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타락한 진실 (3)
* * *
그 후, 아야네와는 헤어졌다.
연락을 할 일이 있을까 싶었다. 예전에 백선태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충분히 매력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라는 것은 알겠는데, 굳이 만날 필요까진 있을까 하는?
정문 제1 연구소에서 잠깐 호흡을 맞췄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야네의 실력을 본 적이 없어서다.
물론 하야부사 길드에서 특별히 외부 용병을 들였다는 것으로 간접적인 검증은 된다.
이권이 걸려 있는 던전을 지키는 작업에 외부 용병을 들이는 경우가 흔치는 않아서다.
하지만 그 믿음이 강후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하긴 신기하군.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나처럼 회색 경계에 적당히 발을 담근 거겠지.’
웬만해서는 이런 인연은 일회성으로 생각하고 넘기지만.
강후는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아야네에게 한 번 연락을 넣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본래의 추격을 포기하면서, 오히려 연락처를 공유할 정도면 관심 표현은 크게 한 것이 맞다.
왜 자신에게 그만큼 빠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도 다시 만나 보면 풀릴 궁금증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적당히 이동 길목에 자리 잡은 몬스터를 잡으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타락한 진실의 위치를 알려 주는 나름의 GPS가 있으니, 불확실성이 없어 정말 편했다.
어느덧 레벨은 190.
기본 스킬을 얻는 시점인 레벨 200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10만 더 올리면 되는 상황.
아이템의 획득처가 몬스터일까. 아니면 지형지물에 묻혀있는 형태일까?
궁금증이 무르익어갈 즈음, 드디어 타락의 진실이 있는 위치가 보였다.
상태창이 가리키고 있는 위치에는 몬스터 하나가 외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스스슷……. 스슷…….
한눈에 봐도 무거운 대검이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다.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인간에 훨씬 가깝다.
‘언데드?’
혈색을 보니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은 분명히 아니다. 몸의 일부는 썩고 문드러져 있기도 했다.
“크어어어…….”
양손으로 대검을 움켜쥔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언뜻 힘이 없어 대검을 지면에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언제든 힘을 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 터. 평소에만 저렇게 의도적으로 힘을 풀고 있는 것이겠지.
강후가 성좌 스캔을 시도했다.
순수한 언데드라면 성좌 자체가 나올 리 없고, 헌터라면 성좌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망한 헌터의 성좌 정보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근데 움직이잖아.”
사망한 헌터.
그렇지만 움직이고 있는 헌터.
강후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교잡종’이었다.
교잡종이란,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일종의 돌연변이 몬스터다.
오랜 기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다 보니 생긴 산물이다.
가깝게는 북한에 교잡종이 있으나, 전체 수만 따지면 서(西) 호주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헌터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호주 쪽은 너무 많은 몬스터가 등장해 호주 서쪽의 사람들이 동쪽으로 대규모 이주를 했다.
그런 탓에 몬스터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서 호주에는 온갖 교잡종이 득시글거렸다.
그중에는 날랜 몬스터와 결합한 캥거루도 있어, 호주 치안청의 속을 여간 썩이는 게 아니었다.
“음…… 살짝 구역질이 나네.”
강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북한에서 발생한 교잡종은 탄생 과정이 괴이하다.
원작에서 직접 써 놓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강후는 슬슬 올라오는 메슥거림에 입술을 다물었다.
북한에서 파생된 교잡종 몬스터는 무리 여왕이 죽은 헌터의 몸에 새끼를 심어 놓은 케이스다.
‘무리 여왕’은 돌연변이로 대형화된, 말벌 형태 몬스터의 암컷이자 군주다.
알 대신 바로 부화된 새끼를 낳는데, 그 새끼를 인간의 몸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뇌를 잠식하면서 자리를 잡고, 이를 컨트롤 타워 삼아 인체를 조종한다.
헌터의 능력은 유지되면서 동시에 죽은 존재가 되는데, 이것 때문에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반지는 찾았고.’
교잡종이 찬 목걸이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반지가 보인다. 타락한 진실이다.
주변을 슬쩍 보니, 시야가 닿지 않는 바위 뒤에 헌터의 시체가 제법 숨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안 보였는데, 교잡종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자리를 바꾸자 보인 것이다.
‘헌터가 이리 많이 죽었다면 이유는 하나지. 놈에게 즉사기가 있다.’
강후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은 듯한 헌터의 시체를 보며 생각했다.
난전 끝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시체들이 전반적으로 깨끗했다.
그간 부패가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몸 전체에 상처가 매우 적었다.
착용한 아이템이 없이 발가벗겨진 것으로 봐서는 다른 데서 죽이고 여기에 모아 버린 것 같았다.
【리권수】
몬스터의 이름이 보인다.
생전의 이름이 그대로 몬스터명이 된 모양새다.
왜 북한에서 죽었을 몸의 주인이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겠지만, 사정이야 알 바는 아니다.
어쨌든 원작에선 떡밥으로만 나왔던 교잡종을 직접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단, 상당히 불쾌했다.
죽은 인간의 몸에 새끼를 까서, 그 능력을 계승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니.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 건가 싶지만,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라 생각은 거기서 끝냈다.
첫째도 둘째도 즉사기 조심.
강후가 대전제를 명확하게 세우고는 리권수와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래, 2등급이나 되는 아이템을 공짜로 먹을 수 있나. 대가는 당연히 치러야 한다.
접근하기 전.
강후가 언데드 계열 몬스터에게는 특효약인 스킬을 전개했다.
【사령의 침묵】
같은 언데드처럼 위장하는 스킬이다. 잘 먹히면, 얘기가 아주 쉽게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이이잉!
리권수는 멀리서 감지되던 강후의 기운이 사라지자, 곧바로 대검을 들어 보호막을 활성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후가 사령의 침묵 사용을 중단하자.
스륵.
리권수가 다시 대검을 내리고는 보호막을 해제했다.
‘꼼꼼하네.’
그 이후, 몇 번 사령의 침묵을 쓰고 중단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리권수는 강후와 호흡을 맞춰 보호막을 만들고 거두기를 반복했다.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령의 침묵을 쭉 유지하니, 보호막도 계속 풀리지 않았다.
‘일단 사령의 침묵은 기각.’
이런 구조면 안 먹힌다.
강후가 날로 먹으려 했던 속내를 반성했다. 그래, 몬스터가 너무 멍청해도 재미없지.
일단 거리를 좁혔다.
대검과 단검의 승부라서 근접전은 피할 수 없다.
길이에서는 자신이 상대적으로 불리하지만, 속도에서는 분명 이점을 잡을 수 있을 터.
한데 강후가 가까워지자, 방어적으로 상황에 임했었던 리권수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우웅.
제자리 회전이었다.
예전에 새미의 ‘멸살 대회전’도 그렇고, 투르보의 ‘토네이도’ 스킬도 그렇고.
위협적인 공격 수단을 가진 몬스터들이 종종 이렇게 회전 형태의 공격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꽤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빈틈이 잘 안 보여서다.
‘무슨 믹서기도 아니고.’
딱 이 꼴이다.
인간 믹서기가 되어서 접근하는 느낌. 잘못 상대했다가는 살과 뼈가 갈려 죽을 것 같은 느낌.
그런 위압감이 회전 공격 패턴에는 늘 존재했다.
【전광비도】
강후가 예비 단검으로 리권수를 노렸다. 접근 타이밍을 보긴 어려우니 일단 찔러 보는 것이다.
회전이 아주 만능은 아니어서, 오히려 이럴 때 빈틈을 파고 들어가면 리권수가 피해를 더 크게 입는다.
보통 회전 중에는 자신의 몸을 방어할 수 있는 기전을 활성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바로 그때.
처억! 따앙!
“…….”
회전하면서 단검을 쳐낼 것이라 생각했던 강후의 예상과 다른 대응이 나왔다.
단검이 강후의 손끝을 출발하는 순간, 리권수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곧바로 단검을 쳐낸 것이다.
회전과 어지러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가장 정석적이고 안전한 방어 방법이었다.
“후우.”
강후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쉬운 전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 * *
강후는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매드 솔라키움 하나를 먹었다.
어느덧 남은 개수도 한 자리로 접어들었다. 총 9개. 슬슬 마스터 K에게 연락을 넣을 때가 됐다.
리권수는 원거리의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 방어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거리를 벌리기보다는 가까이 붙어서 난타전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가져갔다.
아슬아슬한 난타전을 통해, 리권수에게서 얻어낸 정보는 녀석의 정신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벌, 그러니까 곤충에 가깝다 보니 정신 교란에 대한 대응력이 부족했다.
그것은 전투에 있어 능숙한 것과는 별개로 ‘본체’인 새끼 벌의 정신력의 총량의 문제였다.
덕분에 환각이나 시야 강탈, 얕은 혼돈 같은 스킬에 끊임없이 걸렸다.
그것은 곧 잘못된 감각, 사라진 시야, 왜곡된 평형 감각으로 이어지면서 교란을 일으켰고.
강후는 최대한으로 리권수의 회전 공격 패턴을 억제하며 가까이에서 맹공을 퍼부었다.
물론 리권수도 마냥 당하고 있지는 않아서, 몇 차례 거센 반격을 하기도 했다.
그때, 중간중간 전투가 교착 상태일 때를 노려 강후가 활용한 회복 옵션이 아주 유효했다.
【광란적 치유】
【스킬 숙련도 : Lv Max】
【정지된 상태에서 마나 1을 체력 1로 치환하여 회복합니다. 초고속의 회복이 가능합니다.】
예전에 아드에게 얻은 회복 스킬이다.
매드 솔라키움으로 마나 과민증의 고통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 강후에게 아주 유용한 수단.
그래서 리권수가 강후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는 것이 체력이 쭉 차는 것을 허락하는 꼴이 됐다.
예전에 스킬을 얻은 이후에 집중해서 쓸 일이 없었는데, 체력 소모전으로 가는 지금은 필수 스킬이었다.
이 스킬 때문에 리권수와 강후의 체력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리권수의 입은 점점 벌어지고 있는 반면, 강후의 호흡은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강후에게 좋은 상황이 되지 않게 하려면 매섭게 공격을 몰아쳐야 하는 상황.
하지만 리권수 – 의 몸을 차지한 새끼벌 – 의 판단력은 생각보다는 썩 좋지 못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보호 결계】
【자의에 의한 강제 파괴】
강후가 의도적으로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보호 결계의 파괴였다.
보호 결계 스킬은 적에게서 안정적으로 몸을 보호하려고 사용하는 스킬이다.
애초에 그러라고 존재하는 ‘방어형 스킬’이지만, 강후는 스킬을 다른 방향으로 활용했다.
마치 어떤 약의 부작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로운 효과가 되듯, 지금 보호 결계가 딱 그랬다.
【보호 결계가 파괴될 경우, ‘황폐화’ 효과가 발동되어 반경 10m의 모든 마나가 증발합니다.】
바로 황폐화 효과.
지금까지는 무의미하게 사용된, 파괴 이후에 발동되는 관심 없는 옵션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리권수가 생각한 것보다 주변의 마나를 꽤 많이 끌어다 쓴다는 점에서 착안한 강후의 노림수였다.
리권수의 마나 활용 효율이 대단히 나빴던 것이다. 마치 연비가 나쁜 차처럼.
그래서 보호 결계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황폐화 효과로 주변의 마나를 모두 날려 버렸다.
마나 과민증 덕분에 더 먼 곳에서 마나를 끌어올 수 있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리권수가 시간의 흐름에 쫓겨갈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