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군계일학 (3)
* * *
강후가 단지 암흑기 파밍이 가능하기에 좌측 루트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 브리핑에서도 좌측 루트를 선택했을 때, 이동 거리를 절반 이상 단축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망령형 몬스터가 많이 분포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르게 된 것인데…….
암흑기를 활용할 수 있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공략 불가능한 대상은 아니었다.
다만 암흑기에서의 이득이 없으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먹잇감이 나타난 것이다.
몬스터의 이름은 암흑 검사.
평범한 몬스터처럼 보이는 단순 네이밍이긴 하지만, 암흑기 성장에 도움을 줄 녀석임은 분명했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망령형 몬스터가 아닌 녀석들만 처리해 주세요. 나머진 제가 처리하죠.”
“괜찮겠어요?”
“미덥지 않으면 보고 판단해도 됩니다. 그럼, 갑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의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암살자가 빠르다는 것이야 만고불변의 진리지만, 강후의 움직임은 셋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미유키가 멍하니 강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옆에 있던 에토가 물었다.
“팀장, 무슨 생각 합니까?”
“그냥…… 저 헌터가 과연 적으로 상대하게 되면 내게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 봤어.”
가상의 스파링은 많은 헌터들이 해 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프로들이 바둑을 두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그 과정을 복기하면서 생각을 다듬듯이.
실력 있는 헌터들은 동료나 지인, 혹은 파트너의 움직임을 보고 가상의 전투를 그려 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론은?”
“레벨 차이가 있으니까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 될 것 같아.”
미유키의 솔직한 총평이 막 끝나는 찰나,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암흑 검사가 죽었다.
후방에서 뒤통수로 냅다 꽂아 버린 강후의 대참수 일격이 숨통을 끊은 것이다.
“저렇게 암흑기까지 다룰 수 있으면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고. 참…… 신기하네.”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도 이름 없는 헌터였다던데,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변한 걸까요?”
“모르지.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고, 운 좋게 특이한 능력을 얻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뭐, 소설처럼 미래에서 온 회귀자라던가, 아니면 자기 소설 속에 들어온 작가라던가?”
“큭큭. 요즘 소설 많이 보신다 싶었는데, 상상력이 풍부해지셨군요, 팀장.”
“그만큼 말이 안 된다는 얘기야. 솔직히 그렇게 이유를 붙여야 납득될 것 같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잠깐 사이에 암흑 검사가 다섯이나 더 죽었다.
암흑기가 있어야만 죽일 수 있는 존재들. 그래서 여기 셋은 손도 댈 수 없는 존재들!
하지만 강후는 벌써 여섯을 처리한 상태. 당연한 결과인지 강후는 별다른 감흥도 없어 보인다.
“부럽다……. 특수 스탯을 다룰 수 있으면 잡을 수 있는 몬스터 풀이 확 달라지는데.”
미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욕심 많은 그녀이기에 자신에게 없는 것을 넉넉히 갖고 있는 강후가 너무 부러웠다.
그만큼 암흑기나 신성력 스탯은 귀하고, 가치가 일반 스탯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망령형 몬스터를 여럿 상대하고도 쉬지 않는 것을 보면, 스탯도 꽤 넉넉한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회복 속도가 빠르거나. 어떤 경우라도 부럽고 또 부러울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리고.
크에에엑!
저 멀리서 또 한 명의 암흑 검사가 쓰러졌다.
이미 강후는 몸이 제대로 풀린 모양이다.
* * *
잠깐 사이, 암흑기 스탯 3을 올렸다. 시간을 오래 투자한 것도 아니고, 힘도 거의 안 들였다.
그저 대재앙 – 어둠 성좌의 두 번째 특전 덕분에 쉽게 암흑기를 제공할 몬스터를 찾은 것뿐이다.
게임으로 따지면 아이템을 드롭할 몬스터를 미리 알고 사냥하는 느낌이랄까?
기분이 좋았다.
암흑기 스탯은 449가 됐다.
게다가 현재 ‘밤’인 상태의 던전이다 보니, 스킬 ‘칠야’가 발동되면서 암흑기 회복 속도도 기존보다 2배로 늘었다.
시작부터 잘 풀리는 느낌이라서 몸이 한결 가벼웠다.
딱히 징크스랄 것은 없는 강후지만, 시작이 좋았던 던전 공략은 늘 마무리도 좋곤 했었다.
* * *
이후.
좌측 루트를 선택한 일행의 공략은 투 트랙으로 진행됐다.
강후는 계속 망령형 몬스터만 저격해서 잡았고, 나머지 셋은 그 외의 몬스터를 잡았다.
확실히 동선은 짧지만, 몬스터 밀집도는 높다 보니 경험치의 상승 폭이 컸다.
아마 특수 강화 던전이라는 특수성 때문도 있겠지만, 그 덕분에 레벨도 올랐다.
226. 미들 보스 몬스터를 마주하기 전에 벌써 레벨업을 한 차례 경험한 셈이다.
아마 일반 던전이었다면…….
지금쯤 경험치 절반, 그러니까 225.5로 비유할 수 있는 레벨이었고, 그것도 많이 올랐다고 생각했을 터.
강후가 확인 겸, 미들 보스 몬스터에 대해 미유키에게 물었다.
“쟤가 미보라고 그랬죠?”
미보. 미들 보스의 줄임말이다.
미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블루트 공작이죠. 독일어로 블루트가 피잖아요? 나름의 의미가 있는 이름이죠.”
“이름값을 하는 복장이긴 하네요.”
정면에 서 있는 블루트 공작은 중세 시대의 귀족을 연상케 하듯, 한껏 예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마법사 몬스터고, 주특기는 ‘블링크’라고 한다. 즉, 단거리 순간 이동에 능숙하다는 얘기.
다만 변수가 하나 있는데, 블링크 외에도 즐겨 쓰는 스킬 중 하나가 ‘흡혈’이었다.
그것 때문에 앞서 공략에 나섰던 리코우 길드 헌터 몇몇이 흡혈에 피가 빨려 죽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피를 빨리면서 블루트 공작에게 생기를 제공하고, 당사자는 쇼크로 죽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란다.
일단 한 번 물리면 송곳니 때문에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는 모양.
그때.
쿠구구구!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한 블루트 공작이 양손을 앞으로 펼치며, 곧바로 수인을 맺었다.
공격 전 동작이다.
그러자 마법진 위로 수많은 마법 구체가 생겨나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압!”
에토가 기합을 내지르며, 방패를 힘껏 들어 전방을 막았다.
평범한 막기가 아닌, 황금빛 섬광이 뿜어져 나오는, 매우 성스러운 느낌의 방어막이었다.
범위도 무척 넓었고, 견고함에서도 강후가 감탄할 만큼 내구성이 좋아 보였다.
콰가가가!
꽤 많은 수의 마법 구체가 한 번에 연속으로 부딪혔지만, 에토의 방어막이 멋지게 막아냈다.
안영호는 에토의 체력을 보조했다. 그의 방어 스킬은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사이, 다수의 화염창을 만든 미유키는 에토의 뒤에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마법을 전개했다.
단일 타깃 공략에 특화된 마법사 헌터답게, 거대한 화염룡을 보듯 마법이 쭉 날아갔다.
하지만.
파팟. 팟. 팟.
블링크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블루트 공작은 너무 쉽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미유키의 정성이 아쉬울 정도로 회피가 빨랐다. 오죽했으면 미유키가 아, 하고 탄식했을 정도.
하지만 바로 평정심을 찾은 미유키가 강후에게 당부하듯 말을 꺼냈다.
“일단 녀석이 움직임이 빠르니까 차근차근 각을 보…… 응?”
자연스럽게 강후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있어야 할 그가 없었다.
“영호야,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강후 님은 어디로 갔어?”
“제 뒤에 있…… 어? 뭐야?”
소리 없이 사라진 강후의 존재를 모두가 이제야 인지했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
강후는 이미 크게 돌고 있었다.
에토의 방어막 스킬이 이펙트가 화려하고, 마법 충돌에서 반응이 더 가속되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블루트 공작도 은신 상태에서 우회해서 들어오는 강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한 번만 붙으면 돼. 저런 놈들은 자기의 회피 스킬을 맹신하는 경향이 크니까.’
노림수가 있었다.
강후가 레벨 높은 적을 상대해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느끼는 이유는 뭘까?
여차하면 순간이동 능력을 써서 현장을 이탈할 수 있다는 심리적인 ‘보험’이 있기 때문이다.
강후는 블루트 공작 역시, 여유만만하게 전투에 임하는 것이 블링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링크에 카운터 펀치를 먹일 수 있으면, 빈틈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윽고 강후와 블루트 공작 사이의 거리가 반경 15m 안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훗.”
강후의 존재를 인지한 블루트 공작이 강후를 보며 씨익 웃었다. 가까이 접근해 봤자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는 그런 미소였다.
그가 가볍게 손을 모은다.
블링크 스킬을 쓰기 전의 사전 동작이다. 캐스팅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익?”
그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블링크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용이 안 된 것이 아니라, 발동 자체가 막혔다.
그사이, 이미 거리를 확 좁혀 버린 강후가 단검을 움켜쥔 채로 대참수를 꽂아 넣을 준비를 했다.
블루트 공작에게는 한 차례 더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 방어 스킬을 쓰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지.’
강후의 예상대로 블루트 공작은 다시 블링크를 썼다. 자신의 시전이 서툴렀다고 판단한 탓이다.
오판의 대가는 뭘까?
그만큼 잃어버린 시간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곧 죽음에 가까워질 고통을 의미한다.
푸욱!
“끄아아아!”
강후의 대참수가 블루트 공작의 왼쪽 가슴에 꽂혔다. 단검이 제대로 박혀서 강후도 놀랐을 정도.
물론 몬스터의 특성상, 이것이 즉사로 연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일격임은 분명했다.
강후가 이어서 단검을 뽑았다가 다시 꽂아 넣으려는 순간.
“카흐윽!”
블루트 공작이 흡혈을 시도하는 바람에 도약으로 쭉 뒤로 몸을 날리며 빠져나왔다.
한 방을 더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한 방을 ‘덜’ 먹는 것이니까.
“역시, 멍청하면 편해.”
강후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블루트 공작을 보며 웃었다.
물론 블루트 공작이 강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서 그렇지, 정말 멍청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주 스킬을 맹신했던 것이 문제다. 블링크는 어떤 이유로도 막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여기에 몰입되어 있던 것이, 강후의 성좌 특전인 공간 이동 스킬 억제에 와장창 깨져 버린 셈이다.
【다섯째, 반경 15m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이 사용하는 공간 이동 스킬을 99% 억제할 수 있습니다.
단, 공간과 공간을 잇는 통로를 열거나 제한된 공간을 왜곡하는 스킬은 억제되지 않습니다.】
강후가 뿌듯한 표정으로 특전을 다시 확인했다.
켄지에게는 반쪽짜리 카운터였었지만, 블루트 공작에게는 완전한 카운터.
그리고 단독으로 블링크 스킬을 자주 쓰는 ‘공간계 + 검사계’ 헌터인 채관형에게도 카운터다.
언젠가 채관형을 상대할 상황이 생긴다면, 특전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 * *
한편.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후에게 대참수 일격을 맞은 블루트 공작을 보는 순간.
그의 마법 공격에 대응하며 현장을 지켜보던 나머지 일행 셋은 경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약 올리듯 블링크 스킬로 손쉽게 공격을 회피했던 블루트 공작.
하지만 강후에게는 블링크 스킬을 쓰지 않았다. 아니, 못 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공간 이동을 억제하는 뭔가가 또 있단 말이야?”
결론이 다른 쪽으로 나온다.
과연 강후에게 암살자라는 타이틀 하나만 붙여 주는 것이 과연 맞기는 한 걸까?
드러내어 먼저 말하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