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투사의 긍지 (3)
공간 이동 스킬을 모두 차단하는 결계는 면적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설계 비용이 올라간다.
방금 좀도둑을 한 번 잡은 것으로도 결계가 잡아먹은 마석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터.
몇십억 원은 우습게 깨졌겠지만, 이 안에 있는 아이템을 생각하면 사실 큰 투자는 아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인 만큼, 강복화의 투자는 충분히 의미 있는 투자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복화가 강후의 생각에 보탬이 되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좀도둑이어도 기본적인 아이템 세팅은 하고 있을 테니까요. 뺏은 것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그렇겠네요.”
“마켓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호호호.”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엿보였다.
누군가가 죽었음을 기뻐하기보다는 안전하게 물건을 지켰음에 안도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 강후는 남은 돈으로 아이템을 하나 더 바꿀까 하는 생각에 아이템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흉갑으로 구매한 투사의 긍지 외에는 딱 마음이 끌리는 아이템이 없었다.
옵션이 별로인 것이 아니라, 강후의 깐깐한 기준을 충족하는 녀석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투사의 긍지를 착용한 것만으로도 변화는 충분했다.
항마와 맷집도 각각 50씩 올라서 마법과 물리 공격에 대한 안정성을 더했고.
강후가 후순위로 육성에 임했던 민첩 스탯도 대폭으로 올랐다. 무려 350이나 올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당분간 민첩 스탯에 관심을 두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평소 움직임도 매우 날래졌다.
더 이상 살필 것이 없는 강후가 슬슬 거래를 정리하기 위해 화제를 돌리려고 할 즈음.
강복화가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꺼냈다.
“혹시 인페르누스라는 아이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인페르누스.
라틴어로는 지옥을 뜻하는 말이다. 단어를 기억하긴 하지만, 아이템에 대해서는 몰랐다.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입니다.”
“할머니, 또 그 얘기! 웬만하면 하지 말아요! 그거 좋은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그녀가 운을 떼기 무섭게, 옆에 있던 정유리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격한 반응으로 봐선 유쾌하지는 않은 얘기인 모양. 정유리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다만 강복화의 표정은 달랐다.
“할머니도 얘기할 만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하는 거야.”
“VIP마다 그 얘기를 해서, 벌써 거기에 휘말려 바보가 된 헌터만 다섯이 넘어가잖아요?”
“그만큼 1등급 아이템을 싸게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
“들어 보고 싶네요.”
강후가 정유리와 강복화 사이에 오가는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끊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정유리는 강후에게 위험한 아이템을 할머니가 추천해 주고 있기에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강복화는 충분히 매력적인 정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일 터.
1등급 아이템은 최저가가 5천억 원이다. 최고가에는 한계가 없다. 무제한인 셈이다.
그래서 정말 비싼 1등급 아이템의 경우에는 5조, 6조 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그런 아이템을 사고팔겠나 싶겠지만,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것이 헌터의 세계다.
“인페르누스라는 아이템이 있어요. 부적 아이템이고, 등급은 1등급. 죽은 헌터의 유품이에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일단 원작에서는 언급된 사실이 없는 얘기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야기가 형성되었다면, 장시환의 관심이 닿기 전에 누군가 차지한 거겠지.
그리고 그 이후, 장시환의 눈에 띌 일이 없었기에 이야기로 다뤄질 수도 없었던 것일 터.
“유족이 이 아이템을 팔고 있어요. 생전에 착용자의 유언도 있었죠. 새 주인을 찾으면 주라고.”
“무료 봉사는 아닐 듯한데요.”
“맞아요. 유족의 생각인지, 이것을 착용했었던 헌터의 유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착용에 490억 원을 받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착용 시도에 490억 원이라는 얘기겠죠?”
“맞아요. 이 부적 아이템이 착용자를 주인으로 인식하면 소유자가 바뀌어요. ‘귀속’의 진행이죠.”
“아니면?”
“부적이 착용자를 백치로 만들어요. 아니면 그에 준하는 정신적인 타격을 입히거나.”
“귀속이라……. 그 말은 주인이 된 이후로는 팔 수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착용할 수도 없다는?”
강복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속 개념이 생소하진 않았다.
2등급까지는 귀속이 흔한 이슈가 아니지만, 1등급 아이템부터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네. 그 아이템이 주인으로 인식한 헌터에게만 귀속되는 거죠.”
“490억 원으로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되거나. 아니면 10배 이상의 이득을 보는 주인이 되거나.”
“맞습니다.”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인페르누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검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다.
원작에서 제법 나온 설정이라서다. 보통 저런 형태의 아이템들은 잠재력이 높은 헌터를 알아본다.
백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악독한 흑마법이나 정신 조종과 연관된 것은 아닌가 하겠지만.
실제 대응법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아이템에 투영해 주면 됐다.
필요 이상의 저항이나 거짓으로 포장된 기억이 아닌, 솔직함 자체가 열쇠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템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끄럽고도 어두운 일면을 보여 주기 싫은 헌터들은…….
위선과 가식으로 아이템을 대하다가 앞서 말한 경우처럼 백치가 되어 버렸을 터다.
“저도 기회를 얻고 싶네요. 돈이야 있고, 1등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면 최고의 기회죠.”
“오빠! 그건 너무 위험해! 아까 얘기 못 들었어? 바보가 된다니까? 돈만 날아가는 게 아냐!”
“절대 착용하지 못하는 아이템도 아니고. 예전 주인은 착용한 적 있는 거잖아?”
“그래도! 오빠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안 그러면 되지.”
“그게 말이 쉽지, 말이 되는 건 아니잖아! 할머니, 오빠 좀 말려봐요! 이게 문제라니까!”
정유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강후에 대한 걱정이 짙게 묻어나는 외침이었다.
강복화 역시 손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런 아이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어요. 흥미로운 이슈이기는 하니까.”
“아뇨. 아는 수준에서 끝날 게 아니라, 정식으로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오빠!”
“생각이 있어. 믿어 봐. 아무 생각 없이 무리하겠다는 게 아냐, 유리야.”
강후가 그새 눈물까지 글썽이려는 정유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하는 정유리나, 알려 준 강복화나 각자의 의도가 모두 이해가 돼서 혼란스럽지도 않았다.
강복화가 답했다.
“유족들이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우리 마켓부터 들를 예정이에요.”
“아하.”
“정식으로 의사 접수만 하면 돼요. 나중에 마음이 변하면 포기해도 상관없어요. 다시 기회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하겠습니다. 혹시 앞선 순번이 있나요?”
“없어요. 유리가 걱정하는 대로 몇 번 그런 이슈가 생긴 이후로는 지원이 없어졌죠.”
“그러면 바로 넣어 주세요. 제가 준비해 보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얘기가 끝났다.
1등급 부적 아이템 인페르누스.
과연 그 뒤에 숨겨진 사연은 무엇일까. 그리고 녀석이 제공할 수 있는 스탯과 효과는 또 무엇일까?
기대가 됐다.
2등급도 아니고 1등급의 아이템이라면, 하찮다 평가받은 효과여도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강복화와 거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정유리는 강후에게 속사포처럼 걱정을 쏟아냈다.
“오빠, 진짜 괜찮겠어? 나도 호기심이 있어 도전해 볼까 했지만, 못 했어. 너무 두렵잖아, 바보가 된다는 거.”
“괜찮아. 그리고 잘못되어 봤자 죽기밖에 더할까.”
대수롭지 않게 죽음을 운운하는 강후의 모습을 보면서, 정유리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강후를 한심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만큼 초탈한 것 같아서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말려도 할 거지?”
“어.”
“그럼 오빠가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것밖에 없잖아.”
“그냥 네 할 일 해. 기도한다고 죽을 게 살고, 살게 죽고 그런 거 없어.”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원작자로서도, 그리고 신강후로서도 무신론자였기에 신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정유리도 과도한 걱정이 강후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확 틀었다.
“나는 할머니와 여기서 며칠 지낼 거야! 오빠는?”
“던전에 가려고. 흉갑도 산 마당에 성능 테스트는 해 봐야지.”
“오빠, 짧지만 잠깐이라도 봐서 즐거웠어. 매번 부산에 오면 혼자였거든. 이번에는 아니었네.”
“동선이 맞으면 이번처럼 잠깐잠깐 보자고. 그리고 할머니와의 거래 루트를 뚫어줘서 고맙고.”
“할머니가 진짜 취급하는 아이템이 많으셔. 자주 와봐. 오빠도 깜짝 놀랄 거야.”
“안 그래도 이미 놀랐다.”
정유리 덕분에 강복화와의 거래는 VVIP 자격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그 정도의 자격을 얻으려면, 구매가가 최소 5천억 원은 이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사고팔고의 개념이 아니라, 순수 구매 금액으로만.
하지만 손녀의 애교 공세와 개인적인 호기심 덕분인지, 그 허들이 많이 낮춰졌다.
물론 조건부로 대외비를 유지해 줄 것을 요청받았고, 강후 역시도 입을 놀릴 생각은 없었다.
* * *
그렇게 정유리와의 데이트는 끝났다.
데이트가 주였는지, 아이템 구매가 주였는지 살짝 헷갈릴 정도.
어쨌든 정유리와의 인연이 강복화라는 새로운 인물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계기가 됐고.
1등급 아이템을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기회로까지 이어졌다. 좀처럼 오지 않을 기회다.
강복화에게 안내받은 시기를 정리해 보면, 일본에 다녀온 후에 얼추 시기가 맞을 듯했다.
강후는 바로 전세혁을 만났다.
박동재를 만나기에 앞서서 시간 여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정유리를 만나기 전에 마침 전세혁과 연락이 닿아, 잠깐 만날 약속을 잡아 둔 것도 있었고.
그를 만난 곳은 역 근처도, 그의 아지트도 아닌 새로운 장소였다.
처음 주소를 안내받고는 여기에도 건물이 있나 싶어 왔는데, 사람 없는 갈대밭이었다.
몇 명 죽여서 버려 두어도 냄새가 안 나면 전혀 모를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강후를 만난 전세혁이 먼저 악수를 청하며 운을 뗐다.
“장소가 좀 특이하죠?”
“아뇨. 오히려 저는 편합니다. 적어도 주변 시선으로부터는 자유롭잖아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만족합니다.”
“아까 잠깐 전화로 나눴던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어갔으면 해서 말입니다.”
전세혁이 말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클립스에 관련된 건이었다.
박동재에게 전해 들은 대로, 전세혁은 이클립스를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히 이클립스에서 전세혁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집요하리만치 괴롭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강후와 어울리느라 잠시 본분(?)에 소홀했을 뿐, 원래 그가 진심이었던 일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이클립스의 악당들을 심판하는 일.
여기에 강후도 함께 섞여, 칼춤을 시원하게 출 요량이었다.
목적은 확실했다.
대외적으로 걸어줄 수 있는 명분은 당연하게도 정의구현.
조금 깊이 들어가면, 전세혁과의 친분을 강화하는 숨은 목적이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순흑의 구도자’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래저래 한 번은 각 잡고, 제대로 하고 가야 할 푸닥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