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친구의 자격 (1)
* * *
저녁부터 시작된 비는 갈수록 더 굵어지더니, 자정이 되어서는 아예 폭우가 됐다.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속보로 호우 특보를 다뤘다. 몇몇 곳은 벌써 침수가 발생한 모양.
폭우가 내리면 난리법석이 되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 밖에 나가면 개고생이라지만.
테라스에 서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커피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빗줄기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리듬이 기분 좋은 소음이 되는 것이다. 잡념을 지워주는 느낌이랄까.
오사카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안은 여기서 평생을 지내고 싶을 만큼 편안했다.
리코우 길드원과 관련자들에게만 제공되는 호텔인데, 서비스 질이 정말 좋았다.
“일단 150억 원을 더 늘렸고.”
150억 원. 앞서 강후에게 목숨을 잃은 토우시 길드원의 아이템을 수습하고 판매한 금액이었다.
안영호가 모든 과정을 직접 총괄한 덕분에 복잡하게 신경 쓸 것 없이 잔고만 확인하면 됐다.
1,850억 원.
통장에 있는 돈이었다.
짜투리까지 합치면 1, 2억 원 정도 더해지긴 하지만 그 계산은 논외로 했다.
게다가 이제 자정을 지나고 나면, 월이 바뀌어 골드 카드의 한도도 리셋이다.
지난달에는 스핏파이어 길드에서 준 골드 카드를 마스터 K에게서의 물품 구매에 썼었다.
이번 달도 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솔라키움, 매드 솔라키움이 줄어든 차였으니까.
강후는 앞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암흑기 파밍이야 던전이 준비되어 있으니, 언제든 들어가서 하면 그만이었다.
다섯 곳만 공략하고 중단한 것은 체력적인 부침도 있긴 했지만.
사실 일주일 내내 언데드류 몬스터의 낯짝들만 보고 있다 보니, 지겨워서였다.
전투 패턴이나 레퍼토리도 너무 단순해지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흐름을 끊은 것이다.
익숙함, 적응, 그리고 반복.
그것은 가장 싫어하는 변화이기도 했다. 창의성을 말살하고, 타성에 젖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킬 복사는 신중해야 해서 마음이 쉽게 정해지지 않네.”
예전에 얻은 스킬 복사의 기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스킬 복사 1회】
【헌터를 상대로 성별, 레벨, 클래스에 상관없이 직접 확인한 스킬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체득하는 과정에서 클래스 불일치에 따른 페널티는 없으며, 효율도 100% 승계됩니다.】
제약, 제한이 전혀 없는 자유도 100%의 스킬 복사였다.
대상이 헌터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본 스킬이면 충분하고.
이 조건만 달성하면, 예를 들어 레벨 1,000의 헌터라고 해도 스킬 복사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 복사 대상으로 떠올렸던 것은 장시환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스킬이 꼭 장시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강후와는 결이 좀 달랐다.
스킬 복사 기회는 무르기가 안 되는 만큼, 신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꾸 고민하다 보니, 지금은 아끼다가 똥 되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아예 천살노수를 찾아볼까?”
생각의 방향을 확 틀어봤다.
천살노수.
중국에 있는 네임드 암살자로 올해 칠순을 막 넘겼을 노인이다.
강후와 같은 암살자이기에 빼먹을 만한 스킬이 꽤 많았다.
다만 별칭에 ‘살’이라는 글자가 들어갈 만큼, 그는 외부인에 대해 철저한 응징으로 답을 해 왔다.
그래서 지금 천살노수가 머무는 공간에는 어느 헌터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목적을 갖고 왔건 간에 이유를 설명할 틈도 없이, 그의 손에 죽기 때문이다.
“위험하긴 해도, 가치 측면에서는 천살노수가 낫겠다. 조만간 중국을 가야겠어.”
이래저래 생각해 봐도, 암살자로서 결이 같은 그에게서 스킬을 복사함이 좋을 듯했다.
그에게는 광역 살상, 단일 살상 스킬 가릴 것 없이 암살자에 특화된 스킬이 많다.
그중 하나만 성공적으로 복사할 수 있어도, 앞으로의 전투가 제법 편해질 것이다.
물론……. 스킬을 눈으로 살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강후는 일본에서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떠올렸다.
천살노수와 관련된 스킬 복사의 건은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백날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타락한 진실이 일본이었나?”
바로 생각난 것은 강후가 착용하고 있는 단검인 타락한 신념에 관련된 세트 효과였다.
【타락 결의 – 세트 효과 ‘타락 결의’를 가진 아이템 5종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해당 아이템이 던전에 있을 때만 표시가 가능하며, 특정인의 소유 시에는 알 수 없습니다.
아이템 5종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검, 흉갑, 목걸이, 반지 2종.】
5종 중에서 단검은 강후가 갖고 있는 상황.
나머지는 위치를 확인해 보니 흉갑은 독일, 목걸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었고.
반지 2종 중 하나는 중국에 있었다. 그리고 남은 1종이 일본에서 확인이 됐다.
마치 GPS처럼 현재 위치를 표시해 주기 때문에, 어느 던전에 있는지 특정하는 것은 쉬웠다.
다만 문제는.
“후쿠오카 해방구네.”
그 던전이 누구의 관할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카이호쿠라고 부르는 곳으로 한국의 해방구와 명칭이 같았다.
상황의 특성만 놓고 보면, 한국의 오산과 상황이 비슷했다.
오픈형 던전 하나와 마석 광산 채굴권을 놓고 다수의 길드가 경쟁 중인 상황이었다.
패권을 잡을 뻔한 길드가 있었는데, 반(反) 세력 연합이 결성되는 바람에 막판에 수포가 됐다.
여기는 리코우 길드의 관할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영역. 공적으로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안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후쿠오카 해방구 쪽에 아는 연줄이 없는가 하고.
녀석이라면 최대한으로 도울 방법을 찾아 줄 것이다.
* * *
저녁 내내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막상 새벽이 되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후미야의 배려로 대여받은 지하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잠이 안 오는 거, 몸이나 살짝 풀어 줄 생각에서였다.
몸에 피로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데 멍하니 누워있기는 더 싫었다.
안에는 다양한 무기가 있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연습용, 훈련용이기에 고가의 무기는 아니었지만, 개별 연습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좋았다.
잠시 단검을 만지작거렸던 강후가 이내 밀쳐냈다.
일주일 내내 단검을 움켜쥐고서 살았던 터라, 지금만큼은 단검과의 교감은 피하고 싶었다.
“한 번 써 볼까.”
강후의 간택을 받은 무기는 바로 마력탄총이었다.
패시브 스킬인 초감각 – 무기 덕분에 기본적인 조작법을 별도로 숙지할 필요는 없었다.
거너 관련 스킬은 없으니, 마탄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스킬은 쓸 수 없다.
하지만 마나를 응축시켜서 쏘는 기본 마탄 발사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마나를 한 점에 모아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총 자체의 집속 장치가 마나를 한곳에 모아주고, 최대치로 압축을 시작한다.
삑. 삑삑. 삑.
강후가 훈련장 안에 위치한 훈련 장치의 버튼을 몇 개 눌렀다.
가상의 타깃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 원하는 수준을 전방에 구현해낼 수 있다.
마석을 활용해서 구현한 것으로 일종의 마나 덩어리다. 인체를 닮은 방어벽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설정한 것은 레벨 200의 헌터. 그쯤 되는 내구성과 체력을 가진 가상 타깃을 구현했다.
그리고.
우웅. 우웅. 우웅!
강후가 전력으로 마력탄총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기존 마나는 시작과 동시에 전부 휘말려 들어가 사라졌고, 곧바로 마나 과민증이 발동했다.
그러자 마치 진공청소기를 보는 것처럼 주변 마나가 강후에게 폭발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마나는 고스란히 총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때마다 마력탄총이 진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슬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 과열의 조짐도 보이기 시작했다.
과도한 마나 회복을 하면서 부담을 느낀 몸이 슬슬 두통으로 앓는 소리를 낼 즈음.
“후우.”
심호흡 한 강후가 조준점에 맞춰서 가상의 타깃을 쐈다.
순수하게 마나만 불어넣은 상태에서 당긴 방아쇠였다. 스킬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바로 그때.
스퍼엉……!
가상 타깃이 터졌다.
동시에 우측의 전광판에 ‘즉사’라는 메시지가 출력됐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방금 강후가 쏜 마력탄 한 방이 레벨 200의 헌터를 즉사시킬 만큼 강력했다는 것이다!
‘마나 과민증이 이렇게 활용이 되나? 이러면 의외로 마력탄총은 나랑 궁합이 좀 맞겠는데.’
강후의 눈썹이 들썩였다.
물론 방금 같은 일격을 수시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마력을 모을 시간도 필요해서, 긴급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수, 보조 개념으로 마력탄총을 쓰는 것은 꽤 괜찮아 보였다.
혹은 전장에서 임기응변의 용도로 적의 총을 빼앗아 쓰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문득 예전에 반세영이 했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
다른 무기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헌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진짜 난 이런 쪽은 유머나 센스가 없네.”
스스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아주 잘 판단하고 있는 강후였다.
* * *
강후가 휴식을 취하면서 안영호를 통해 후쿠오카 해방구로 갈 방법을 찾는 동안.
타카시는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연락 한 통 없는 헌터그램 보안계정의 DM 창을 보고 있었다.
“지적해서 삐졌나? 그런 속 좁은 놈은 아닌 것 같았는데.”
만난 당일에 주소를 확인할 겸 보낸다는 첫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는 강후에게서 연락이 안 왔다.
엄청 만나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실력을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녀석이기는 했다.
한데 막상 연락이 계속 안 오니 오히려 자기가 뭔가 밉보였나 싶었다.
사실…… 심심했다.
요즘 저스티스의 동료들과의 교류가 영 없었다.
전에 서울에 잠시 모였던 것도 빈센트와 엘리자베스를 보기 위해 갔던 것일 뿐.
정작 다 모인 자리에서는 아무도 자신에게 큰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물론 그래 주길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동료’ 혹은 ‘친구’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 대해서 도란도란 대화라도 하길 바랐는데.
각자 하는 일이 바쁜지, 아니면 자신에게는 통 관심이 없는지 말도 제대로 걸지 않았다.
평소 살갑게 대해 주던 에밀리아와 유청화도 새로 합류한 엘리자베스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심지어 그 이후로는 둘 다 던전에 갔는지 연락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저스티스의 구성원이지만, 고독할 정도로 느껴지는 소외감.
타카시는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 차갑고 쌀쌀한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확실히 쓸 만한 암살자가 없어. 떡잎이라도 괜찮은 녀석을 요 근래 본 기억이 없는데, 걔는…….”
강후는 분명 달랐다.
그래서 자꾸 생각이 났다.
자기 앞에서 다 보여 준 것은 절대 아닐 듯하고, 찔러 보면 더 살펴볼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명분이 없이 강후를 먼저 찾는 것은 왠지 자존심도 상하고, 모양도 빠지는 일.
미끼를 하나 던져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니, 친구 되자는 놈이 뭐 이렇게 연락을 안 해? 필요할 때만 찾는 게 친구야?”
메시지를 보내는 와중에 타카시는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다.
짜증 나는 녀석이긴 한데 보고는 싶은! 딱 그런 녀석이 바로 강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