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환희, 증오 (4)
* * *
공포를 가장 효과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침묵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건, 언제든 침묵이 깨질 수 있는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안영호나 박동재가 강후를 만나면 유독 긴장하는 것도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아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가늠할 수 없으니, 지켜보는 입장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증오’가 그랬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강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지만, 작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마치 그런 소리를 낼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깔보는 듯한 시선도 느껴졌다.
강후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안영호는 시종일관 그런 증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증오의 까다로운 점은 날렵하게 움직이는 암살형의 몬스터라는 점과 별개로, 왜곡의 사선이라는 스킬을 쓴다는 것에 있었다.
10m 안으로 직선 연결되는 공간의 선을 만들고, 이를 어딘가에 설치해 놓는다.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마나 흐름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데.
여기를 지나면 공간의 선이 마치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처럼 지나간 사람의 몸에 감긴다.
그다음, 혈화를 발동하듯이 왜곡을 발동하면 접촉 부위에서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난다.
그때부터 살점이 파이기 시작하며, 선이 점점 안으로 파고들기에 방치하면 몸이 반으로 절단되어서 죽을 수도 있었다.
결국 선을 떼어내기 위해서 손으로 선을 잡아당겨야 하니, 그 과정에서 손에도 대미지가 간다.
스킬 자체의 파괴력만 놓고 보면, 공간 왜곡처럼 즉각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진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거나, 반대로 유인하기에는 최적화된 ‘장애물’이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마나의 흐름으로 위치를 탐지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공포를 선사하는 녀석이기도 하다.
【이기적 탐닉 – 자연 치유】
한편 강후는 전투 시작과 동시에 안영호가 자신에게 걸어 준 마나 버프를 증폭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힘까지 더해지니, 마나의 회복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앞선 전투에서 안영호가 쓰지 않았던 것으로 봐선, 쿨타임이 상당히 긴 스킬임이 분명해 보였다.
자연 치유 스킬의 마나 회복력 2.5배와 이기적 탐닉의 300%가 합쳐지자, 시너지는 7.5배가 됐다. 그야말로 미친 수치.
강후는 증오를 상대로는 철저하게 선수비 후역습의 패턴으로 가고 있었다.
녀석이 워낙 호전적이기도 한데다가, 공격 하나하나가 상당히 파괴적이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암살형 몬스터의 특징이었다.
노림수를 갖고 크게 한 번 들어오기 때문에.
자칫 난타전 양상으로 잘못 갔다가 한 방 크게 당하면, 회생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시이잉! 프슷!
‘저게 진짜 까다로워.’
증오의 오른손은 자유자재로 살상용 무기 형태로 바뀌는 특징이 있었다.
까다로운 점은 ‘검날’의 경우에는 길이가 한계 없이 쭉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거리 계산을 잘못했다가 당할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나름의 대응 방식을 찾긴 했지만 말이다.
【신속 회피】
바로 신속 회피 스킬을 쓰면서 활성화되는 저항의 장막 효과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회피 기동 중에는 스킬과 공격에 대한 회피율이 올라가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 덕분에 증오의 오른손 공격은 강후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가는 정도에서 그쳤다.
한편 학습 능력이 좋은 증오를 상대로, 강후는 같은 레퍼토리의 공격을 반복하지 않았다.
【붕괴】
쿠구구구!
“……!”
이번에는 붕괴였다.
갑자기 발밑에 생겨난 구덩이에 휘말린 증오가 중심점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인지가 빨랐다면 땅이 가라앉기 전에 박차고 도약하면 되지만, 반응이 반 박자 늦었다.
【환각】
몸이 무너지면서 정신의 집중도 함께 흔들린 증오에게 곧바로 환각을 걸었다.
환각 스킬은 성공 유무와 무관하게 0.75초의 절대 환각 유발 시간을 갖는다.
환각이라는 요소가 아주 극적인 효과는 아니어서 시야를 살짝 왜곡하는 형태에 그치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붕괴에 휘말리면서 강후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는 이만큼 좋은 변수가 없었다.
후웅!
뒤늦게 발 디딜 곳을 찾아낸 증오가 몸을 훌쩍 하늘로 날렸다.
그런데.
“……?”
강후가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전후좌우를 둘러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강후의 체온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증오는 알지 못했다.
그 잠깐 사이에 기교의 장막을 깔고 접근한 강후가 자신이 안착할 지점에 미리 와있다는 것을.
【무영】
기척까지 거의 다 지운 상태였기에 작정하고 모습을 숨긴 강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증오는 답답했다.
왜곡의 사선 스킬로 강후를 노릴 함정을 잘 파 뒀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걸리지 않는 것이다.
마나 흐름에 예민한 강후에게는 공간의 선이 눈으로 보이진 않아도 몸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증오는 강후의 감각적인 부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설마 그게 가능할까 하고.
어쨌든 지면에 착지하는 대로, 왜곡의 사선을 다시 설치해서 강후를 위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전으로 끌고 가며 공간의 선이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면, 상당한 재미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때.
“……!”
증오는 자신이 착지하려는 위치에서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보이진 않아도 느껴지는 기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강후만큼이나 증오의 감각은 민감했다.
그러나 포물선의 최정점을 찍고 나서 떨어지고 있는 몸은 회피를 하기에 쉬운 요건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광비도】
강후가 바로 단검을 날렸다.
밀쳐내기 효과가 같이 담겨있는 위협적인 단검 투척이었다.
“칫!”
처음으로 증오가 소리를 냈다.
지금으로서는 방어할 방법이 전무했기에 양팔을 X자로 교차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몸의 어딘가를 찔리는 것보다야 팔 한쪽을 내주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는 장사니까.
불리한 상황에서도 나름의 값싼 교환을 떠올린 재치였다.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엔 ‘재치’였다.
다만.
푸욱!
퍼어엉!
단검이 증오의 팔에 꽂힘과 동시에 밀쳐내기 효과가 발동되며, 몸이 거꾸로 밀렸다.
순간 증오의 몸이 C자로 확 꺾일 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강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아가는 증오를 향해 빠르게 따라붙었다.
실력 있는 암살자는 한 번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절대 놓치지 않는다.
한 번 이빨로 깨문 먹잇감은 절대 놓지 않는 맹수의 강한 턱처럼 말이다.
바로 그때.
휘리릭! 휘릭!
밀려 날아가던 증오는 몸 뒤쪽에 숨겨 두었던 두 자루의 단검을 강후에게 던졌다.
추진력이 반대로 걸려서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거리가 가깝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일격이었다.
【석화】
까앙! 따앙!
강후가 잠시 멈춰서, 신체 전면부를 돌로 만드는 것으로 방어를 대신했다.
밀쳐내기 같은 효과가 없는 증오의 단검 투척은 석화 앞에서는 무의미한 타격이었다.
X 됐다.
증오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불리한 와중에도 힘을 짜내 만든 반격이었지만, 너무 쉽게 무위로 돌아갔다.
한 번의 기회를 썼으면, 대가가 영수증에 청구되어 날아오는 법. 지금은 그 영수증이 강후였다.
【화염 속성 부여】
치이이익!
화염 속성 부여를 마친 강후의 단검이 붉게 달아올랐다.
쿠웅! 쿵! 쿵!
이내 지면에 추락한 증오가 제동을 걸지 못하고 스프링처럼 뒤로 튕겨지는 동안.
증오의 코앞까지 따라붙은 강후가 길게 잴 것 없이, 그대로 대참수를 꽂아 넣었다.
안영호가 커버해 줄 것이기에 체력 소모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안영호를 믿었다.
푸욱!
“……!”
대참수가 증오의 왼 팔뚝에 꽂혔다. 앞서 전광비도에 당했던 곳과 똑같은 부위였다.
그 와중에 증오 역시 오른팔을 다시 검날의 형태로 만들어, 매섭게 강후의 옆구리를 노렸다.
서로 한데 뒤엉킨 상황이었기에 증오로서도 해 볼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난타전이니까.
【호신 – 3단계】
까앙!
“……?”
증오의 계산은 바로 빗나갔다.
강후의 옆구리 쪽에 깊은 상처를 낼 요량으로 파고 들어갔던 단검이 호신 – 3단계에 막혔다.
0.5초의 무력화에 걸린 것이다.
푸욱! 푸욱!
“윽……!”
한 차례의 이자까지 더 추가된 강후의 반격에 증오가 왼 팔뚝을 두 번이나 찔렸다.
이번에는 팔꿈치 바깥쪽과 전완근 쪽을 찢긴 탓에 느껴지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증오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증오의 정신력이 고통을 뛰어넘는 투지를 만들어 냈고, 다시 한번 강후를 노렸다.
여전히 서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강후에게 해 볼 만하다면, 증오에게도 똑같이 해 볼 만한 거리였다.
후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검날로 변한 증오의 오른팔이 이번에는 복부를 노렸다.
그런데.
【호신 – 2단계】
또 막혔다.
이번에는 호신 2단계.
한 차례의 무력화 찬스가 증오의 이번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이다.
다단 히트 능력이 부족한 암살자의 특성을 고려한, 강후의 깔끔한 대응이었다.
그 순간, 증오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잘못되어도 뭔가 크게 잘못됐다.
두 번의 노림수가 강후가 꼭꼭 숨겨온 호신 스킬 2연타에 완전히 막혀 버렸다.
실패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걸레짝이 된 왼팔이었다.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
【뇌격진】
빠지지직!
전류의 폭풍이 바닥에 널브러진 증오를 쉴 새 없이 강타했다.
뇌격진의 전류는 시전자인 강후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구조가 됐다.
“큭큭……. 큭큭.”
증오가 정신 나간 웃음을 터뜨렸다. 체념의 기운이 좀 더 물씬 풍기는 그런 웃음이었다.
왼팔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오는 전류의 충격 속에서 몸은 제멋대로 요동쳤다.
“다 웃었냐?”
가슴까지 들썩이며 웃어대고 있는 증오의 목젖을 강후가 왼손으로 찍어 눌렀다.
멀쩡한 오른팔은 강후가 무릎으로 찍어누르고 있었기에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였다.
휘이이이!
뒤늦게 증오의 회복 패턴이 발동되려는 것이 보인다.
미들 보스 몬스터인 환희와 달리, 증오의 회복 패턴은 액티브였다. 자기가 발동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강후는 데스힐보다 훨씬 안전하게 녀석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노리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대참수】
푸욱!
단검을 증오의 이마 한가운데에 꽂아 넣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마에 난 상처 안으로 들어간 뇌격진의 전류는 증오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익혀 버렸다.
증오의 시간과 기억은 강후가 단검을 내리꽂던 그 순간에서 멈춰 버렸다. 다음은 없었다.
증오의 죽음과 함께 강후에게 강탈과 계승이 완료된 왜곡의 사선이 스킬창에서 깜박거렸다.
【왜곡의 사선】
【스킬 숙련도 : Lv. Max】
【시전자가 시작 지점과 도착 지점을 지정한 뒤, 이를 잇는 최대 10m의 공간의 선을 만듭니다.
공간의 선은 육안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얇은 실을 연결한 듯한 내구성과 탄성을 갖습니다.
‘왜곡’을 발동시키면 공간의 선의 표면을 따라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나며 피해를 입힙니다.
길이와 관계없이 시전에 마나 50을 소모하며, 유지할 수 있는 왜곡의 사선은 최대 1개입니다.】
‘드디어.’
암살자 특화라고 할 수 있는 스킬을 얻었다.
상대의 이동을 억제하면서 내가 원하는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
변수 창출을 즐기는 강후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이 될 스킬을 얻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