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환희, 증오 (3)
꼭 배신이라는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대척자가 될 인물을 키우는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군벌 심연의 이현석이나 청안 용병단의 이예린이 좋은 예다.
그들은 이미 반(反) 정화 세력을 형성하고 있거나, 혹은 곧 그렇게 될 예정이다.
원작에선 장시환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 대부분이 죽음으로 끝을 맞이했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있더라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다.
* * *
“다 온 것 같네.”
“그러게요. 보스 몬스터 혼자서 저러고 있으니까 엄청 무섭네요. 1인 2역이라서 더 무섭고요.”
“준비됐지?”
“예, 형님!”
얼마 후, 강후와 안영호는 던전의 미들 보스이자, 메인 보스 몬스터인 녀석을 보고 있었다.
미들 보스로서의 이름은 ‘환희’고, 메인 보스로서의 이름은 ‘증오’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얼굴이 달려 있는 구조로, 일반적으로 얼굴과 뒤통수를 갖는 구조와 달리.
환희, 증오는 양쪽이 다 얼굴이었다.
웃고 있는 앞쪽의 얼굴이 환희고, 노여움이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는 뒤쪽의 얼굴이 증오다.
시작의 포문은 환희가 연다.
증오와 콘셉트가 다른데, 전형적인 맷집형 캐릭터로 몸으로 때우는 스타일이었다.
“다시 언급하지만, 녀석의 특징은 회복 패턴이 있다는 거다. 출혈 유지와 회복 억제는 내가 할 테니까 그쪽은 신경 쓰지 말고.”
“네, 저는 회복 패턴 때 데스힐에 제 회복력까지 얹을 기회를 노려볼게요.”
“좋아. 잘 숙지했네.”
데스힐이란.
과다 출혈 상태에서 회복을 시도하다가 거꾸로 체력을 회복량만큼 깎이는 경우를 말한다.
출혈 최대치인 50 중첩인 상태여야만 데스힐이 발동이 되는데,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애초에 50 중첩까지 쌓기도 힘들뿐더러, 유지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출혈 강화 덕분에 출혈을 최소 4초에서 최대 6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상황에 따라 4-6초 안에 상처를 입히기만 하면 출혈을 다음 수치로 중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나 활용은 최대한 아껴. 환희에서는 패를 아끼는 게 좋으니까. 증오와 정보를 공유하잖아.”
“그래야죠. 기본 치유만 쓰려고 합니다, 형님.”
“그래, 가자.”
강후가 바로 환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불청객이 접근해 오자, 시종일관 웃고 있는 환희의 표정이 갑자기 더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분노와 증오의 표현을 할 줄 모르는 느낌이랄까. 더 과장된 미소로 감정을 대신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흡사 하회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나, 훨씬 기괴하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회복이 덜 됐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영호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전진해 온 덕분인지, 환희의 회복 상태가 예상보다 덜했다.
그간 리코우 길드에서 진행했던 공략에 따르면.
헌터들이 약탈 디버프에 ‘착실히’ 체력을 뺏겨서, 늘 최고 컨디션 상태인 환희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환희는 복부와 허벅지 일부에서 피가 여전히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페널티가 있는 상태에서 보스 몬스터가 시작을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던전의 콘셉트가 그러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 자체로 던전에 도전하는 헌터들의 능력을 측정하는 역할도 한다고 봤다.
강하고 실력 있는 헌터일수록, 환희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여기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워후! 워후!”
환희가 원투 펀치를 날리며, 강후를 위협해 왔다.
덩치가 상당한 인간형 몬스터라서 그런지, 주먹을 내뻗는 것만으로도 바람이 불었다.
사악! 사아악!
강후는 환희의 공격은 신경 쓰지 않고, 원래 계획한 대로 환희의 몸을 찔렀다.
펀치는 맞아 줄 가치도 없는 뻔한 루트의 공격이라, 발재간을 살짝 부리는 정도로 회피가 끝났다.
“빠르다.”
강후와 환희의 교전을 지켜보는 안영호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권투에 크게 심취한 듯한 환희가 강후를 노리고 연달아 펀치 공세를 날렸지만.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강후는 한 번도 피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환희는 강후의 단검이 지나갈 때마다 피가 튀며, 착실하게 출혈 중첩이 쌓여 갔다.
강력함이 담긴 일격보다는 여러 차례의 타격 즉, ‘다단 히트’로 출혈 중첩이 쌓이는 것을 노렸기 때문에.
강후의 움직임은 앞선 몬스터들을 상대했던 파괴적인 스타일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지속 시간도 길고. 그래서 더 여유 있게 공격을 이어 가시는 듯하네.”
보통의 출혈 딜러는 중첩의 지속 시간이 2초. 강후는 6초로 무려 3배 차이가 난다.
4초의 차이는 1초가 귀한 전장에서는 엄청난 차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투에 반영이 됐다.
강후는 환희가 공격적으로 치고 나올 때면, 상대해 주지 않고 뒤로 쭉 빠졌다.
출혈 강화로 연장된 시간 안에만 공격을 성공하면, 출혈은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혈 강화로 인한 효과는 보통 최소 2배, 최대 3배의 중간 지점인 5초 정도로 유발됐다.
중간 수치로 고려해도, 일반 출혈 딜러의 유지 시간에 비해 2.5배는 긴 셈이다.
순식간에 쌓인 50 중첩.
그때부터.
‘회피 후 역습’의 패턴으로 싸우던 스타일이 적극적인 대공세로 바뀌었다.
스킬을 과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의 적을 단순하게 좇는 환희의 공격을 계속 횡 이동으로 피하며, 후방에서 타격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건지는 몰라도 환희는 그렇게 자신의 체력을 쭉쭉 갉아먹었다.
한편으로는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있으니, 부담없이 전투에 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회복 패턴이 나오면, 이유를 불문하고 체력이 50% 이상 회복되기 때문이다.
회복 패턴이 지랄 맞기 때문에 실제로 이 던전은 리코우 길드에서 인기가 없었다.
최근 공략이 3개월 전일 정도로 거의 반쯤 버려져 있던 던전이기도 했다.
그때.
“우후우우!”
환희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회복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강제 패턴이고, 즉시 발동 패턴이기 때문에 지연하거나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형님이 밑바탕을 다 깔아 주셨으니까!’
안영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데스힐은 출혈 50 중첩에서만 발동되는 귀한 조건이다.
안영호도 지금까지 출혈 딜러를 대거 데리고 간 던전에서나 겨우 경험했던 이슈였다.
2인 공략에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강후가 제대로 판을 깔아 줬다.
“후아아악!”
환희가 자신에게 몰려드는 회복의 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양팔을 치켜든다.
강후가 그 와중에도 열심히 단검을 꽂아 넣지만, 어차피 회복될 거니까 무시하는 모습이다.
안영호는 실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구역에 오기 전에 강후가 했던 말 덕분이었다.
- 데스힐이 안 터져서 정상 회복되면, 어차피 체력이 찰 패턴이었으니까 실패해도 상관없어.
- 설령 데스힐이 터졌는데 엇박자로 힐이 들어가서 회복돼도, 피는 빠졌으니까 상관없는 거야.
안영호는 강후가 자신의 마인드 컨트롤을 쉽게 하도록 말해 준 것임을 잘 알았다.
과정이 꼬이면.
그만큼 강후가 다시 출혈 유지를 하고 대미지를 넣기 위해 고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한 잡념이 끼는 것을 막기 위해, 강후가 부담 없게 상황을 각색해 준 듯했다.
‘밥값 하자!’
안영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회복이 이뤄지고 있는 환희를 향해 대 회복을 시전했다.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회복 스킬이자, 힐러의 꽃이기도 했다.
다음 순간.
“워억!”
자체 회복에 들어간 환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두 눈을 까뒤집었다.
누가 봐도 쇼크 상태.
강후와 계획했던 대로 데스힐이 발동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샤아아아!
시기적절하게 환희에게 덧씌워진 대 회복의 기운이.
“크헉……!”
제대로 먹혀들면서 데스힐을 부채질했다. 대 회복의 기운 그대로가 대미지로 들어간 것이다.
“좋아!”
강후가 소리쳤다.
그 시점에, 강후는 데스힐과 대 회복의 이중 대미지 콜라보에 빠진 환희를 덮치고 있었다.
체력을 급격하게 잃으면서 쇼크와 탈진이 동시에 왔기에 환희의 상태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우…… 우왓! 와아!”
안영호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들며 만세를 불렀다.
그간 이론으로만 쌓았던 내용이 현실이 되는 것을 이렇게 쉽게 볼 줄이야!
안영호의 기쁨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후는 틈을 놓치지 않고 환희를 도륙하고 있었다.
이미 저항 불능 상태에 빠진 환희는 일방적으로 강후의 난도질에 쉴 새 없이 피를 흩뿌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전신에 골고루 단검을 꽂아 넣은 강후는 충분히 ‘양념’이 되었음을 확인하고는 혈화를 발동시켰다.
퍼퍼펑!
그것으로 끝이었다.
까다로운 회복의 패턴을 죽음의 노래로 바꾼 두 사람의 호흡은 그렇게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한편, 강후는 환희의 죽음과 함께 바로 강탈한 스킬을 확인하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친화 - 신성】
【스킬 숙련도 : Lv. Max】
【신성력 회복 또는 회복 스킬에 대한 효율이 33% 증가합니다.】
친화도를 높여, 특정 속성에 대한 반응성을 높이는 스킬이었다.
이것 덕분에 환희의 회복 패턴도 자체 치유량이 생각보다 늘 많았을 터.
물론 그것이 데스힐이 발동되어 버린 지금은 치명적인 특징이 됐지만 말이다.
‘패시브 스킬이니까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잘 됐어.’
힐러로부터 무한대로 회복, 치유 스킬을 지원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한 번을 회복해도 효율이 중요했는데, 시기적절하게 좋은 스킬이 나와 줬다.
‘이 정도면 나에 대한 스킬 학습도 거의 안 된 수준이고. 횡 이동에 가속 정도만 보여 준 건가?’
강후가 호흡을 고르며, 곧바로 등장할 보스 몬스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환희로서의 육신은 폭발로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었지만.
파앗!
이내 두 눈을 매섭게 뜬 증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이 흩어졌던 살점과 피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해진 몸과 함께 증오의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재조합이 끝난 증오의 몸은 앞서 거구였던 환희와 달리, 호리호리한 몸이 되어 있었다.
“으으.”
안영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변의 기온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한기가 살인적이었다.
포근했던 기온은 어느새 호흡하면 하얀 입김이 서릴 정도로 낮아졌다.
‘암흑기도 암흑기지만, 이 녀석 스킬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강후가 입맛을 다셨다.
진짜 사냥감은 증오다.
증오가 즐겨 사용하는 스킬 중에는 강후가 꼭 갖고 싶은 스킬이 있다.
바로 ‘왜곡의 사선.’
공간 왜곡과도 일부 연결된 스킬로, 상대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스킬이다.
즉, 지금은 도전자 포지션인 강후에게 가장 까다로운 적수가 나타난 것이다.
편하고 즐거웠던 맛보기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치열하게 싸워서 쟁취해야 할 시간만이 남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