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투사의 긍지 (2)
* * *
이야기를 좀 더 나누면서, 강후는 강복화의 기억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사실 그녀가 계약한 성좌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어쨌든 뜨끔했던 강후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표적이 되어 뒷조사라도 당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 자신의 감각을 재조정해야 된다.
강복화는 마스터 K처럼, 손녀에게 변화의 계기를 준 강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고 가는 차 한 잔 속에서 피어오른 이야기꽃에 호기심이 잔뜩 담긴 상태였다.
“이클립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아마 다들 그 소식에 대해서 놀란 점이 많았을 거예요.”
“말씀 중에 잠깐 방향이 바뀌어서 죄송합니다만.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공손한 자세로 대화에 임하는 강복화의 모습에 무게감을 살짝 덜어내려 했지만.
강후의 제안을 강복화는 자애로운 미소와 더불어 아주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아요. 제 철칙이에요. 모든 손님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의를 지키려고 해요.”
“할머니!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뭐가 되는…….”
“유리야. 쉿?”
강복화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곧바로 정유리에 꽂혔다. 이내 조용해지는 정유리.
이 집의 서열은 아무래도 강복화, 정유리, 마스터 K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물론 좋은 의미로의 얘기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함께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겠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에 대한 답을 이어갔다.
“알겠습니다.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이클립스 소식이 꽤 많이 알려진 것 같더군요.”
“워낙 전방위적으로 미움을 많이 산 조직이잖아요? 정의구현 소식은 다들 열광하죠.”
강복화의 반응은 작금의 이클립스를 대하는 일반인 혹은 헌터들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름값이 생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강복화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강후는 살짝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너무 부산스럽게 군다는 딱 그런 눈치?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주제넘은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오해는 하지 않고 들었으면 해요.”
“말씀하세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신강후 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죠?”
“누구까지라고 제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제법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압니다.”
“가장 강후 님에게 관심 없다고 생각하는 곳을 조심하세요. 가질 법한데 조용한 건, 그만큼 많은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무심한 듯, 툭 뱉은 그녀의 말이 강후의 머릿속에 꽤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놓고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낸 곳은 많다. 안 좋은 쪽으로는 이클립스나 까쉬마르 같은 길드다.
좋은 쪽으로는 이예린의 청안, 김수경의 용병단, 이현석의 심연 등이 있을 터.
그중에 정화 길드는 없었다.
국내 소식에는 누구보다 민감한 정화 길드는 아직까지도 강후에게 어떤 관심을 보인 바가 없다.
물론 차고 넘치는 정화 길드의 인재풀에서 강후가 썩 대단치 않은 헌터처럼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강복화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충분히 해 볼 법한 생각이기도 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늙어서 그런지, 주제넘은 걱정이 참 많아요.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요, 강후 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다시 생각을 다듬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럼 일단 아이템에 대한 얘기부터 할까요? 유리도 할머니랑 얘기했던 아이템 좀 볼까?”
“그렇게 하시죠.”
“좋아요, 할머니! 근데 그거 들어왔어요?”
“어렵게 구했다, 이 할미가. 쿠바까지 가서 구해 왔어. 이 정도면 할아버지보다 훨씬 낫지?”
“고마워요,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훨씬 좋아요!”
“그래놓고 너, 할아버지 앞에 가서는 이 말 그대로 뒤집어서 말한다며?”
“헉,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떠본 건데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우리 유리…….”
손녀와 할머니 사이에 오가는 즐거운 만담 속에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유리는 시크릿 룸 내부의 구조를 잘 아는 듯, 강복화보다 성큼성큼 더 앞장서 나갔고.
강복화는 강후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잠깐 정유리에게 쏠렸던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유리를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바깥양반이나 저나, 바쁠 때는 너무 바쁘다 보니…….”
“막 크게 챙긴 것은 없습니다만…….”
정유리가 자신에 대해서 포장을 잘해 준 걸까. 챙겨 줬다고 하기엔 가진 관심이 많진 않았다.
그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왔을 때, 몇 번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녀의 의지를 믿고, 오는 연락만 받아 줬었다.
“할머니로서가 아니라, 같은 헌터로서 정말 재능이 높은 아이예요. 강후 님과도 호흡이 잘 맞을 겁니다.”
“저도 그건 동의합니다.”
전에 정유리와 합을 맞춰 본 기억이 있는 강후였다. 확실히 그녀도 기본 실력이 좋다.
박동재와는 다른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공간 이동에 제약이 거의 없어, 자신만큼이나 치고빠지는 전투에 능하다.
즉, 기동전과 게릴라전을 염두에 둔다면 정유리와의 팀플레이도 꽤 괜찮았다.
“해외에서 생각보다 많은 길드가 강후 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요. 들어 본 적 없죠?”
“국내 소식도 사실 다 챙겨 듣지 못하는 편이라.”
“일본 쪽에 갈 일이 있으면 조심하세요.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 모두 포함해서 꽤 관심이 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곧 안영호가 있는 일본으로 갈 예정인 강후에게는 살짝, 생각이 깊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녀가 되도 않는 허풍을 칠 리는 없고, 신뢰 있는 정보를 어딘가에서 얻었을 것이다.
해외에 다양한 판매 루트가 있으니, 정보 역시 비슷한 루트가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게 강복화를 따라서 들어간 시크릿 룸 안의 또 다른 시크릿 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아이템이 보관되어 있었다.
습도와 온도까지 세밀하게 체크되며 관리되는 것이 일반적인 보관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각각의 아이템마다 출처가 적혀 있었다. 대여 중인 물품에는 대여라고도 적혀 있었다.
대여 같은 경우는 일단 강복화가 일부의 보증금을 주고 아이템을 가지고 온 뒤.
팔리면 잔액을 원주인에게 지불하고, 자신의 이득분만큼 차액을 갖는 식이다.
보증금이 보통은 아이템 단가의 20% 수준으로 책정이 된다.
즉, 대여해 줄 중개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판매구조인 것이다.
그만큼 강복화가 상계(商界)에서 얼마만큼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흉갑 위주로 아이템을 살폈다.
현재 착용 중인 아수라의 혜안은 5등급 아이템으로 체력 50만 올려 주는 무난한 아이템이었다.
2등급으로 갈아치울 돈은 충분히 있는 만큼, 쓸만한 녀석을 찾고 싶었다.
“쓸만한 특수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찾는다면, 이쪽 로즈골드 라인이 좋아요.”
강복화가 진열대를 따라서 앞면에 쭉 코팅되어 있는 로즈골드 색깔의 테를 가리켰다.
그녀의 안내대로 라인에 있는 흉갑 아이템을 살피니, 과연 쓸만한 옵션을 가진 녀석들이 많았다.
“잠시 혼자 집중해서 봐도?”
“물론이죠. 그동안 유리와 거래를 좀 진행해야겠어요.”
“네.”
손녀여도 거래는 확실하게 하는 듯했다. 정유리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했고.
잠시 강복화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강후가 흉갑을 쭉 훑었다.
어떤 아이템이 별로인지 찾기보다, 어떤 것이 덜 매력적인지 생각해야 할 기분 좋은 고민이었다.
‘유청화가 운영하던 마켓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VIP 마켓에서도 마찬가지고.’
두 마켓을 합쳐놓은 것보다 시크릿 룸에서 본 아이템의 가치가 훨씬 높은 듯했다.
물론 고가의 아이템을 모아놨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달리 생각하면, 지금 이 방에 있는 아이템의 가치 총합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5조? 10조?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후가 흉갑을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랐던 부분은 스탯보다는 ‘안정성’이었다.
암살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마침 그런 아이템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마켓이었으면 보지도 못했을 옵션이었다.
* * *
거래는 바로 진행됐다.
가격은 에누리 없이 1,000억 원.
등급에 맞춰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정가이기도 했다.
정유리도 강후도, 그리고 강복화도 흥정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흥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서로의 가치 평가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 마치 쿨한 거래처럼 구매를 결정하고, 바로 대금을 치르는 모양이 됐다.
일반적인 마켓의 풍경을 생각하면,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흐름의 거래였다.
“바로 착용해 보시겠어요? 피팅룸은 저쪽에. 촉감도 꼼꼼하게 체크해 보시고요.”
돈을 입금받은 강복화가 피팅룸을 안내했다.
촉감 얘기를 해달라는 것은 아이템의 촉감이 별로일 경우, 추가로 신경을 써 주겠다는 뜻이다.
아이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안감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숙련공의 손길이 필요해지는데, 그런 인력쯤은 내부적으로 충분히 갖고 있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온 강후가 바로 아수라의 흉갑을 벗고, 새로운 흉갑 아이템을 착용했다.
【투사의 긍지 - 흉갑】
【등급 : 2등급】
【민첩 +350】
【항마 +50】
【맷집 +50】
【수호 – 즉사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상을 1회 방어한 후, 해당 능력은 소멸됩니다.】
‘수호 때문에 사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강후는 처음부터 이 옵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사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상이라는 것은 보통 심장을 관통당하는 일격을 말한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면 조건이야 많겠지만, 직관적인 의미로 가면 한 단어로 축약이 가능했다.
원 코인.
게임에서 목숨 하나를 상징하는 단어다.
강후는 수호의 무게를 그쯤으로 보고 있었다.
1천억 원에 목숨 하나를 살 수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허무하게 기회를 날린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강후에게는 보험이 여러 개 있었다.
이를테면 순간이동 능력도 일종의 생명보험인 셈이다. 유사시에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니까.
‘촉감은 좋네. 가슴에 착 감기는 느낌이 잘 맞는 속옷을 입은 느낌이군.’
그렇게 만족스럽게 착용을 마치고 피팅룸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빠드드득!
시크릿 룸 밖의, 정확히는 다른 방으로 생각되는 위치에서 뭔가가 튀겨지는(?) 소리가 났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강후가 강복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호호. 나쁜 마음을 먹은 손님이 VIP 룸에서 아이템을 훔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네요. 공간 이동 스킬을 완전히 차단하는 결계가 있거든요.”
“…….”
타고난 장사꾼 아니랄까 봐, 그녀의 대비는 치밀했다. 질이 나쁜 좀도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