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변화 (1)
* * *
강후와 차소혁의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아야네는 총을 내려놓고 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화력을 보태 주지 말라는 강후의 신호도 있었던 데다가, 자신 역시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후쿠오카 해방구에서 보았던 다른 헌터들의 눈을 썩게 만드는 전투를 생각하면, 지금의 그림은 거의 명품 수준이었다.
특히 강후의 움직임이 대단했어서, 아야네가 몇 번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을 정도였다.
다만.
‘레벨 200 미만의 암살자가 300 이상의 검사를 상대로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한다라…….’
아야네는 강후가 즉시 은신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의 레벨이 200 미만임을 알아차렸다.
암살자의 레벨 200 기본 스킬인 ‘은신’은 즉각적인 은신을 가능하게 해서다.
하지만 강후의 은신은 늘 횡 이동을 해서 발동되거나, 아니면 기교의 장막 등에 숨는 식이었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고 봤다.
그 말은 즉, 횡 이동 스킬이 숙련도 최대를 찍었음을 뜻하고.
은신을 간접 보조해 주는 스킬이 있다는 뜻이니까.
차소혁의 움직임을 본 결과로 아야네가 판단하기에, 그의 레벨은 300이 훌쩍 넘을 듯했다.
레벨의 차이나 특수한 각성 스킬이 있는 것을 보면 진즉에 강후를 끝장냈어야 맞았다.
레벨이라는 숫자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실력과 스킬의 차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후는 그 차이를 스킬, 실력으로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검사 입장에서는 열이 머리끝까지 뻗칠 정도 아닌가? 보는 나도 화가 나는데…….”
아야네는 강후가 극한의 거리두기를 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정말 학을 뗄 정도였다.
차소혁이 어떻게든 강후에게 유효 공격을 날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 강화 버프까지 걸고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데 거리를 안 주다니.
야구로 치자면, 마치 투수가 홈 플레이트로 공을 안 던지고, 계속 견제만 하는 느낌이랄까?
승부를 안 해 주니 화가 올라올 수밖에 없을 터였다.
“똑똑한 검사면 자기도 같이 지공(遲攻)으로 가겠지만,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네.”
처음부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고 있는 강후와 달리.
아야네의 눈에 보이는 차소혁은 다혈질 그 자체였다. 지금도 눈이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강후의 전략에 완전히 휘말려 있는 셈이다.
그때.
깡!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강후에게 달라붙은 차소혁이 강후를 노린 일 검을 날렸다.
하지만 보호 결계에 바로 막혔고, 강후는 신속하게 그림자 걸음을 활용해서 다시 거리를 벌렸다.
“씨발! 씨이발! 씨발! 씨발!”
차소혁이 검으로 애꿎은 지면을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기어이 닿은 공격 한 번마저도 방어에 무위로 돌아가니 약이 제대로 오른 탓이었다.
그 와중에 체력 소모가 상당했기에, 순간 꼬여 버린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멈췄다.
문제는 바로 이때였다.
뒤로 물러선 듯했던 강후가 다른 그림자로 위치를 바꾸고는 곧바로 차소혁에게 쇄도했다.
숨 한 번, 아니 반의반 박자도 고를 틈을 주지 않는 역공이었다.
“이 새끼가……!”
차소혁도 눈 뜬 바보는 아니라서, 곧바로 검을 움켜쥐고는 전력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꽤 힘을 끌어올린, 어떻게든 강후를 밀어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 대응이었다.
팟.
하지만 강후는 너무 쉽게, 다시 그림자를 이용해 뒤로 빠져 버렸다. 애초에 싸울 의사도 없었다는 듯이.
“와…… 진짜 빡치겠는데?”
아야네가 감탄했다.
역시 강후가 증선락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일 때부터 알아봤던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진국이었다.
그것도 정말 대단한 암살자.
그녀가 레벨 400이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암살자 중에 강후가 단연 원톱이었다.
아니, 나머지 ‘찌끄레기’들과 비교 선상에 두는 것 자체가 실례처럼 느껴질 정도.
강하고, 실력이 차고 넘치지만, 냉정하게 마음을 다루며 절대 자만하지 않는 암살자.
아야네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마치 엄마가 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강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잘 큰 암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눈이 호강한다 싶을 정도로.
* * *
한편.
‘이래도 안 지치나? 미친놈.’
강후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차소혁이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려오게 만드는 작업은 확실히 성공했다.
차소혁에게 점점 더 빈틈이 보이고 있고, 인내심이 고갈된 차소혁은 더 날뛰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아졌고, 이는 스스로 체력을 더욱 갉아먹는 기폭제가 됐다.
매드 솔라키움의 남은 지속 시간은 10분 남짓.
극한의 회피전으로 전투에 임했던 탓에 약발이 끝나면 반쯤 기절할 느낌이었다.
차소혁도 지쳤지만, 강후도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드 솔라키움으로 잠시 미뤄뒀을 뿐이다.
왜곡의 사선. 그리고 흑월참.
이 두 스킬은 최대한 아끼고 있었다. 나중에 필살 연계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급할 것 없어. 5분을 아무 일 없이 지나가도, 1초 만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게 전투니까.’
감정을 평탄하게 했다.
지금 자신보다 더 조급한 것은 차소혁일 터. 그렇기에 더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내색할수록, 급해질수록, 서두를수록 필패다.
강후는 선명한 빈틈이 보일 때까지 진득하게 버틸 생각이었다.
* * *
이후로 6분이 더 흘렀다.
이슈가 두 번 있었다.
차소혁이 기어이 강후의 대참수 공격에 왼팔에 두 차례 상처를 입었다.
깊은 상처까진 아니지만.
100%의 완력도 아니었고, 검을 정상적으로 쥘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한편 강후는 왼발, 왼팔에 상처를 입었는데, 기동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까진 아니었다.
어차피 양손잡이기도 하고, 주로 쓰는 손이 오른손이라 전투에 영향은 없었다.
‘혈기왕성, 저 스킬 토 나오네. 뭔데 매드 솔라키움만큼 지속 시간이 가는 거지?’
차소혁의 자체 버프 스킬인 혈기왕성. 이 스킬은 강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스킬 때문에 차소혁이 지칠 듯하면서도 계속 악바리처럼 버티는 것이 가능한 상태였다.
차소혁과 전투를 벌이는 내내, 한 번도 여유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피하고, 치고, 빠지고.
이게 실력자들의 전투인가 싶었다.
지금보다 훨씬 상위로 가면, 일상이 될 전투겠지.
앞서 최진호-최진수 형제 같은 수준 떨어지는 녀석들을 상대했을 때와는 그림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더 흥분됐지만, 몸은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오히려 레벨 150 이상의 차이를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 상황이다.
‘흐트러지고 있어. 나보다 차소혁이 조금 더. 녀석은 더 공격적이지만, 덜 방어적이게 됐어. 남은 시간 3분…….’
이제 강후가 원하는 수준까지 차소혁의 상태가 쭉 내려왔다.
복싱에서 말미에 가면 가드가 형편없이 내려가는 것처럼. 지금의 차소혁이 딱 그랬다.
물론 강후 역시, 단검을 들어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썩 쉽지는 않았다.
“그만 처 도망 다니고, 붙어, 이 개새끼야!”
이윽고 차소혁이 분노에 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잔뜩 독기가 올라 있었다.
‘됐다.’
드디어 인내하며 기다리던 차소혁의 빈틈이 눈에 들어왔다.
강후가 환영술, 분신술, 그림자 걸음을 있는 힘껏 다 끌어다 쓰면서 차소혁의 시선을 끌었다.
그사이.
후방에 은밀히 준비해 뒀던 스킬을 깔았다. 바로 왜곡의 사선이었다.
육안으로는 절대 알아볼 수 없는, 죽음의 마나의 선이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다.
환영과 그림자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면, 아주 잠깐, 공간의 일렁임 정도는 볼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평정심을 잃은 차소혁은 환영과 그림자를 검풍으로 걷어 내며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 휘두르면 흩어질 거!”
환영과 그림자를 한 번에 싹 걷어 낸 차소혁이 그대로 강후에게 밀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스킬을 연달아 쓰면서 움직임이 멈췄던 터라, 강후도 거리를 벌릴 수 없었다.
쓸 수 있는 그림자도 차소혁이 날려 버렸다. 앞서 학습한 레퍼토리가 있기 때문이겠지.
깡! 깡!
두 번.
그의 대검과 강후의 단검이 교차했다. 단검의 면적이 좁다 보니, 압박감이 훨씬 더 크다.
‘다시.’
강후가 재차 그림자 걸음을 전개, 후방으로 그림자 하나를 보냈다.
나머지 넷은 차소혁에게 보내면서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차소혁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강후만 노렸다.
왜곡의 사선을 뒤에 깔아 둔 상태라 움직임이 제한된다.
강후가 전략적으로 몸을 내주기로 했다.
쇄액!
그것은 바로, 아슬아슬하게 몸 앞쪽을 내주는 결과를 ‘연출’하려는 것이었다.
반은 연출이었다.
하지만 가늠이 조금 늦었는지 살짝 몸이 앞에 쏠렸고, 생각보다는 좀 깊게 들어온 한 방이 됐다.
푸슛!
강후의 복부에서 피가 튀었다.
복막까지 상처를 입은 것은 당연히 아니고, 표피가 길게 베인 수준.
그래서, 오히려 더 그럴듯하게 상황이 연출됐다.
피를 본 차소혁의 눈빛이 변한 것이다.
“죽어, 이 새끼야!”
드디어 강후에게 한 방을 먹였다는 생각에 흥분한 차소혁이 몸을 훌쩍 날렸다.
이참에 힘을 제대로 실어, 강후를 아예 내리찍어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파앗!
마침 강후가 뒤로 뿌려 둔 그림자의 위치로 몸을 옮겼다. 앞서 해 왔던 대응이었고, 이질감은 없었다.
여기에서 차소혁은 멈췄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지만…….
타다다닷!
그는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앞으로 전력 질주했다. 마치 빨간 보자기를 향해 돌진하는 투우처럼.
그리고.
스르르륵…….
왜곡의 사선에 몸이 그대로 휘말렸다.
가슴에 꽁꽁 감겨 버린 선은 갑작스런 불쾌감을 선사했다.
“이, 이게 뭐야……?”
몸이 닿는 순간부터 왜곡의 사선이 아이보리 색의 빛을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인체와 접촉하면 마나와 반응하면서 색이 입혀지는 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강후가 바로 왜곡을 발동했다.
“크아아아악! 으아악!”
그러자 가슴에 감긴 선 전체가 날카로운 톱의 역할을 하면서 살에서 피가 튀었고, 근육이 찢겼다.
왜곡이 계속 일어나는 탓에 마치 살점이 공간의 비틀림에 썰리는 형태가 된 것이다.
“도, 도대체!”
당황한 차소혁이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선을 떼어 내려 애썼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 채로 몸이 반 토막 날 것 같은 두려움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선을 움켜쥔 손에서 피가 튀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떼어 내는 게 우선이니까.
그때.
【흑월참】
강후는 이미 다음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대참수나 전광비도를 썼다가 상황이 꼬이면 더 복잡해질 테니까.
확실한 한 방이 어울릴 듯했다. 녀석, 그리고 그 여동생과의 악연을 끊기 위해서라도.
“후우.”
숨을 고르고.
암흑기를 담아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실어 흑월참의 기운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죽여 버린다!”
기어이 피투성이가 된 양손으로 선을 떼어 낸 차소혁이 분노에 찬 일갈과 함께 달려들었다.
시잉!
동시에 흑월참이 강후의 검 끝을 떠났다.
검은 달의 저주를 머금은, 죽음을 부르는 검의 노래.
일격필살의 힘은 정확히 차소혁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조준했다.
그다음.
솨아아악……!
차소혁은 느낄 수 있었다.
검으로는 막을 수 없는 파괴적인 기운이 자신의 검을 반 토막 내고, 가슴까지 절단해 버리는 것을.
강후를 오롯이 노려보고 있어야 할 시선이 제멋대로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그랬다.
자신의 몸이 원래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허공을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