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타락한 진실 (1)
* * *
이것저것 이유를 물어볼 것 같았던 강후의 예상과 달리, 안영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강후가 필요로 하는 ‘인간 통행증’만 구해 줬을 뿐, 왜 필요한지를 전혀 묻지 않는 것이다.
안영호나 안영호를 상대하는 사람에게 있어, 침묵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다.
진실의 천리안 앞에서는 진실만을 말하게 되는 만큼,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침묵을 택하는 것.
강후는 안영호가 아마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후쿠오카 해방구에 대한 조사를 할 것이라고 봤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해방구도 결국은 헌터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고, 호기심에 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으니까.
물론 미친놈 소리를 듣기는 딱 좋다. 언제 어디서 마탄에 저격당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서다.
일단 안영호 덕에 후쿠오카 해방구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갈 통행증은 해결했다.
강후가 가야 할 던전은 바로 카나시미 던전.
슬픔을 뜻하는 일본어로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슬픔 던전이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카나시미 던전을 관리하는 주체는 후쿠오카 해방구의 패권 세력이기도 한 하야부사 길드.
사냥매라는 뜻을 가진 이름답게 하야부사 길드는 후쿠오카 해방구의 대표 세력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이권을 손에 넣는 것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반(反) 하야부사 세력이 연합을 결성하여 저지에 나섰다.
하야부사 길드에서 절대 결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길드들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덕분에 지금 후쿠오카 해방구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국적 불명의 용병들도 뒤섞여있는 탓에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는 살인을 대놓고 즐기려고 온 미친놈도 꽤 있었다.
그곳에서 이시하라 유우지가 툭 튀어나온다고 해도, 아마 놀랄 헌터는 아무도 없을 터다.
‘카나시미 던전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는 해.’
강후의 생각대로 카나시미 던전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던전 안에 단순히 ‘있는’ 것만으로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정말 가만히 있기만 해도 계속 경험치가 쌓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공짜 경험치를 얻으려는 헌터들이 많이 왔다.
특히 레벨은 낮은데 올릴 방법을 잘 찾지 못한 헌터가 많이 왔다.
그런 헌터들을 납치하거나 아이템을 탈취할 요량으로 오는 헌터들이 그만큼 또 많았다.
일부러 시비를 걸고 싸우거나, 몰래 숨어있다가 죽이는 방식으로 쉽게 소득을 올리곤 했다.
이렇듯, 후쿠오카 해방구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존의 장이었다.
안영호에게 남은 던전 다섯 개에 대해선, 일단 이틀간은 공략을 보류할 것임을 통보했다.
그리고 도움에 대해 충분한 감사의 표현을 전한 뒤, 곧바로 후쿠오카로 떠났다.
안영호가 말한 조력자와의 접선 지점으로 향하니, 과연 그가 미리 준비를 하고 나와 있었다.
강후나 그 사람이나 전부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서로를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딱 한 가지, 강후가 그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그가 하야부사 길드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상대로 내부자였다.
그렇다고 해도 강후는 이 내부자를 완벽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내부자가 거꾸로 상대에게 포섭되어서 역 내부자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순간이동으로 탈출할 계획도 세워 놨다.
“타시죠. 모양이 좀 빠질 수 있습니다만, 이것만 협조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내부자가 자신이 몰고 온 세단의 조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위치에는 여성용으로 보이는 장발의 가발이 담요와 함께 놓여 있었다.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검문이 있을 때, 가발을 쓰고 담요로 적당히 가리면 됩니다. 머리카락만 좀 나오게 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곽에서 속 시끄럽게 싸우거나 트랩을 조심할 필요 없이, 곧바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다.
그의 말대로 모양이 좀 빠지긴 해도, 쉬운 방법을 마다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내 강후가 타고, 미리 가발을 쓰고는 담요로 몸을 가릴 수 있는 만큼 충분히 가렸다.
후쿠오카 해방구의 검문소까지는 거리가 좀 남았지만, 준비는 미리 진행했다.
쏴아아아.
후드드드득.
다만 갑자기 시작된 강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쪽의 일기예보는 살피지 못했는데, 느낌이 꼭 태풍 같았다. 그것도 제법 규모가 큰.
비가 오고 안 오고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들어갈 던전의 날씨는 다를 테니까.
그렇게 해방구로의 이동이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김천 해방구와는 시작부터 다른 분위기의 입장이었다.
* * *
아무리 내부자라고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풀릴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했던 강후였지만.
예상과 달리, 해방구 안으로의 진입은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입구에서 검문하자, 그가 자신의 소속과 직급을 알리는 명찰을 보여 준 것으로 끝난 것이다.
아주 잠깐 조수석에 앉은 강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나, 그는 능청스러운 답변으로 넘겼다.
- 오늘 밤에 나랑 같이 있을 애인이다. 궁금하면 얼굴이라도 보여줄까?
- 아, 아닙니다! 흐흐! 즐거운 밤 되십쇼! 불철주야 고생 많으십니다!
- 이건 너희 회식에 쓰고. 고생들 많다.
- 감사합니다!
그는 가발만 모습을 빼꼼 드러낸 강후를 ‘애인’으로 위장함으로써 귀찮은 절차를 모두 피했다.
오히려 의심을 지우기 위해, 얼굴을 보여 주겠다는 적극적인 말로 수상함을 걷어냈다.
영리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검문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주변에서는 총성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폭발음까지도 들렸는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진입을 시도한 헌터의 최후인 듯했다.
아마도 마나 트랩이라던가, 군용으로 활용 가능한 지뢰를 잔뜩 매설해 둔 거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 강후도 다시 한번 ‘정상’적인 진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내부자를 따라서 해방구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강후는 머물 거처를 제공받았다.
내부자는 그 이후 홀연히 사라졌고, 강후 역시 제공받은 거처에서 나왔다.
그를 100% 신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안영호에게 부탁받은 바를 다하고 난 뒤, 미련 없이 하야부사 길드에 정보를 팔아넘길 수도 있다.
강후는 어차피 해방구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기에 곧바로 카나시미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야부사 길드원을 죽이면, 너도 죽는다.’
강후가 던전이 있는 위치로 이동하는 동안, 후쿠오카 해방구의 룰 하나를 떠올렸다.
룰이 세부적으로 더 있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 해방구의 룰은 저것 하나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하야부사, 반 하야부사 세력의 전면전이 몇 개월을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살인, 살인에 대한 복수, 복수에 대한 복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앙갚음들…….
정상이 아니었다.
‘새삼 느끼지만 신기하네.’
강후는 GPS처럼 계속 아이템의 위치를 표시해 주고 있는 세트 추적 효과에 감탄했다.
물론 타락 결의에 연계된 아이템에 대해서만 추적이 가능한 구조이기는 하다.
어쨌든 위치를 확실하게 알려 주니까 적어도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막연함은 없었다.
문제는 과정이다.
‘생지옥이 따로 없군.’
아직 카나시미 던전까지의 거리가 꽤 남았음에도 거리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일반인은 살지 않는 곳이라, 대부분의 건물은 주인 없는 어두운 상태로 있었다.
빌딩도 예외는 아니라, 유리창이 깨지거나 흉물스러운 골조가 노출된 채로 있었다.
타앙!
어디선가 총성이 들리고.
쏟아지는 장대비와 외로이 빛나는 초승달을 배경 삼아, 헌터 하나가 피를 흩뿌리며 추락한다.
아마도 빌딩 옥상을 통해서 이동하던 헌터가 있던 모양인데, 솜씨 좋은 저격수에게 당해 죽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아아아!”
헌터를 저격한 저격수의 위치가 노출되자마자, 다른 헌터가 그 저격수에게 접근해 죽였다.
방금 누군가를 죽인 전공이 무색하게 그 저격수 역시도 똑같은 운명으로 뒤를 따랐다.
“…….”
조금 귀찮고 신경 쓸 게 많아도 은신이 좋아 보인다.
강후가 오래전에 꺼진 것으로 보이는 가로등을 타깃으로 삼아 바로 횡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은신 상태로 접어든 뒤, 빠르게 던전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에 본 상황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할 뿐이다. 던전 앞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일 것이다.
30분 후.
카나시미 던전 앞에 도착한 강후는 예상한 대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마주했다.
수를 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헌터들이 여기저기에서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
전장을 관통하는 전략이 있다기보다 눈에 보이는 적을 열심히 죽이는 개싸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략이 무의미하다 싶을 만큼, 전장의 범위가 넓었다.
강후는 이 지옥 불구덩이 안에서 칼춤을 출 생각은 없었기에, 입구 방향으로 쭉 이동했다.
저격수들이 꽤 많이 보인다.
다행히 은신을 탐지하고 자신을 조준하는 저격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직관이 발동됐을 테니까.
‘이상해.’
그림이 조금 수상했다.
입구 쪽이 의외로 경계가 허술했다. 그쪽으로 향하는 저격도 그다지 없어 보였다.
보통은 입구에 화력을 많이 집중한다. 던전에 들어가려면 무조건 지나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들어가도 딱히 상관없다는 듯한 포지션이 보이는 것이다.
하야부사 길드의 헌터들도 입구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강후가 헌터들 사이를 지나치면서 곁눈질로 살핀 스킬 중 하나를 체크했다.
【처세술】
그리고 바로 처세술 스킬을 활용해, 일회성으로 그의 스킬 하나를 카피했다.
어느덧 던전 입구가 코앞.
견제성 저격이라도 분명히 있을 법한데 역시 조용하다. 흔한 마탄의 흔적도 주변에는 없다.
일단 무조건 던전에 들어가야만 하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길게 잴 것이 없었다.
스으윽!
이내 강후의 몸이 입구를 통해, 던전 안으로 들어가고.
【석화】
【분신술】
【처세술 – 수호 방패】
연달아 세 개의 스킬을 쉬지 않고 전개했다.
석화로 몸을 보호하며, 동시에 분신을 활용해 전방에서 대신 총알받이가 되도록 해 주고.
거기에 다른 헌터에게서 처세술로 카피한 수호 방패를 이용, 방어막을 구축하는 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앙! 타탕! 타타탕!
총성이 뒤섞여 울렸다.
잠깐 사이에 살핀 던전 입구 주변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경계가 느슨하다고 생각하고 들어왔던 헌터들이 일관되게 맞이했을 최후였다.
그랬다.
느슨해 보이는 풍경은 철저하게 의도된 함정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걸려든 멍청한 헌터들은 하나 같이 죽음을 면치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파아앙!
강후는 재빠르게 그림자 걸음을 전개하며, 입구로부터 쭉쭉 멀어져 갔다.
“뚫렸다!”
“X발, 저놈 잡아!”
“도대체 어떻게 읽힌 거야?”
오랜만에 등장한 침입자의 ‘생존’에 당황한 하야부사 길드원들이 다급히 강후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
그림자 걸음 스킬을 보고, 침입자와 자신이 구면임을 느낀 한 여자 헌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침입자의 스킬은 얼마 전에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