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변화 (5)
김인호가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마침 강동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던 차였기에.
“혹시 강동현에 대한 생각도 여전히 같으신 겁니까?”
“그럼. 죽여야지. 어머니의 복수를 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편하게 살 수 있겠어.”
“좀 더 조사를 해 볼까요?”
“됐어. 그 새끼가 한 게 맞아. 배다른 엄마니까 죽인 거라고. 엄마도 모르는 아들이라는 것에 열등감이 있었겠지.”
“…….”
“동현이 얘기는 내가 먼저 꺼내는 것 아니면 하지 마. 집안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강태양이 속이 착잡해졌는지 요즘 통 피우지 않던 엽궐련을 입에 물었다.
김인호는 강태양의 옆모습에서 강동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각각 다른 아들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하지만 서로가 친형제가 아니라며 부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친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상대방이라고 말하고 있고.
집안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지만, 김인호는 강태양과 강동현의 껄끄러운 관계가 아쉬웠다.
이클립스 조직과 태양 조직을 합칠 수만 있다면,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 대전과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고, 전국적인 활동망도 갖고 있는 만큼.
시너지가 클 것이라는 것이 김인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형제의 앙금은 깊어 보였다.
* * *
점심 무렵.
강후는 리코우 길드로부터 곧 공략할 던전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 받기 위해 관계자를 만났다.
아야네와의 술 약속은 저녁이었기에 여유는 충분했다. 브리핑 외에 스킬 시연도 염두하고 왔다.
강후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늘 그랬듯이 안영호였고, 초면의 두 사람이 더 함께 자리했다.
후미야는 오지 않았다.
그의 레벨에 맞지 않는 던전 공략인 데다가, 길드 관할의 도시로 순회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토우시 길드와의 전면전이 사그라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 만큼, 내부 결속부터 다지는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특수 전략 3팀장, 시라이시 미유키라고 해요.”
“하야시 에토라고 합니다. 직책은 3팀장 가방맨이죠. 온갖 잡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초면인 두 사람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강후 역시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신강후입니다. 반갑습니다.”
“에토 씨의 뒷말은 걸러 들으시고요. 저희 팀 구성에서 메인 탱커를 맡아 주실 거예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리코우 길드의 특수 전략팀은 꽤 어려운 임무에만 투입되는 걸로 아는데요.”
“맞아요. 이번에 가게 될 던전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죠. 그래도 아주 어렵진 않아서, 3팀장인 제가 나왔어요. 아니었으면 1팀이나 2팀이 나왔을 겁니다.”
에토는 메인 탱커라는 상징성에는 살짝 맞지 않는 호리호리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다만 아주 큰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탱커로서 기능하는 데 핵심인 아이템으로 보였다.
미유키는 가만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 전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일까?’
아니나 다를까.
브리핑을 위해 회의실로 이동하면서 클래스에 대해 얘기를 들은 결과, 강후의 예상이 맞았다.
미유키는 단일 타깃 극딜에 특화된 화염 마법사였고, 에토는 방어에 특화된 검사였다. 안영호는 힐러의 자격으로 참여했다.
레벨은 강후를 포함, 전부 400 이하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저희가 가게 될 곳은 특수 강화 던전이에요. 인원 제한은 없지만…….”
“특정 인원 혹은 레벨 이상의 조건이 발생하면 난이도와 내부 구조가 극단적으로 변하는 던전.”
미유키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강후가 알고 있던 정보들을 말했다. 원작에 있는 설정들이다.
한국에는 특수 강화 던전이 북한에만 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전국적으로 꽤 많았다.
중국 같은 경우는 아예 특수 강화 던전만 모여 있는 도시도 있었다. 마치 의도한 것처럼 말이다.
미유키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신강후 님에게 요청하는 부분은 아시다시피 출혈 유지예요. 확실히 쉽진 않아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 강화 던전이라는 네이밍이 붙는 순간부터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관서권 1위인 리코우 길드에서 외부인인 강후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할 정도라면…….
이미 내부에서 지지고 볶을 수 있는 암살자, 광전사 전력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는 얘기겠지.
“다만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저희 훈련장에서 3D 모델링으로 재구현한 몬스터를 상대해 보실 수 있어요.”
“그건 좋군요.”
관서권 1위 길드의 힘인가 싶었다. 물론 패권 길드라고 해서 무조건 시설이 좋은 건 아니다.
인적, 양적 팽창에만 신경 쓰고 질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는 케이스도 꽤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리코우 길드와 대척점에 있는 토우시 길드다.
머릿수 위주로 키우는 케이스라 길드 훈련 시설이나 안전시설 보강에 매우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내부 브리핑을 진행한 다음에 훈련장으로 이동할 예정인데요. 그 전에 보상 얘기부터 하실까요?”
“껄끄러운 얘기를 미리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항상 보상 얘기가 문제다.
여기서 힘겨루기나 줄다리기가 길어지면, 보상 문제 협의로 며칠이 가기도 한다.
그래서 타결되면 다행이고, 결렬되는 케이스도 상당히 많다. 그만큼 욕심이 나는 요소니까.
“보스 제외 다 가지실래요? 아니면 보스를 다 가지실래요?”
미유키가 간단한 선택지를 들고나왔다.
이런 그림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길드 공식 요청이다 보니 세밀할 줄 알았는데.
듣고 판단하는 입장에서는 직관적인 내용이라 이해가 빨랐다.
리코우 길드 시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기대 이득의 총량은 같을 터다.
보통 전리품의 가치 평가가 그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통계치의 평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강후에게 있어서는 무조건 보스를 다 가지는 게 맞았다.
드롭 아이템이 잘 뜰 가능성도 있고, 지금은 등급 높은 아이템에 대한 욕심이 훨씬 더 많아서다.
강후가 짤막히 답했다.
“보스 올득으로 하겠습니다.”
협상은 그렇게 금방 종료됐다.
* * *
이후.
2시간 30분 동안의 심층 브리핑 시간을 거친 다음, 리코우 길드 전용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딱히 위험 요소가 없음에도 안전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는데, 강후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주 낮은 가능성이기는 해도 켄지, 유우지가 등장할 것에 대한 염려인 듯하기도 했다.
오사카 시 외곽에 있는 특설 훈련장.
말로만 외곽이지 훈련장 내외부 경비를 보면 요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보안 유지가 훌륭했다.
오히려 리코우 타워가 허술해 보일 정도.
“여기는 유우지도 재미 삼아 놀러 왔다가 격퇴당한 곳입니다. 워낙 보안 장비들이 좋거든요.”
안영호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될 정도였다. 강후도 보안성이 부러울 정도였으니까. 정문 제1 연구소보다도 좋다.
하지만 곧바로 안영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라, 형님 경호에도 항상 만전을 기했어야 했는데…….”
“괜찮다고 했잖아. 다 예상하고 있던 그림이었어. 오히려 나 혼자 잘해 먹었으니 괜찮아.”
“그래도요.”
“괜히 너희 길드까지 끼고 했으면, 아이템 판매도 손해 봤겠지. 마음 쓸 것 없어. 난 만족해.”
“알겠습니다, 형님.”
미유키와 에토는 강후와 안영호의 대화를 뿌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서로 배려해 주는 마음이 보여서일 것이다.
강후가 말은 무심한 듯이 하기는 해도, 안영호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영호를 아끼는 동생이자, 인재로서 높게 보는 미유키의 눈에도 그런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녀가 말을 보탰다.
“전투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고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전투를 하셨어요?”
“저격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건 변수라고 할 수도 없죠! 저격 지원으로 한 명 줄이고 시작했어도 결국 일 대 삼이었잖아요?”
이번에 차소혁의 죽음에 관련된 소식을 들은 헌터라면 모두 미유키 같은 생각을 했다.
암살자는 일대일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선입견이 아니라 클래스 특성이 그렇게 짜여 있다. 마법사가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강후가 한 명도 아닌 여럿, 그것도 검사-흑마법사-암살자 구성의 적을 제압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얘기다.
탱, 딜, 후방 공격, 어느 것 하나도 거를 타선이 없는 적의 구성이니까. 껄끄러움 그 자체다.
그런데 약간의 부상만 입은 수준에서 전투를 마무리했으니 놀랄 수밖에.
심지어 죽은 궁수까지 포함, 넷은 강후보다 전부 레벨도 높았다. 최소 100 이상이었다.
“방심하면 죽어야죠. 그리고 죽기 싫으면 끝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게 맞고.”
강후가 덤덤히 말했다.
정작 본인이 덤덤하게 말하니, 말하는 입장에선 그런 강후가 더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안영호가 방점을 찍었다.
“우리 형님은 뭘 상상해도 그 이상입니다! 벌써 일본의 다른 길드에서도 관심이 엄청 높아요!”
분명 여긴 일본인데.
왠지 옆에 박동재가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 * *
훈련장에 도착한 강후는 재구현된 던전 몬스터를 상대로 한 가상 훈련에 들어갔다.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설이 훨씬 더 좋았다.
일단 3D로 만들어진 가상 몬스터의 움직임이 실제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빨랐다.
보통 조악한 훈련 시설의 경우에는 훈련하는 입장에서 체감하는 움직임이 어긋날 때가 많았다.
분명 빠르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이거나.
가상의 몬스터를 찌르거나 베었음에도 판정이 민감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목숨이 오갈 수도 있는 던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미리 훈련으로 익혀 둔 감을 바탕으로 미지의 던전에서 신속하게 적응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출혈 딜러의 역할이다.
결국 몬스터에게 ‘출혈’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근접할 수밖에 없어서다.
특수 강화 던전은 수준 높은 던전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다가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 * *
이후.
안영호, 미유키, 에토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참관할 수 없는 비밀 훈련이 이어졌다.
훈련장 내부의 CCTV 및 녹화, 녹음 장비도 모두 껐고 스마트폰 촬영도 마찬가지.
셋은 숨을 죽이고 강후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후미야의 개인적인 부탁이 있기도 했고.
강후는 소리 없이 움직이며, 활성화된 다수의 타깃을 계속 타격하며 가상의 출혈을 일으켰다.
세 사람 모두 놀란 것은 강후가 그림자 걸음 스킬을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각각의 그림자로 순식간에 위치를 전환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기 때문에!
강후는 아주 짧은 시간에도, 저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여섯 개의 타깃에 출혈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림자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그동안 일대일로 타깃을 공략하며, 순차적으로 출혈 효과를 만들어 왔던 수많은 출혈 딜러들이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안영호의 호언장담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세 사람은 서로 간의 할 말도 잊은 채, 강후의 훈련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흠잡을 곳이 없기에.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지켜보게만 되는, 완벽한 관전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