.
타카시와 왔으면, 패턴만 듣고도 군침을 질질 흘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보스 몬스터였다.
판독법은 간단했다.
뤼게의 출혈 상태를 최대로 유지하면 됐다. 즉, 50 중첩을 유지하고 있으면 매우 쉬웠다.
그때는 분열을 해도, 진짜 뤼게의 몸 색깔이 기존과 다르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분신과 본체가 완전히 똑같아서 어떤 것이 진짜 뤼게인지 알 수 없었다.
때려 맞추기로 공격도 불가능한 것이 잘못 맞췄다가는 체력을 다 회복해서 삽질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가짜를 간파한다고 한들 바로 분열을 멈추고 원래대로 되돌아가기에 헛수고였다.
다시 분열을 해 버리면, 또 동전 뒤집기처럼 찍어 맞추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셈이다.
결국 뤼게의 진가(眞假)를 판단하려면 출혈 50 중첩, 그것도 유지가 필수.
몰락한 광전사 구간에서도 헤맸을 기존의 공략팀이 뤼게를 잘 다뤘을 리 없다.
강후가 더 무거워진 어깨의 책임감을 느끼며, 호흡을 고르고 매드 솔라키움을 꺼냈다.
‘이거 먹으면 이제 2개 남는 건가. 끝나면 무조건 귀국은 해야겠다. 솔라키움이 없으면 안 되지.’
강후가 주머니 속에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매드 솔라키움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몇 개비 안 남은 담배를 볼 때의 느낌이다.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빨리 채워 놔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뤼게. 인간형. 근육질.
근거리, 원거리 패턴 공존.
근거리에서는 잡기형 공격, 원거리로는 기공포 공격. 지랄 맞은 혼종 그 자체.
강후가 다시 녀석의 핵심 요소를 인지하고는 만약을 대비해 각신환도 한 알 꺼냈다.
“일단 원거리 패턴을 끌어내 주시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뤼게만 보세요.”
“이쪽은 걱정 마십쇼.”
에토가 든든하게 거대 방어막을 만들어 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탱커 전문답게 공격을 받아 내는 것에는 확실히 특화되어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몸 전체를 강철처럼 강화하는 스킬도 있었는데, 강후도 저건 뚫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쿠웅! 쿠웅!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꽉 잡은 뤼게가 오른 손목에서 반동을 일으키며 기공포를 발사했다.
마력을 오른쪽 주먹에 응축시켜 발사하는 형태로, 그때마다 어깨가 뒤로 밀릴 만큼 강했다.
그사이.
빠르게 은신한 강후가 앞서 블루트 공작을 상대했을 때처럼, 크게 반원을 그리며 돌았다.
중간중간에 곁눈질로 에토를 봤다. 듬직하게 기공포 공격을 받아 내는 모습이 보였다.
에토의 몸이 기공포 공격을 받을 때마다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의 뒤에 있는 미유키와 안영호가 충격에 휘말린다거나, 영향이 가지는 않았다.
‘저쪽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에토가 안정성이 좋아. 내 쪽에만 집중해도 되겠다.’
팀플레이의 핵심은 누군가를 버스 태우는 것이 아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호흡하면서 떨어져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에토와 미유키, 안영호의 조합은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잡히는 건 조심해야겠고.’
뤼게의 몸은 예전에 오쇼 용병단을 상대할 때 마주쳤던 전종두보다도 더 두꺼웠다.
그때도 잡히면 접혀서 죽을 것 같았는데, 뤼게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스스슷. 스스슷.
강후가 무영까지 곁들여 기척을 숨긴 상태로, 은신을 유지하며 뤼게에게 접근했다.
에토가 기공포를 멋지게 막아낸 것에 약이 올랐는지, 그쪽을 부릅뜬 눈으로 보며 집중하는 모습.
슬쩍.
왜곡의 사선을 깔았다.
아직 뤼게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고, 무형의 선이 깔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머릿속에 몇 개의 동선을 그려 본다. 뤼게의 대응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 각을 보는 것이다.
쓸 만한 미래시가 몇 개 보인다.
뤼게가 원하는 대로 해 줄진 싸워봐야 알겠지만, 그림이야 만들면 그만이니까.
【타락귀 소환】
시작은 이 녀석이었다.
공격 능력은 없지만, 시야를 어지럽히며 귀찮게 하고, 기이한 소리로 어그로 끄는 데는 제격이다.
키야아악!
이내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타락귀가 뤼게를 향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신술로 분신을 만들어서는 뤼게에게 쓱 보냈다.
“…….”
타락귀가 앞에서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자, 뤼게의 눈가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가까이 다가온 분신을 무심하게 주먹으로 쳐 버렸다.
이내 분신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뤼게가 예상했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강후를 흘겨봤다.
뤼게의 주 시선은 계속 정면에 있었다. 인원도 많은 데다가, 에토가 자꾸 약을 올리는 탓이다.
그래서 강후 쪽에서 분신 하나가 또 출발했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분신의 살상력은 본신에 비해서 훨씬 떨어지고, 움직임과 대응도 굼뜨기 마련이니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마력을 응축시킨 기공포를 에토에게 쏠 요량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그때.
파아아앗!
힘껏 몸을 띄운 강후의 분신이 뤼게와 거리를 좁히며, 들고 있던 단검으로 등을 찔렀다.
그런데.
“……?”
분신이 아니라 본체였다.
등가죽을 뚫고 들어간 것은 대참수의 기운이 맺힌 단검이었고.
꾸드드득!
동시에 강후가 빙결 속성 부여를 단검에 시전하자, 상처 부위의 속까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는 바람에 등을 포함한 주변의 감각이 마비됐다.
근육과 세포들이 얼어 버린 탓이었다.
“크아아악!”
퍼엉!
신음과 함께 주먹 방향이 비틀린 뤼게가 엉뚱한 곳으로 기공포를 발사했다.
그 과정에서 어깨에 반동이 실렸고, 연쇄 작용으로 등에서 통증이 한 번 더 밀려 올라왔다.
강후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뤼게의 속이 부글거렸다.
분신이라고 믿고 쿨하게 신경 쓰지 않았던 방금 전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오만함과 거만함의 대가를 엄청난 고통으로 치렀으니, 열이 뻗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
푹! 푹푹! 푹!
강후가 착실히 출혈 스탯을 쌓기 시작했다.
밑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분열과 위장을 통한 손쉬운 회복만 믿고, 늘 배 째라 식으로 싸워 왔을 녀석에게.
집요하게 머리싸움을 하는 암살자가 얼마나 극한의 피로감을 유발하는지 느끼게 해 줄 참이었다.
그리고 뤼게가 몸을 돌려, 강후를 향해 기공포를 발사할 준비에 들어가는 순간.
【처세술】
강후가 기공포 스킬을 처세술로 카피했다. 그렇게 히든카드도 하나 더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