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친구의 자격 (2)
* * *
“역시.”
강후는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의 알림을 보고 웃었다.
타카시가 헌터그램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내용도 타카시답게 엉뚱했다.
- 어, 내가 부탁한 대로 처리해 줘.
- 아, 잘못 보냈네요. 업자에게 보낸다는 것이 그만. 죄송합니다. 일 보세요.
대뜸 왜 연락을 안 하냐고 묻기가 그랬는지, 실수로 메시지를 보낸 척을 했다.
“이 어설픈 연기에 속아 줄 바보는 없겠지만, 지금 그림에서는 속아 주는 게 맞지.”
웃음이 걷히려는 찰나, 다시 메시지를 보니 연달아 헛웃음이 또 나왔다. 참 단순한 녀석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타카시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타카시가 남겨 준 미해결과제에 대해서 궁금하고 미련이 남으면서도 일부러 거리를 뒀다.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다. 강후에게는 암흑기 파밍이 1순위였다.
그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게 밀당이 된 듯했다.
남녀 사이도 아니고 남남 사이에 밀당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놓고 얘기한다면 분명히 밀당이 유리하게 된 것은 맞았다.
지금 타카시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열세 개의 별을 빼면, 철저하게 그 혼자만이 남는다.
외로움이 패시브 스킬처럼 달려 있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결과물에 가깝다.
그래서.
강후가 메시지의 내용에 속아 넘어간 척, 천연덕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 아, 제가 연락드린다는 것을 너무 일이 바빠 놓치고 있었네요. 마침 잘됐네요. 잘 지내셨죠?
타카시의 자존심을 끌어 올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 * *
두 시간 후.
강후는 오사카 시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타카시를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는 타카시의 분신을 만난 것이지만, 분신을 보는 게 곧 본체를 보는 것과 같으니까.
그를 만난 곳은 조금은 오래된, 그래도 주변 풍경과 제법 잘 어울리는 5층 아파트 앞이었다.
한데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이런 아파트에서는 특유의 사람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주변이 온통 조용했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강후의 옆에 있던 타카시의 분신이 말했다.
“아파트 안의 몇몇 집의 현관이 아예 던전으로 연결되는 입구가 되어 버려서 말이죠.”
“아파트를 통째로 산 건가요?”
“결론적으로는 그렇죠?”
“가장 확실한 던전 관리 방법이네요.”
그제야 의문이 풀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다.
던전 입구라는 곳이 꼭 정해진 곳에 생기는 것은 아니어서다.
예를 들면 지하철 출구 앞에 생기는 경우도 있고, 아파트 옥상에 생기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강이나 바다 한가운데 생기는 일도 있는데, 그때는 출입에 늘 애를 먹는다.
“마지막 집을 설득할 때가 가장 힘들긴 했는데. 어쨌든 이렇게 던전 하나를 통째로 먹었으니, 뭐.”
팔짱까지 낀 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타카시의 모습이 왠지 웃겨 보인다.
자랑은 하고 싶은데 대놓고 하지는 못하겠고, 그런데 상대가 리액션은 해 줬으면 하는 것 같달까?
지금은 의도적으로 녀석의 외로움을 파고 들어가, 인연의 고리를 만들려고 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강후는 타카시의 ‘하찮은’ 마음을 다 읽으면서도 능숙하게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멋지네요. 알박기를 이렇게 해 두면, 확실히 다른 헌터들이 손대기 힘들죠.”
“손대면 다 죽는 거거든요.”
후웅! 후웅!
타카시가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움직임이 좋다. 경쾌하면서도 파괴적이다.
타카시가 말을 이었다.
“이 아파트에 연결된 던전은 입장 방식이 특이해요. 그러다 보니 제가 고생을 좀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들어가는 방식에 따라 던전에 연결되는 곳이 달라져요. 방법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죠.”
“미확인 케이스가 있다?”
“그렇죠.”
타카시가 자연스럽게 말을 긍정했지만, 강후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신중한 타입인 타카시는 절대로 외부인에게 미공략 던전을 보여 주지 않는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다. 자기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하물며 이제 두 번째 보는 사이라면 더더욱 마찬가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타입은 아니다.
‘일부러 떠보는 거겠지.’
강후는 타카시가 일종의 테스트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럴듯하게 이름을 붙여 보자면, 친구의 자격을 보는 거겠지.
원작에서도 에밀리아와 유청화에게 했던 일이다. 좀 더 가까워져도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강후가 물었다.
“제가 이 던전을 경험해 봐도 되는 겁니까? 타카시 님이 연구 중인 던전으로 보이는데요.”
“헌터끼리 인맥을 만들어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던전 공략밖에 없죠. 저를 보고 싶어 했다 하니, 이참에 던전이나 돌아보는 거죠.”
최대한 쿨하게 말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너무 티가 나서 전혀 쿨하지 않은 상황.
타카시 본인은 알까. 아마 누군가가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 줬으면 얼마나 어색한지 바로 알 텐데.
강후는 그런 부분에서 타카시의 미숙함을 느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함이나, 나쁘게 말하면 그렇다.
실제로 채관형은 원작에서 타카시의 이런 성향을 정말 싫어했다.
속내를 잘 숨길 줄 모른다며, 타카시 때문에 언젠가 열세 개의 별이 위기에 빠질 거라고 했다.
운명론을 믿는 채관형 입장에서는 그렇게 한 번 확신이 들고 난 다음에 뒤집을 수도 없었다.
“탐색을 좀 부탁드릴게요.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암살자가 특화되어 있으니까. 그렇죠?”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타카시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정이 꽤 특이했다.
몇몇 집의 현관문을 열자,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이 나왔는데.
여기에 발을 내딛었다가 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나를 불어넣기도 했다.
마치 이동하기 위한 정해진 패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에 마치 새로운 문이 열린 것처럼 붉은빛의 통로가 확 열렸다.
방금까지는 막혀 있었기에 볼 수 없었던, 던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뚫린 길이었다.
준비를 마친 강후가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저도 바로 따라 들어갈게요.”
강후는 앞으로 나서기 전에 분신술로 분신을 소환해냈다.
순간, 타카시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신중히 움직이는 강후의 생각을 읽은 탓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눈빛을 다시 숨겼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강후의 분신이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슈아아아!
강후는 분신의 시야를 통해, 공중에서 그대로 내리꽂히는 불의 검을 볼 수 있었다.
검의 길이는 5m 이상으로, 두께 역시 성인 장정 몇 명을 붙여 놓은 느낌이었다.
막으라고 존재하는 불검이 아니라, 어떻게든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검이 분명해 보였다.
타탓!
분신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불길에 휘말리는 것을 막았다.
동시에 분신에게 불의 끈이 연결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지정이라도 한 것처럼.
‘원거리 패턴이군.’
짐작이 간다.
시작부터 이런 변수가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 보라고 했던 거겠지.
대응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테니, 아주 좋은 시작이다. 먼저 본체부터 들이밀지 않았기에.
스윽.
이내 강후의 본체도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타카시가 강후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지속 시간이 끝나고 소멸 단계에 접어드는 분신을 대신해서, 자신이 직접 불검을 유도할 자리에 섰다.
강후는 확신했다.
불검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던전의 어딘가에 있고, 이 불검은 그를 기준으로 가장 먼거리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그래, 타카시가 매번 입이 닳게 주장하는 만물패턴론에 입각한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프슷.
이내 분신이 없어지고.
강후가 멀찍하게 자리를 잡았을 때, 어디선가 연결된 불의 고리가 강후를 휘감았다.
파앙!
동시에 그림자 걸음을 활용해서 그림자 하나를 타카시의 뒤를 쫓도록 만들었다.
이어 불검이 강후의 본신을 향해 공중에서 매섭게 내리꽂힌 그 순간.
파앗!
강후가 그림자와 자신의 위치를 바꿨다. 완벽한 교환이었다.
빠르게 불검의 영향권을 벗어나며, 안정적으로 원거리 패턴을 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강후의 ‘노가다’가 반복됐다.
불검이 떨어질 타이밍이 될 때마다 본체로 ‘지정’을 받고, 불검이 떨어질 때 그림자와 위치를 바꾸는 식.
20초 안으로 계속 반복해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강후는 군소리 없이 계속 패턴을 빼 주었다.
‘타카시 놈, 시작부터 테스트를 엄청 하드하게 하는데? 그래 봤자, 이 세계는 내 세계라고.’
강후가 속으로 웃었다.
원작에 나온 수많은 던전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굵직한 던전들의 패턴과 내용을 설계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그렇기에 직접 경험한 적 없는 패턴이어도, 빠르게 인지하고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원거리 패턴으로 예상되는 순간부터 바로 스킬을 활용해 대응한 것이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이 던전에 들어왔다면, 시작과 동시에 몸이 반 토막 나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꽤 아찔한 구석도 있었다. 목숨이 날아갔을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타카시가 몰랐을 리 없다.
아마 녀석은 이 정도 시험쯤은 통과해야,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자격이 있다고 본 거겠지.
여기서 죽을 실력이라면 더 볼 필요도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죽었다고 해도 아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죽음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보여 줄게.’
강후가 좀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원거리의 불검 패턴은 끝났다.
또 어떤 패턴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열심히 머리 굴릴 준비는 끝났다.
* * *
‘재밌네, 얘.’
시간이 흐를수록 타카시는 강후의 대한 호기심이 더욱 깊어졌다. 궁금증은 더 커져 갔다.
사실 강후가 패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강후의 예상대로 타카시는 연결된 다양한 타입의 던전 입구에서 패턴 체험을 끝난 상태였다.
강후가 처음, 입장하기 전에 분신술을 쓸 때부터 플러스 점수를 주기는 했었다.
설령 안전하게 보이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강후의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안에 들어가자마자 원거리 패턴을 인지하고 그림자 걸음을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쿨타임이 돌 때마다 계속 원거리 패턴을 빼 주는 것도 아주 좋았다. 책임을 미루지 않았다.
이후로도 강후는 자신이 패턴을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하며 대응했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타카시를 리드하기도 했다. 이 방향은 안전하다면서 말이다.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꼼꼼하네. 얘, 생각보다 진짜 마음에 드는데?’
타카시는 예상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능숙하게 패턴을 파악하는 강후에게 헌터로서 깊은 매력을 느꼈다.
만물패턴론!
자신이 신봉하는 던전 공략 논리에 있어, 강후는 교과서 자체나 다름없었다.
마치 이 던전을 설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디테일한 대응까지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