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추격자 (3)
* * *
“교선아. 이거…… 제대로 검증된 정보야?”
“예. 교차 검증까지 된 겁니다. 사진과 현장 영상도 확보됐고요. 복사본 아니고, 별도 영상 장치가 사용되지 않은 것도 맞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각, 이예린은 아끼는 동생이자 심복이기도 한 황교선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중요한 조사를 할 때면 늘 황교선을 부르곤 했는데, 이번 정보도 그의 수완이 필요했던 조사였다.
바로 정화 길드에 대한 조사.
그간 심증으로 찜찜했던 부분을 짚어 보기 위해 조사를 했었는데, 상상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황교선이 말을 이었다.
“우선 정화 길드가 까쉬마르 길드로 인신매매를 진행한 현장 사진입니다. 김대만이 보이시죠?”
“정화 길드 서열 4위.”
“맞습니다. 러시아 쪽으로는 김대만이 정보통, 연락통인 것 같습니다. 거의 전담하더군요.”
“…….”
“여기 수갑 차고 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사람이죠. 정확히는 헌터고요.”
“그러네.”
“일탈이라고 하기가 그런 게, 혼자 온 것도 아닙니다. 정화 길드 헌터들이 제법 있습니다. 관련 사진 정보입니다.”
“…….”
더더욱 심연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되는 증거 자료를 볼 때마다 이예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화 길드는 이예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긍정과 정의의 아이콘이었다.
헌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인재를 대우해 주고 전문적으로 육성해 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국내 헌터들이 지망하는 1순위 길드는 정화 길드였다.
지금은 정화 길드가 공식 영입을 진행하지 않기에, 가입 방법은 위성 길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해어화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가, 정화 길드로 ‘승격’된 한서연이었다.
이런 식으로 위성 길드 출신의 헌터를 데려오다 보니, 위성 길드도 지원자들이 폭주했다.
덕분에 각지에 뿌리내린 정화 길드의 위성 길드들은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철저하게 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던 정화 길드. 하지만 민낯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이건 내부 문건입니다. 저희 용병단의 의뢰꾼이었다가 단장의 소개로 들어간 헌터들의 최종 활동 기록입니다.”
“윤재나 명지 같은 아이들?”
“예. 김윤재 님과 이명지 님에 대한 최종 활동 기록 자료도 있습니다. 보시죠.”
“어디서 입수했어?”
“정화 길드 내부에서 가지고 나온 겁니다. 집행비가 좀 들긴 했습니다만, 뒤끝은 안 남겼습니다.”
“흠…….”
이예린이 침음성을 내면서 힘껏 서류 종이들을 넘겼다. 도대체 또 무슨 내용이 자신을 놀라게 할까?
그녀가 내용을 보는 동안, 황교선이 설명을 보탰다.
“김윤재 님은 던전에서 죽은 게 아니라 밖에서 죽었습니다. 사망했다고 저희가 알게 된 시점과 던전에 들어간 시점에 차이가 너무 납니다.”
“애초에 던전에 들어가 있었을 수도 없는 시간이네. 그런데 던전에서 죽었다고 했다는 거지?”
“예. 오히려 정화 제8 빌딩 출입 기록이 있습니다. 던전에 있었다고 말한 그 시점에요.”
“도대체 왜 죽인 거지?”
“그럴 만한 이유가 내부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교선이 구해 온 자료는 온통 정화 길드의 ‘거짓’을 낱낱이 드러내는 자료들이었다.
뒤가 구리지 않고서야 거짓으로 덮어놓을 이유가 없는 진실들.
심증에 물증이 더해지자 이예린의 표정도 확신으로 바뀌었다. 정화 길드의 본 모습은 달랐다고.
그때.
다른 수행원이 들어왔다.
앞서 미팅이 잡혀 있었기에 손님의 도착을 알리는 수행원의 전달이었다.
“미팅 일정을 잡으셨던 공유석, 고주희 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정화 길드에서 사람이 왔다.
청안 용병단과 거래를 진행했던 몇몇 의뢰꾼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얻고 싶다던 그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좋은 헌터를, 좋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추천해 주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지켜야 한다.
특히 그들은 유독 한 사람을 짚어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예린의 주 고객 중 한 명인 강후였다.
* * *
저녁.
강후가 탁 트인 창문을 통해 오사카 시내를 내려다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 알코올 쪽은 별 관심이 없어서 그간 손을 잘 대지 않았었다. 커피를 더 선호하기도 했고.
하지만 박동재와 던전을 다녀올 때마다 녀석의 루틴에 장단을 맞춰 주느라 맥주를 마셨더니.
이제는 입이 심심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맥주를 찾고 있었다. 딱히 안주가 없어도 맛이 괜찮았다.
“음.”
강후는 방금까지 이예린과 나눴던 통화 내용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먼저 정화 길드에서 강후에 대해 알아보고자 공유석과 고주희를 보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일전에 강후가 심판의 지옥을 가기 위한 대면 심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었다.
그들이 외부 인재 영입에 관여하고 있기에 직접 나서는 그림은 당연했다.
물론 독단적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고, 이 부분은 무조건 장시환의 지시를 받았을 터다.
이예린은 그들에게 강후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나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는 허술한 구석이 많고.
의뢰 성공을 위해서 다른 용병을 해치기도 했다는 등의 사실과는 정반대의 정보를 줬다는 것이다.
이예린은 강후에게 정화 길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며, 관련된 자료를 보내 주겠다고도 했다.
아울러 정화 길드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처음부터 예상한 그림이지.’
잔뜩 격앙되고 떨렸던 이예린의 목소리와 다르게 강후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정화 길드는 원래 그랬다.
세상 사람들이 포장되고 왜곡된 앞면만을 보고 있기에 문제가 생기고 있을 뿐이다.
군벌 심연처럼 정화 길드의 민낯을 본 사람들에게 이런 소식은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이예린은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잘 됐어. 이예린이 드디어 원작의 결을 따라가는 것 같네. 반(反) 정화 라인으로.’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시기는 좀 빠르지만, 오히려 빨라서 좋다.
이예린은 똑똑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심연처럼 드러내 놓고 정화 길드에 적의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 협조하고 우호적인 척하면서 몰래 다른 길을 파겠지. 그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그림이면 정화 길드와 한 번 접점이 찍히는 건 피할 수 없어. 그러면 아예 정화 길드 쪽에 확 붙었다가 떨어지는 그림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생각이 확장된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삽질을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장시환은 바보가 아니다.
원작에서 조형된 장시환의 모습은 포커 페이스에 능하고, 전략적인 접근에 특화된 인물이었다.
강후와 특별했던 만남이 몇 차례 있기에 나름 기억 속에 각인된 이미지도 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정화 길드를 속이겠답시고 지나친 기행을 일삼거나,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준다면?
그게 오히려 더 관심과 주목을 끌게 만들 것이다.
신강후의 시선에서 보는 장시환은 멍청한 일회성 빌런이 아니다.
이 세계를 거대한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똑똑한 빌런이다.
그를 속이려면,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주인공의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뇌 없는 소설 속 빌런이 아니라는 얘기다.
* * *
자정을 앞둔 시간.
아야네는 울릴 것 같지 않던 헌터 그램의 보안 계정으로 온 연락을 확인했다.
최근에 이 계정을 알려 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기에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후였다.
강후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아야네는 ‘잘생긴 암살자’라는 단어로 기억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내용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 질 나쁜 헌터들을 사냥해 볼 생각 있어? 놈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거든.
살인에 취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 구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본의 논리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다.
돈을 주면서 정의를 구현하라면 하는 거고,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하면 죽이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후쿠오카 해방구에서 던전 입구에 진을 치고, 침입자들을 죽이던 일이었다.
애초에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사라진 곳에서 도덕적 관념은 무의미했다.
단, 이런 경계와 무관하게 아야네는 강후의 연락에 벌써 마음이 두근거렸다.
처음 정문 제1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을 때.
부끄러움에 만남을 거절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될 만큼,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외모에 반하기 전에 실력에 반했던 것도 분명했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실력 좋은 암살자였다.
그런 강후에게서 온 연락은 근사한 데이트 신청도 혹은 부드럽고도 달콤한 호감 표현도 아닌.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헌터 사냥’에 대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하야부사 길드와의 단기 계약도 끝나고, 일감도 없어서 쉬던 차다.
원래 떠돌이의 삶이라는 게 오늘 여기 있어도, 내일 저기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던가.
활동 무대를 바꾸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 어디로 가면 돼? 그리고 내가 약속받을 수 있는 전리품은? 타깃은 누구지?
강후와의 만남에 마음이 확 쏠린 아야네가 궁금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그날 이후.
강후는 차소혁과의 충돌을 대비해, 나름의 빌드업을 착실히 쌓기 시작했다.
당장 삿포로의 그늘 던전 공략이 가능한 것도 아닌 데다가.
후미야와 약속한 던전 공략 역시, 그늘 던전에 다녀온 이후이므로 현재 일정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외부 일정이 있을 때가 아니면 리코우 타워에 틀어박혀 살던 죽돌이 생활을 청산했다.
자신의 뒤를 노리려는 놈들에게 기회를 주려면, 바깥 활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시내, 시외 드라이브를 즐겼다.
나름 안전 지역만 골라서 다니는 것처럼 조심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고.
별도의 측정 장비를 활용해서 숨겨진 던전이나 미스테리 던전을 찾으려는 듯한 움직임도 보였다.
큰 틀에서 보면, 적당히 바깥바람을 쐬면서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후는 자신의 뒤에 네 명이 붙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확인은 딱 한 번만 했다.
두 번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괜히 놈들의 주의를 끌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꼴이 되니까.
그렇게 사흘을 보냈다.
차소혁이 앞뒤 안 재고 들이박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아마 함께 온 동료, 혹은 사전에 조언을 해 준 김인호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가장 최적의 사냥 타이밍을 노리는 맹수처럼, 자신을 사냥하기에 좋은 때를 보는 거겠지.
적당히 오사카 근교의 지역에서 차를 세운 강후가 안영호 – 실제로는 아야네 – 와 통화를 하면서 어디론가 이동했다.
“어, 영호야. 여기서 장치의 파형 반응이 세게 오는 것을 보니까 뭔가 있는 것 같다.”
“길드 던전 데이터에는 따로 잡히는 게 없는 위치라고?”
“일단 내가 좀 더 살펴보지. 사람은 됐어. 어차피 잠깐 바람 쐴 겸 나와 있던 거니까.”
강후는 대답 없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1인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좀 더 외진 데로 이동했다.
피차 뒤에 붙은 녀석들을 꾀어내서 끝장을 보려면, 무대는 넓을수록 좋다. 또한 목격자가 적을수록 좋기도 하고.
‘넷.’
적은 총 네 명이다.
차소혁. 여기에 토우시 길드에서 지원을 해 준 것으로 보이는 헌터 셋이 더 있다.
이쪽은 둘.
한 명은 강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딘가에 조용히 모습을 숨긴 강후의 ‘히든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