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군계일학 (2)
“잘 알지.”
“나, 의뢰 그 사람에게 받고 있어. 정문 제약 건도 그렇고, 이번 후쿠오카 건도 그렇고.”
“몰랐는데 이미 인연이었군?”
“그러게. 달리 생각하면 이예린 씨가 운영을 잘한 거지. 의뢰꾼끼리는 서로 모르는 게 맞잖아?”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예린이 언질을 해 주지 않았는가를 따질 문제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칭찬해 주는 것이 맞다. 아야네의 말대로 의뢰꾼끼리도 정보는 단절되어야 한다.
그래야 중간에 이예린 같은 ‘업자’를 끼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아니면 의미가 없다.
“나도 일단 국내 의뢰는 이예린에게 받고 있고. 해외 의뢰도 맡겨 놓긴 했어.”
“수완 좋은 사람은 맞는 거 같아. 일본 쪽에도 제법 연줄이 많은 사람이고.”
“그렇군.”
“계속 일본에 있을 거야?”
“아니. 볼 일이 좀 있어서 국내로 돌아가려고 해. 다시 올 수도 있지만, 확답은 못 하겠네.”
앞으로 국내, 국외를 오가는 루트를 자주 만들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강후의 인맥 기반은 국내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무작정 바깥 활동만 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균형을 잡아 주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그럼…… 앞으로 뭘 하려고?”
추상적인 질문이다. 그녀의 호기심은 이해하나, 질문의 폭이 너무 넓다.
그래서 강후도 비슷한 느낌으로 답을 돌려주었다. 그녀에게 자세하게 말해 줄 필요는 없기에.
“성장하고. 앞길 막는 놈은 치우고. 함께 갈 사람은 챙겨야지.”
“나는 어느 쪽이야?”
“우리 사이에 신뢰는 아직 얇잖아. 어디에도 없는 거지. 물론 지금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지만.”
아야네는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뭐랄까. 강후와 빨리 친해지고 싶은데 그럴 방법을 도저히 못 찾겠는, 그런 눈빛이었다.
친해진다는 것. 가까워진다는 것.
그것은 단어로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산전수전 다 겪은 헌터라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
어제의 동료가 오늘에는 뒤통수를 치기도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강후도 지금까지 누구를 100% 믿은 적은 없었다. 그건 마스터 K나 김신령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
대신 그들이 자신을 믿었을 때,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를 생각하고 그들의 믿음을 판단한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강후는 늘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해 왔다.
딱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정유리였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95% 정도는 믿는 편이다.
살짝 분위기가 차게 식는 느낌이 나자, 강후가 화제를 돌렸다.
즐거운 술자리 판을 깨려고 시간을 내서 나온 건 아니니까.
“당신은 뭘 하려고 해?”
“나는 국제 의뢰 위주로 활동할 거야. 여러 국적의 헌터들과 싸워보고 싶어. 고수들이 많잖아?”
“흥미로운 계획이네.”
“이예린에게 말해 둘 테니까, 괜찮으면 나중에 해외 의뢰는 나와 한번 해 보는 건 어때? 그러고도 별로면 갈라서면 되고.”
동행 의뢰.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혼자 하는 의뢰라면야 필요 없겠지만, 여럿이 필요하다면 해 볼 만할 터.
아야네의 실력이야 두 번이나 검증했으니, 따로 의심할 것도 없었다. 실력자인 것은 맞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이예! 좋아! 좋다구!”
도도하고 차가운 여성의 이미지를 연출해 놓고, 주먹을 불끈 쥐는 그녀의 모습은 환호 그 자체.
어떤 게 원래 모습인지는 지금 보여 준 모습으로 전부 이해가 됐다. 단순한 구석이 많은 여자다.
아야네가 다시 물었다.
“지난번에 그 말, 진짜야? 당신 정말 죽는 거야? 오래 못 살아?”
그때 농담을 던졌고, 별다른 말이 없어서 아야네도 농담으로 생각하고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심각하게 들렸었던 모양. 그녀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다.
강후가 웃었다.
농담도 진지해지면 농담이 아니게 된다. 굳이 그런 장난까지 치고 싶진 않았다.
“진짜 시한부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시한부처럼 살고 있지. 오래 살기 힘든 시대잖아?”
“그건…… 그렇지.”
강후도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직 자신의 성장은 갈 길이 멀다. 그리고 변수도 많다. 특히 열세 개의 별은 언제 생각해도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서 첫 번째 계획으로 타카시에게 접근하긴 했지만.
아직 그와 깊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정서적 유대감은 열세 개의 별 쪽에 좀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채관형은 싫어하더라도.
자신에게 호의적인 에밀리아나 유청화에게는 유대감이 있을 테니까.
이탈할 계기가 더 필요하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내일을 확실하게 약속할 수 없을 뿐이야. 그저 아무 일 없길 바랄 뿐이지.”
강후의 말에 아야네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말속에서 숨은 속마음을 느낀 것 같아서였다.
차갑게 보여도, 시니컬하게 굴어도, 결국은 가까운 사람을 걱정하고 챙겨 주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호구처럼 순애보를 찍는 것도, 그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을 철저하게 짓밟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점점 자리는 무르익어갔다.
평범한 일상 얘기도 오갔고, 훈련 방식이나 클래스에 대한 생각도 허심탄회하게 오갔다.
이야기는 아야네가 주로 리드하는 쪽이었지만, 강후도 대답은 잘해 주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꽤 많은 칵테일을 서로 비우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에 홍조를 띠기 시작할 무렵.
아야네가 운을 뗐다.
본능에 이끌린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오늘 밤에…… 같이 있을래?”
강후의 대답은 꽤 단순했다.
“본능에만 충실한 시간이면 좋아. 그게 아닌 다른 마음이 있다면 사양하지.”
성인의 밤. 그것은 하루를 뜨겁게 불태우는 불꽃이거나, 오랜 관계의 시작점이 되는 군불이 된다.
강후는 전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감정으로 얽매이고 싶지 않은 속내가 느껴졌다.
“좋아.”
아야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후의 말대로 오늘을 함께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헌터의 하루 아니던가.
오늘을 뜨겁게 불태울 수 있다면, 내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내일 걱정할 일이니까.
그렇게…… 둘의 밤은 길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흘러갔다. 정말 내일이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 * *
다음 날 오후.
아침 겸 점심을 아야네와 먹고 리코우 타워로 돌아온 강후는 미리 몸을 풀고 있었다.
저녁 던전 공략 준비를 위해서였는데, 겸사겸사 쌍 단검의 어색함을 지워 보려는 것도 있었다.
원래는 늘 한 손이 시원하게 비는 느낌이었는데, 양쪽으로 쥐고 있으니 느낌이 달랐다.
마치 새 신발을 신은 느낌이랄까? 아주 불편한 건 아니지만, 적응에 시간이 걸릴 듯한 느낌.
가상의 적을 설정해 놓고, 왼손과 오른손의 단검을 번갈아 활용하며 타격하는 연습을 했다.
확실히 주 손이 오른손이다 보니, 왼손을 사용할 때는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의반 박자 정도가 계속 늦는 기분. 보통 불길한 예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왼손은 쓰지 말아야겠다.’
일단 대원칙을 세웠다. 핵심 스킬이나 중요한 공격은 오른손으로 하기로.
변수를 준답시고 왼손을 썼다가 오히려 그게 거꾸로 변수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탓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이제 아는 사람이 많아지니, 전화가 와도 누구에게 왔을지 미리 예측이 안 된다.
누굴까 싶었는데 전세혁이었다. 마침 국내에 가면 연락할 우선순위 중 한 명이 그였던 차다.
“네, 신강후입니다.”
- 전세혁입니다. 무탈하시죠? 뉴스 봤습니다. 차소혁? 차소희 오빠라는 놈이 일본을 갔더군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덕분에 저승에 있을 차소혁에게는 남매를 몰살시킨 빌런이 되어 버렸네요.”
- 누가 빌런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가장 필요했던 정의 구현인 거죠.
소식이 참 빠르긴 빠르다.
일단 헌터그램이나 헌터에 관련된 뉴스로 보도만 되면, 알려지는 것은 금방이다.
물론 그런 만큼 헌터 관련 뉴스가 범람하는 탓에 매일 살피지 않으면 모르는 과거 소식이 된다.
강후는 모르지만, 장시환이 강후의 존재를 뒤늦게 인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24시간이 모자라게 하루를 살다 보면, 의외로 헌터 세계의 이슈에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전세혁이 말을 이었다.
- 다름이 아니라 꽤 많은 인원을 모았습니다. 조만간 이클립스를 제대로 노릴 생각입니다.
“오.”
기다리던 소식이다.
순흑의 구도자와 관련된 성좌 시험을 겸하는 차원에서 이클립스 공격은 필요했던 이슈였다.
하지만 강후 혼자서 불꽃놀이를 하기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었는데, 전세혁이 스스로 판을 더 키운 모양이었다.
- 이미 몇 군데 지부는 털어먹었고요. 강동현 놈, 부글부글하고 있을 겁니다.
숨넘어가는 끅끅 소리가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린다. 이클립스에 대한 전세혁의 복수는 진심이다.
“곧 일본 일정 정리하고 귀국할 생각입니다. 그때, 한번 만나시죠.”
- 좋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확실히 우군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는 했다. 전세혁은 이클립스 담당 일진이 맞다.
강후 역시 시작부터 이클립스와는 악연으로 엮인 상황.
성좌 시험까지 동기부여가 되는 마당에 전세혁의 불꽃놀이에 칼춤을 보태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돌아가면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이클립스에 대한 공격을 범죄가 아닌 정의 구현과 단죄로 받아들이겠지.
영웅이 될 명분은 차고 넘친다.
* * *
저녁.
미유키, 에토, 안영호를 포함한 강후 일행은 바로 던전 공략에 나섰다.
특수 강화 던전의 위치는 보안상의 문제 때문인지, 강후에게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래서 리코우 타워에서 던전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별도의 안대를 착용하고 있어야 했다.
사전에 동의한 부분이라 강후는 별생각 없었다. 중요 던전을 보유한 길드로서 당연한 조치니까.
‘내 입장에선 이번 던전은 보스 몬스터를 못 잡으면 말짱 손해야. 반드시 끝을 봐야 해.’
강후가 결의를 다졌다.
보스 올득으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보스를 잡아야 플러스가 된다. 아니면 남 좋은 꼴만 한 셈.
물론 미들 보스 몬스터, 메인 보스 몬스터에게서 스킬을 강탈할 수 있는 이슈가 있기는 하다.
근데 결국 그것도 죽여야만 강탈이 가능한 만큼, 반드시 공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에토가 먼저 던전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강후와 미유키, 안영호 순으로 들어갔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변 환경을 확인했다.
특수 강화 던전은 총인원과 레벨에 맞춰 내부 구조가 변하기에 꼭 체크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오케이. 브리핑한 구조와 똑같아요. 변수 없이 진행 가능해요. 던전의 변경점은 없네요.”
미유키가 최종 확인을 해 줬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양 갈래 길에서 우측 루트로 미유키가 방향을 잡으려 하는 순간.
“잠깐만요. 이동 루트에 변화를 주는 건 어떻습니까? 좌측 루트가 훨씬 짧다고 했잖아요?”
“강후 님, 그쪽은…….”
“알아요. 망령 계열의 몬스터가 있는 거. 그런데 제가 그쪽을 돌파할 방법을 갖고 있거든요.”
강후의 눈빛이 빛났다.
이유인즉, 좌측 루트 쪽에서 본 몬스터 중 한 녀석의 머리 위에 3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암흑기 3을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몬스터가 보란 듯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그냥 지나치자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