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쏠리는 시선 (2)
* * *
레벨 194.
암흑기는 305에서 425.
솔라키움 재고는 8개에서 3개, 그리고 매드 솔라키움 재고는 9개에서 4개로.
지난 5일의 시간 동안 강후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솔라키움, 매드 솔라키움 재고를 최대한으로 많이 확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 솔라키움은 내가 자체 재배하니까 문제없어. 문제는 매드 솔라키움인데…….
“수급 쪽으로 문제가 있으신 겁니까?”
- 알다시피 매드 솔라키움은 재배가 안 되잖아. 최근에 재고 확보가 아예 안 됐어.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 있기는 한데, 그럼 북한 땅에 들어가야 해. 지금 형서도 바쁘고 보혜도 바빠서, 여의치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매드 솔라키움은 제가 귀국하는 대로 찾아뵙고, 직접 구하러 가 보죠.”
-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 더 필요한 건?
“일단은 없습니다. 생기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래. 몸조심하고.
그리고 막, 마스터 K와의 통화도 끝났다. 추가 구매 건으로 통화를 나눈 것이다.
솔라키움은 괜찮은데, 매드 솔라키움 재고가 아예 없는 모양이었다.
매드 솔라키움은 자연에서만 구할 수 있기에 확보가 어려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먼저 와서 가져갈 수도 있고, 몬스터의 손길에 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후우.”
강후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어느덧 레벨 200도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올리면 기본 스킬 하나도 추가할 수 있다.
앞선 네 개의 던전에는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없어 착실하게 암흑기만 올리고 왔다.
물론 그것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암흑기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
게다가 그간 잡히지 않았던 망령 계열의 몬스터를 잡은 것이라 암흑기의 증가폭이 컸다.
다시 리셋된 던전을 공략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암흑기의 증가폭이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강후는 다시 같은 던전을 갈 생각은 없었다. 리코우 길드가 허락해 줄지도 문제고.
“좀 허전하긴 하군.”
암흑기는 챙겼는데, 아이템이나 스킬 쪽으로 손맛을 못 보니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안영호와 함께 가게 될 던전이 기대됐다.
그 던전에는 보스 몬스터도 있고, 나름 기대할 수 있는 전리품도 있기 때문이다.
사라락. 사락.
강후는 품속에서 꺼낸, 각신환이 든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필요하면 먹으려고 가장 가까운 곳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직 손을 댄 적은 없다.
매드 솔라키움보다 훨씬 구하기 힘든 녀석이다 보니,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과감히 먹어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피곤하네…….”
눅눅한 몸뚱이를 포근한 소파가 자꾸 잡아끈다.
요 근래 솔라키움, 매드 솔라키움을 쉴 새 없이 먹다 보니, 피로감이 부쩍 올라왔다.
매드 솔라키움은 만능의 약재가 아니다. 미래를 끌어다가 현재에 쏟아붓는 개념이다.
설령 체력은 회복하더라도.
유무형으로 쌓인 피로와 대미지는 몸 전체에 고스란히 누적된다.
강후는 생각했다.
직접 확인할 순 없지만, 몸 전체를 뜯어보면 속이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치 몸과 정신이 약에 푹 절어있는 느낌이었다. 소금간이 잘 밴 김장용 배추 같달까…….
밤의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번져 보이고, 아침의 햇빛이 영 반갑지 않은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이러다가 피를 탐하는 존재가 되진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도 하게 된다.
촤륵!
커튼을 젖혔다.
새벽 2시.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오사카 시내는 활기가 넘친다. 서울만큼은 아니어도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딱히 감흥이 없는 풍경이었다.
활동 무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인연이 생긴 만큼 또 악연이 생겼고, 어둠을 잔뜩 머금은 도시는 여기에도 존재했다.
이 세계에 낙원은 없는 걸까?
한 달, 아니 단 일주일만이라도 손에 든 단검을 던지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없는 걸까?
던전이 있는 곳에는 헌터가 있고, 헌터가 있는 곳에는 늘 분쟁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갈등의 씨앗은 어디서든 잉태되고 있다.
“엔딩……. 엔딩…….”
반드시 바꾸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목적의 단어가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아직 열세 개의 별은 건재하다.
놈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지 않는 마왕의 악취를 영원히 맡아야 할 것이다.
긴 여정이다.
“…….”
어느덧 강후는 단검을 손에 꼭 쥔 채로 잠이 들었다.
꽤 오래된 습관이었다.
* * *
그날 아침.
마진호는 아침 비행기로 막 귀국한 그루 길드의 1, 2인자를 한꺼번에 맞이하고 있었다.
제주 공항에서 내린 두 사람은 출국 전과 다르게, 태닝이라도 한 듯 구릿빛 피부가 되어 있었다.
오유진, 오혜진.
그루 길드의 마스터, 부 마스터로 앞서 강후가 왔을 때는 스웨덴에 나가 있었다.
나름 검으로는 실력을 인정받은 헌터이자 자매이기에 국내외로 부르는 곳이 많았다.
제주 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온 마진호와 그루 길드원들이 반갑게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워낙 격 없이 지내는 사이라서 그런지 딱딱한 인사나 과한 의전이 오가진 않았다.
“왔냐?”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마스터에게 왔냐가 뭐예요?”
“잘 오셨습니까, 마스터?”
“헉, 그게 더 별로네. 그냥 원래대로 해요, 오빠.”
“고생 많았다, 유진아, 혜진아.”
마진호가 오유진와 오혜진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일반적인 길드와 다른 풍경이기는 했다.
정화 길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채관형이 먼저 나서서 하극상(?)의 대가를 치르게 했을 터.
그리고 장시환은 그러지 말라고 나서겠지만, 적극적으로 채관형을 말리진 않을 것이다.
착한 경찰, 나쁜 경찰의 역할이랄까. 위선과 폭주의 하모니가 정화 길드에는 있고, 여기는 없다.
길드의 아지트로 복귀하는 길.
오유진 자매는 길드원들을 돌려보내고, 마진호와 밀린 대화를 나눴다.
가장 먼저 화두가 된 것은 최근에 출혈 딜러 용병으로서 그루 길드에 왔다 간 강후 얘기였다.
파악이 살짝 더딘 동생 오혜진은 강후에 대한 서류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고.
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오유진과 마진호였다.
“보낸 자료는 전부 확인해 봤어요. 거기에 최근에 일본 쪽 소식도 업데이트 됐더라고요?”
“응. 남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런 코드가 있었지. 할머니와 손녀를 구한 영웅이라니.”
“연출이라고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멋지던데요? 물론 연출이 아니라 실제상황이었겠지만.”
오유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보에 따르면 리코우 길드 쪽에서 초청해서 일본을 간 모양이야. 스즈키 후미야를 만났다던데.”
“거기 원래 국외 헌터 영입에도 적극적인 곳이잖아요? 가서 이상할 건 없죠.”
“확실히 관심을 많이 받는 것 같아. 일전에 까쉬마르 길드의 니키타 보로닌도 왔다 갔었고.”
“직접 얼굴 한번 보자고 해도, 코빼기도 안 비치던 그 샌님이 왔다고 해서 놀랐지 뭐예요?”
“그러니까 말이야. 니키타가 직접 나섰다는 건, 까쉬마르 길드의 말을 전할 게 있었다는 건데.”
“단순히 출혈 딜러 하나인 것만으로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진 않아요. 너무 단편적이잖아요?”
“이유는 우리와 용병으로 호흡을 맞춰 보면서 어느 정도 증명은 됐지 싶다.”
마진호를 비롯한 그루 길드원들이 강후를 보는 시선은 호평 일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와 함께한 던전 공략에서 너무 많은 편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깐깐하게 사람 보기로 소문난 마진호의 눈에도 강후는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함이 있었다.
“혜진이와도 얘기해 봤는데. 길드 차원에서 영입을 추진해 보려고 해요.”
“통할까?”
“통하지 않을지는 일단 부대껴 봐야 아는 거죠. 우리 길드는 완벽한 중립이잖아요? 그게 큰 매력의 요소가 될 수도 있어요.”
“중립이 매력이 된다…….”
“정화 길드 똥구멍만 열심히 핥는 거 싫어하는 헌터들도 꽤 많거든요. 특히 신강후 씨처럼 고고하고 도도한 헌터가 더 그렇죠.”
“혜진아, 예를 들어 줘도 그렇지 똥구멍이 뭐냐……. 이쁜 얼굴에 경망스럽게.”
“그럼 뭐 다른 데 핥아요?”
“…….”
“어쨌든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이에요. 요즘 암살자 품귀예요. 실력 좋은 암살자는 지옥에서도 못 구해 온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스웨덴도 그래?”
“거긴 그냥 암살자 전멸이에요. 없어요. 생기면 레벨 1이어도 스카우트해서 데려가나 봐요.”
“지랄 났네.”
“그러니까요. 우리나라도 더 지랄 나기 전에 실력 있는 암살자는 침부터 발라 둬야 해요.”
* * *
그날 저녁.
마지막 암흑기 파밍을 위해, 던전을 갈 준비를 마친 강후가 안영호를 만났다.
안영호가 직접 참여하는 공략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많은 인력이 던전 주변에 배치됐다.
아무래도 후미야의 조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만큼, 토우시 길드의 표적이 될 수도 있어서인 듯했다.
강후가 포근한 날씨에도 삐거덕거리듯이 움직이는 안영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리 얼어 있어?”
“형님이랑 같이 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긴장돼서요. 좋긴 한데 너무 걱정돼요.”
“레벨은 너가 더 높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가 전투 능력이 아예 없다 보니, 형님에게 짐이 될 수도 있고…….”
“힐러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힐 셔틀 말고 또 있나요?”
“그 셔틀을 아무나 못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지. 생각보다 자존감이 낮네.”
“제가 좀 그래요…….”
진실밖에 말하지 못하는 안영호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 말은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다.
물론 대답을 한 강후의 생각도 진심이었다. 힐러가 괜히 던전 공략의 꽃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힐러의 힐이 밑바탕에 깔리면 좋은 점이 있지. 작은 부상은 힐러에게 맡기고 미친 듯이 싸울 수 있고, 언제든 체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도 생기거든.”
“기대가 큰가요?”
“크지. 특히 나처럼 초근접전을 하면서 피를 흘리는 것이 일상인 헌터에게는 말이야.”
강후가 이어질 내용을 생략하긴 했지만, 안영호에게 기대하는 점은 더 있었다.
그의 치유 능력이라면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30분 지난 이후의 후폭풍 관리에도 도움이 될 터.
그때의 반 탈진 상태를 최소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없애고 넘어갈 수도 있다.
“죄송해요, 형님. 제가 너무 후려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나랑 직접 뛰면서 느껴 봐. 네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아닌 것 같으면 얘기해 주지.”
“예, 형님.”
“자, 들어가자.”
강후가 바로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안영호가 곧장 뒤를 따랐고, 강후는 던전의 콘셉트에 맞게 미리 보낼 정찰대를 불렀다.
【타락귀 소환】
끼야아아악!
소환 스킬로 타락귀를 불러내기 무섭게,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이게 뭐예요? 귀신이에요? 이건 뭐지?”
안영호가 타락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놀라움의 시선은 이내 타락귀가 아닌 강후에게로 향했다. 설마 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형님, 이런 녀석을 소환하는 스킬도 있으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