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타락한 진실 (4)
* * *
쿠웅!
리권수가 쓰러졌다.
이성을 거세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받았던 두 번째 목숨. 하지만 그마저도 꺼졌다.
우웅! 위이이잉!
이내 리권수의 정수리를 가르고 나온 새끼 벌이 도망치기 위한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격진】
시원한 전기 샤워에 날개 한 번 제대로 파닥이지도 못하고, 리권수의 정수리 위에서 즉사했다.
아마 살아서 도망쳤다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았을 것이다. 던전은 넓고 죽을 헌터는 많으니까.
“황폐화를 요긴하게 썼군.”
강후가 쓰러진 리권수의 모습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아쉽게도, 죽은 존재로 취급되어서 그런지 성좌는 강탈되지 않았다.
가진 검술이나 스킬 자체는 몸의 주인이었던 헌터의 실력이 제법이었는지 꽤 괜찮았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장기전을 생각하기도 했던 강후였다. 빈틈이 잘 안 보여서다.
한데 보호 결계의 황폐화 효과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을 몰아붙이기 위한 다양한 스킬을 갖고 있던 리권수.
그런 그가 황폐화 효과로 마나를 수급할 수 없게 되자, 반쪽짜리 검사가 되어 버렸다.
마나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었던 검사의 원천을 차단해 버리니,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레벨은 191이 됐다.
개체 하나를 사냥하고 이 정도 경험치 소득이라면 출장비는 차고 넘치게 회수한 셈.
강후는 다른 헌터들이 혹시라도 나타나기 전에 바로 리권수의 목걸이에서 반지를 회수했다.
타락한 진실 반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검 아이템, 타락한 신념과 세트 아이템인 녀석이다.
【타락한 진실 – 반지】
【등급 : 2등급】
【근력 +100】
【체력 +100】
【민첩 +100】
【화염, 결빙, 뇌전, 물리 공격에 대한 절대 내성이 5% 증가합니다.】
“내성이 핵심이네.”
스탯과 기본 툴팁부터 살폈다.
스탯 자체도 우수하지만, 추가로 붙은 옵션이 마음에 들었다.
절대 내성은 대미지가 적용되기 전에 무조건 차감이 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화염 내성이 10%인데, 화염 관련 공격을 100을 받았을 경우.
일단 90으로 깎은 상태에서 그다음의 방어 기전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절대 내성이 100%인 속성이 있다면, 그 공격에 대해서는 이유불문 무적이었다.
실제로 열세 개의 별에는 이런 식으로 특정 분야에 절대 내성을 가진 헌터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채관형.
그는 결빙 공격은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결빙 절대 내성 100%를 가졌다.
‘화염 쪽이 15%로 가장 높네. 마법계 헌터 대부분이 화염을 즐겨 쓴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득.’
그간 차곡차곡 쌓아온 화염 절대 내성이 어느덧 15%였다. 적지 않은 수치다.
내성을 드라마틱하게 올려 주는 아이템이나 스킬, 성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티끌 모아 태산이었다. 착실하게 챙기다 보면, 언젠가는 상당히 가치 있는 특성이 되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다.
강후의 시선이 아직 아이템에 남아 있는 효과로 향했다.
【검은 눈물 – 모든 스킬 효율이 5%, 대미지가 10% 상승합니다.】
【악마의 속삭임 – 히든 스탯이 있을 경우, 반지 착용을 조건으로 영구적으로 25 증가합니다.】
검은 눈물은 단검에도 있는 옵션이었다. 같은 계열의 아이템으로서 효과를 연계하는 모양.
악마의 속삭임은 암흑기를 보유한 강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바로 반지를 착용했다.
다만 반지 착용 최대치인 10개를 모두 착용하고 있었기에, 기존에 꼈던 사냥꾼의 피를 뺐다.
체력만 50 보조해 주는 5등급의 아이템이라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락귀 소환(타락 결의)】
마지막으로 타락 결의에 연계된 세트 효과까지 확인을 마쳤다. 타락귀 소환은 스킬이었다.
【타락귀 소환】
【숙련도 : Lv. Max】
【암흑기, 신성력에 반응하는 검은 망령체인 타락귀를 마나 100을 사용하여 소환합니다.】
【타락귀는 오로지 암흑기와 신성력이 느껴지는 표적만 찾아내며, 공격 능력은 없습니다.】
【‘타락귀’ 상태에서는 공격 능력이 없으나 ‘타락수’가 되면 공격 능력을 갖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암흑기를 영구적으로 소모한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타락수 진화 – 암흑기 200】
【타락자 진화 – 암흑기 500】
“맨 마지막 정신 나간 옵션 두 줄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녀석이네.”
가치가 높은 스킬이었다.
즉, 타락귀를 활용해서 암흑기가 주 원천인 망령 형태의 몬스터를 찾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같은 곳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그쪽은 검은 인도자, 검은 그림자가 득시글거리니까.
게다가 신성력에도 반응하므로, 은신하여 모습을 숨긴 힐러 등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공격 능력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런 능력까지 있었다면 2등급 아이템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원 성취했다.”
굵직한 세트 아이템을 챙긴 덕분인지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게 세트 아이템의 힘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에 의외의 변수를 만들어 준다.
망령도 다룰 수 있는 암살자라. 슬슬 암살자의 틀을 깨고 있다.
암살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만, 변수 창출에 용이한 능력이 늘어나고 있다.
그 이후.
강후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좀 더 들어가 봤지만, 이내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우선 접근 지형 자체가 외부인에게 불리한 구조로 되어 있는 데다가.
몬스터 구성의 난이도가 확 높아져서, 아직 도모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방구 안의 던전이니만큼, 마냥 뒤를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없다는 점도 있었다.
하야부사 길드원들이 중간에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긴 했지만, 언제 정비해 다시 올지는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 횡 이동을 이용해 바로 은신을 딴 다음, 곧바로 순간 이동 능력으로 입구에 도착했다.
앞서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지정을 해 둔 위치였기에 복귀는 순식간이었다.
“…….”
아주 잠깐이지만 하야부사 길드의 거너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아야네의 모습이 보인다.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 해서, 특유의 눈빛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투 없는 소강 상태가 지속되어서인지, 은신 상태인 강후를 감지한 헌터는 한 명도 없었다.
아야네 역시 초코바를 복면 사이로 밀어 넣어 먹으며, 체력을 보충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가로질러 나왔다.
그리고 매드 솔라키움의 약효가 막 끝날 즈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일단 휴식을 취했다.
리권수와 싸우면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다 썼기에 후폭풍이 생각한 것보다 상당했다.
시간을 계산하고 맞춰 나온 것이긴 하지만, 늦게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이 컸다.
“후우.”
차가운 바위 위에 몸을 눕힌 강후가 빙글빙글 도는 밤하늘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붙이면 지금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 숨돌릴 정도의 시간이면 될 것이다.
* * *
이후, 리코우 타워로 무사히 돌아온 강후는 후쿠오카 해방구의 전투가 격화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봤다.
하야부사 길드 쪽에서 자체 전력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용병을 대거 고용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일대서 활약하던 헌터 용병들이 대거 후쿠오카 해방구로 유입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일본 헌터 치안청의 공식 인가를 받은 방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밀입국이었다.
하지만 해방구의 패권을 걸고서 싸우는 판국에 그깟 법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애초에 일본 헌터 치안청의 입김이 후쿠오카 해방구에는 닿지도 않았다.
어쨌든 시기적절하게 잘 다녀왔지 싶었다. 이틀만 망설였더라도, 접근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남은 암흑기 파밍 던전은 총 5개. 그중에 마지막 던전을 안영호와 가게 될 터.
아야네는 나중에 연락을 한 번 넣어 볼 생각이니 지금 급할 것은 없고.
다만 문득 타카시가 생각났기에 그에게 헌터 그램으로 DM을 보냈다. 한 줄 메시지였다.
- 비 오니까 길 조심해.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가 강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집 밖으로 안 나오는 놈에게 길 조심이라니. 일상적 인사를 비일상을 사는 녀석에게 해 버렸다.
보내 놓고 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읽음 확인이 떴다.
이어 메시지를 입력 중일 때 활성화되는 아이콘이 떴지만, 강후는 헌터 그램을 껐다.
그때.
깜박! 깜박! 깜박!
리코우 타워의 객실마다 달려 있는 경보등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상 방송이 나왔다. 어지간해선 방송을 잘 하지 않는 리코우 타워의 이례적 상황이었다.
“음.”
편히 쉴 생각으로 속옷만 입고 있었던 강후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는 사이, 방송 내용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현재 리코우 타워 근처에서 호사카 켄지와 이시하라 유우지가 확인되었습니다.
- 서포트 타워의 동력원 시설을 건드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므로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 레벨 300 이상의 소속 헌터들은 지금 즉시 정문으로 집결해 주십시오.
“세트 효과 발동인가.”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말하는 세트 효과는 또라이 둘이 뭉쳐서 생기는 최악의 시너지를 말한다.
호사카 켄지는 공간 활용 능력이 일품이고, 이시하라 유우지는 광전사와 암살자 특성을 가졌다.
이런 둘이 호흡을 맞추면, 상대하는 입장에선 역겨울 정도로 극한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작정하고 게릴라전을 해 버리면, 정말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안영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안 그래도 전화를 할 참이었는데, 안영호가 먼저 할 말이 생긴 모양이다.
“어, 영호야.”
- 형님,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인데 그냥 쉬고 계셔도 됩니다. 저희 길드 일이에요.
“상황이 썩 좋진 않아 보이는데.”
- 이건 형님이 나서실 필요도, 그러셔서도 안 될 일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코우 길드의 관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수습은 리코우 길드가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강후가 나선다고 해서 리코우 길드가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부터 궁금하긴 했어.’
강후의 눈빛이 이채를 띤다.
호사카 켄지, 이시하라 유우지.
둘 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새끼들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실력은 상당한 녀석들이다.
장시환-채관형 조합을 생각나게 할 법한 환장의 조합. 그래서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었다.
마침 리코우 길드원들도 모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적절하게 방패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끊자.”
- 형님, 안 나오실 거죠?
“수습이나 해.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형님, 절대로 안 나오시는 겁니다? 숙소는 안전하니까 그냥 계시면 돼요!
“알았으니 끊어.”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강후가 알기로는 오늘 후미야를 포함한 다수의 간부들이 전장으로 향한 상황이다.
토우시 길드와의 전면전이 격화되는 양상이라, 핵심 전력이 동쪽으로 꽤 빠진 상태.
그래서 지금 당장은 리코우 타워에 머물고 있는 헌터 전력이 생각보다 약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정예가 동쪽으로 전부 빠졌으니 제대로 된 알맹이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창문 밖.
500m 정도 거리를 둔 반대편 호텔 위에서 한 남자가 리코우 길드원을 상대로 칼춤을 추고 있다.
이시하라 유우지.
미친놈이 확실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