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일본으로 (2)
* * *
“형! 어서 오세요!”
입국 수속을 마치자마자 안영호가 강후를 격하게 반겼다.
로우톤의 박동재와 다른 하이톤의 목소리라는 점을 제외하면, 박동재 2호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안영호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는 존경과 감사의 꿀이 열심히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영호.”
“진짜 일본으로 모시기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백방으로 뛰었어야 했는데.”
“뒤에 외삼촌이 듣고 계시는데,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닌가?”
“아! 아아! 그런가요?”
강후가 안영호와 반갑게 악수를 하는 동안, 스즈키 후미야가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관서권에서 Top 1의 자리를 공고히 한 리코우 길드.
그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다. 상당한 거물이 나온 것이다.
안영호의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사실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헌터다.
후미야의 성좌 정보를 살피니, 레벨 600은 훌쩍 넘길 것 같았다.
장시환이나 채관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강동현 정도는 쉽게 뛰어넘을 실력을 가진 듯했다.
이어 안영호가 살짝 뒤로 물러서고, 후미야가 강후에게 악수를 먼저 청했다.
“방갑스무…….”
“일본어로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제법 쓸만하게는 할 줄 알고, 잘 들을 줄 압니다.”
한국어로 인사를 하려는 후미야에게 강후가 환한 미소와 함께 일본어로 말했다.
언어에 있어서는 불편함이 없기에 이런 부분에서는 참 편리한 점이 많았다.
“반갑습니다. 리코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이자, 영호의 외삼촌 되는 스즈키 후미야입니다. 편하게 후미야라고 불러 주십시오.”
“신강후입니다.”
“처음 해외로 나오신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떠십니까?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공항만 봐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국내와 크게 다르진 않네요.”
후미야의 질문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알아보고 온 바도 그랬다.
일본 역시 한국과 암묵적인 룰이 비슷해서 공항, 철도에 대해서는 잘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일본 헌터 치안청의 대다수 전력이 이런 교통 시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클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인지 공항 주변이 어수선하다던가, 조심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전광판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지명 수배에 관한 공고는 위협적이기는 했다.
그중에는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몇몇 헌터에 대한 전광판 알림도 있었다.
[이시하라 유우지]
[1급 지명 수배 대상]
[한국, 중국에서 입국한 헌터를 대상으로 무차별 살인을 거듭하고 있는 요주의 헌터입니다.]
‘그래, 저 새끼가 있었지.’
원작에서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로서 진행된 적은 없었다.
주인공 장시환의 경우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던 무대가 미국과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타카시로 인해 파생된 정보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이시하라 유우지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혐한, 혐중 성향을 가진 유우지는 일본 헌터들도 경멸할 정도의 미치광이 살인마였다.
진짜 그런 성향이 있다기보다, 살인의 정당화를 위해 억지로 이유를 붙였다고 할 정도.
다만 전광판 공고대로, 이유 불문 한국과 중국의 헌터를 노리는 것은 맞았다.
레벨도 현재 알려진 수준에서만 판단해도 500은 넘는다.
게다가 광전사, 암살자 특성이 혼합된 형태라서 상당히 까다로운 헌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1급 수배 대상인 데다가, 한중일 3국의 치안청이 공조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수배 중이었다.
리코우 길드의 밀착 보호를 받기는 하겠지만, 긴장의 끈은 늦추지 않기로 했다.
타카시를 만난다거나, 외부 활동을 따로 하게 되면 결국 자기의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리코우 길드가 호의적이고 배려해 준다고 해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챙겨 주는 것은 아니니까.
후미야가 미리 공항 앞에서 대기 중인 안전 리무진 쪽으로 강후를 안내했다.
일전에 정유리 덕분에 탔던 안전 리무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수한 리무진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한 번 운행에 억 단위는 쉽게 깨질 듯한, 호화로운 차량이었다.
안영호를 구한 것이 이 정도의 가치를 하는 걸까?
과한 대우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조카를 잃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보답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리무진을 타고, 리코우 길드의 건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좀 더 긴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옆에서 열심히 재잘거릴 줄 알았던 안영호는 후미야와 약속된 게 있는지 최대한 침묵을 지켰다.
“처음 강후님과 연락이 닿았을 때와 지금의 위상이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악명과 명성을 같이 쌓은 듯합니다. 길드에서 국내 동향을 살피시나요?”
“물론입니다. 길드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한국 길드와의 협력을 고려하고 있기도 하고요.”
“진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경쟁자가 있어서 쉽지는 않군요. 하하.”
쓴웃음을 짓는 후미야의 말에는 토우시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정화 길드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쉽게 말해 정화 길드의 허락 없이는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봐도 된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장시환은 협력 건을 두고, 일본의 여러 길드에 의도적으로 경쟁을 붙였다.
협력해 주는 대신, 그에 따른 대가를 극대화해서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주인공으로서 참 영리하게 머리를 쓴다고 자평했었는데.
리코우 길드와 가까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니, 참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원래부터 중요한 손님이셨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손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도 나름의 투자를 하는 것일 뿐. 다만 모든 투자에 진심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리코우 길드는 국외 헌터를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길드다.
원래는 관서권에서 Top 3 밖에 있던 리코우 길드가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행보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강후의 상품 가치를 판단하고,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것일 터.
혹자들은 이를 두고 ‘호구짓’이라고 하지만, 그게 틀리지 않았음은 지금의 위상이 증명하고 있다.
“이건 요청하신 던전 목록입니다.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후미야에게 서류를 넘겨받은 강후가 내용을 훑었다.
앞서 확인했던 바와 같았다.
암흑기 파밍을 노리기 위해, 강후가 의도적으로 언데드 계열 던전으로 리스트업 해 뒀다.
전부 언제든지 공략이 가능하도록, 대기 상태로 있었다. 안에 들어간 헌터가 없다는 뜻이다.
“확인했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 주셨군요.”
“솔직히 말하면 길드원이 좀 꺼리는 던전이기도 합니다. 언데드는 계산이 빗나갈 때가 많아서.”
후미야의 말이 맞다.
그것은 언데드 특유의 무감각과 무식함에 가까운 인내, 거세된 공포와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예상대로 흘러가는 던전에 가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안영호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더니, 이내 강후와 후미야의 얼굴을 흘깃 봤다.
개인적인 연락이었다면 굳이 눈치를 볼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관련된 용무가 있는 모양.
안영호가 잠시 통화 상태를 보류로 바꾸자, 바로 후미야가 물었다.
“무슨 연락이야?”
“타카시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강후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미 타카시와 사전 조율은 끝났다고 했다. 그것에 관련해서 더 나눌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닐 텐데.
혹시 만남을 취소하려는 걸까? 그러면 타카시와 접점을 만들려던 계획이 복잡해진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내용의 통화인지는 너무 궁금했다.
곧 안영호와 후미야의 대화가 오갔다.
“어떤 연락이냐?”
“지금 훈련장에 나와 계시다는데. 볼 수 있으면 지금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는데요?”
“지금?”
“네, 삼촌. 강후 형님이 입국한 것은 이미 알고 있다면서요.”
“공항 CCTV라도 해킹해서 본 건가? 대외적으로 알린 바가 없는데 말이야.”
“삼촌, 어떻게 답을 할까요?”
“이건 나한테 물어볼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강후님,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후미야가 강후에게 의사를 물었다.
어지간해선 만남의 주도권을 늘 자신이 가져가는 강후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것이 맞다. 그리고 타카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강후가 바로 답했다.
“괜찮다면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 주시죠. 귀한 분을 뵐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강후의 대답에 후미야와 안영호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후가 원하니 만남을 주선하고 자리를 잡기는 했다.
하지만 타카시에 대한 일본 내의 인식은 정말 나빴다. 기피 대상으로 분류해도 될 정도.
그런 타카시를 강후는 왜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무도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강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신뢰하고 감사해하는 안영호도 마찬가지였다.
* * *
타카시가 강후를 불러낸 장소는 훈련장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후는 김신령처럼 개인 저택이나 별장에 구축된 훈련장을 생각했었다.
보통은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카시의 훈련장은 폐공장이었다.
예전에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을 공격할 때 타깃이 됐던, 딱 그런 폐공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밖에서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창문은 전부 막혀 있었다.
안쪽 창문에 특수한 철판을 덧대어 놓았는지, 아예 그냥 하나의 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정에 차질이 되시는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나 영호나 오늘은 아예 프리하게 비워 둔 날이라. 신경 안 쓰셔도.”
졸지에 타카시를 만나는 자리까지 동행한 두 사람을 보며 강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타카시가 관계자 외에는 접근도 하지 말아 달라고 경고를 해 둔 만큼, 두 사람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강후가 성큼성큼 타카시의 훈련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란 폐공장 주변의 잡초와 상태가 엉망인 도로에서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났다.
애초에 타카시의 본체가 아니라 분신이 움직이고 있으니, 더 무심해질 수밖에 없을 터다.
물론 타카시 본인 – 본체 – 도 딱히 깔끔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집안은 엉망일 것이다.
원작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물 한 통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아서 참고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수돗물을 마시겠지. 그리고 몸에 맞지 않는 수돗물 때문에 배앓이도 하고 있을 것이다.
훈련장의 정문으로 보이는 철문 앞 10m 지점에 도착하는 순간.
척.
강후가 멈춰 섰다.
어떤 경고 팻말이나 특별한 표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후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
그리고 멈춰선 채로, 폐공장 주변을 하나의 시야로 크게 담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갈 수가 없도록, 촘촘하게 설계된 많은 감지 결계가 느껴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강후에게는 흐름이 시각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망할 히키코모리가 첫 만남부터 장난질이네.’
강후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선명하게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