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투사의 긍지 (1)
* * *
그 시각.
“뭐야, 이거?”
빈센트가 히든 스킬 알림을 보고는 멈췄다.
그는 방금까지 심판의 지옥 공략에 참여한 암살자 목록을 보고, 그중 하나를 쫓고 있었다.
제법 가까운 곳까지 그를 찾아왔지만, 스킬 알림을 보고 미련 없이 멈춰 선 것이다.
택시를 타고서 멀어지는 헌터를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광기의 흡혈.
어떤 형태로 생각해 봐도 흡혈에 관련된 방향에 특화된 헌터가 얻었을 게 분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흡혈을 주 능력으로 삼는 헌터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히든 스킬을 얻을 정도면 그쪽이 주력이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실력자를 골라내면, 열 손가락이 충분히 남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누군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빈센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백일참/흑월참 스킬보다 타깃을 좁히기가 훨씬 더 좋은 히든 스킬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하던 조사를 계속하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기약이 없었다.
생각보다 암살자 목록의 인원도 많았고, 무엇보다 하나하나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차라리 용병 없이 공략한 던전이었다면 정화 길드 안에서 잡아내면 그만일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외부 인원까지 전부 조사해야 해서 마침 힘이 빠지던 차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흡혈에 더 관심이 많은 걸 감사히 여기라고.”
빈센트가 연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 방금까지의 미련도 같이 날렸다.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면 흡혈이 더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았다.
아울러 이번 흡혈 히든 스킬의 소유자는 특정이 쉬워서 서두르지 않으면 경쟁자가 늘어날 듯했다.
그건 질색이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녀석을 죽이고 히든 스킬을 빼앗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에 있을 암살계 히든 스킬의 소유자는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와도 된다.
빈센트 자신이 못 찾았을 정도면, 이후 장시환이나 채관형도 쉽게 찾을 순 없을 테니까.
빈센트가 바로 엘리자베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연결되자마자 일방적인 용건을 남겼다.
“엘. 루마니아로 놀러 가자.”
* * *
강후는 정유리를 만나기 위해서 부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선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금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정유리의 연락이었는데, 할머니를 보러 마침 부산에 와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려 주지 않았지만, 부산 여행을 며칠 할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VIP 마켓의 VVIP 자격도 있으니, 같이 구경도 하자는 참기 힘든 유혹도 함께였다.
마침 괜찮은 아이템 매물을 찾으려던 강후 입장에선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KTX를 타고 자리에 앉기 무섭게 박동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후는 보안을 위해 차단 부스로 들어가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어, 동재야.”
- 형. 명가 길드 쪽으로부터 공식 확인받았어. 미스테리 던전 공략에 같이 참여하자고 하네.
“다른 조건은?”
- 딱히 없어. 오히려 형에게 공식적으로 ‘옵저버’ 자격을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지.
“기본적인 지원은 다 해 주신다는 얘기네.”
- 그렇지. 형은 몸만 오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날짜는?”
- 곧? 지금 초기화 대기 중인 던전 하나가 있는데, 알다시피 딱 정해진 시간에 초기화가 되지는 않잖아?
“준비되면 바로 얘기해 줘. 6시간 안으로 커버할 수 있으니까.”
- 알겠어, 형! 준비되는 대로 바로 연락할게!
“고생했다.”
- 고생은 무슨. 열심히 형 팔아먹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
마지막 말의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게 전화를 끊었다.
사실 던전 공략이라고 하면 이현석 쪽으로도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강후는 손에 쥔 기회보다는 쉽게 닿기 힘든 기회부터 먼저 누리고 싶었다.
이현석의 던전은 언제든지 그의 배려로 갈 수 있지만, 미스테리 던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만 한다. 잡은 기회는 놓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히 맞고.
강후는 막간을 이용해 전세혁과도 짧게 전화 통화를 마치고는 정유리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뭐랄까.
의미 있는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를 만나는 것은 왠지 마음이 설렜다.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에 있는, 세상 밝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적어도 하얀색으로 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
“오빠, 여기!”
“먼저 와 있었네.”
“당연하지! 오라고 한 사람이 기다려야지, 찾아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야겠어?”
부산역에 도착한 강후는 내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유리를 만났다.
가까워지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 초이스가 꽤 좋았다.
‘늘었군. 벌써 두 개나.’
강후는 전에 없던 성좌 정보 두 개가 정유리에게 늘어난 것을 보고는 감탄했다.
박동재도 그렇고 성장의 속도가 상당히 좋다. 미래가 바뀐 혜택을 톡톡히 보는 중이다.
물론 본인들은 미래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부 아울러 볼 수 있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바람부터 쐴래, 아니면 마켓부터 갈래?”
“바람부터 쐬자. 머리가 좀 아팠던 참이기도 하고.”
강후가 살짝 지끈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살짝 시간차를 두고 후폭풍이 오는 느낌이다.
김신령의 소환수들과 싸운 시간 내내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솔라키움이나 각신환에 아예 손도 대지 않았으니, 고스란히 몸에 피로가 누적됐을 터.
“그럼 맛집부터 갈래? 돼지국밥집, 내가 잘 아는 데 있는데!”
“좋지.”
“가자, 오빠! 오늘은 내가 전부 쏜다!”
덥석 손을 잡고서는 신나게 걷기 시작하는 정유리.
그녀의 손을 강후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연인의 떨리는 손잡기라기보다는 기분이 좋아진 어린아이의 흥에 겨운 손잡기 같은 느낌.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는데, 강후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해서, 호감이라는 감정도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일 터다. 그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 남자라면 충분히 느낄 법한 그럼 감정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정유리를 따라서 부산 시내 투어를 시작했다.
해영 길드가 욕을 바가지로 먹기는 해도, 부산의 패권을 꽉 쥐고 있는 덕분에 치안은 좋았다.
짧지만 재밌는 시간이었다.
번화가에 붐비는 사람들 틈새에서 느끼는 체온도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일반인과 접점을 만들 일이 없던 그동안의 행보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렇게 한나절의 데이트를 마치고 마켓으로 향하는 길.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정유리와 함께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쉬네, 진짜.”
“그동안 던전만 다녔나?”
“응, 맞아! 쉬지 않고 달렸어. 오빠도 그랬지?”
“나도 항상 바쁜 편에 속하지. 그나저나 솔플? 아니면 팀플?”
“그건 비밀! 근데 아무 생각 없이 머릿수만 늘려서 가는 건 질색이라, 웬만하면 최적화는 해!”
말을 듣고 보니, 정유리도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저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성장 속도를 극대화하려면 더더욱.
“그나저나 이쪽에 거래가 많았나? VVIP가 되려면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마켓의 VVIP가 되는 것은 백화점과 형태가 유사하다.
씀씀이가 커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다.
하지만 정유리는 현실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스터 K의 지원을 많이 받은 걸까?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고 나왔다.
“궁금해?”
“궁금하지.”
“우리 외할머니가 마켓 주인이니까?”
“…….”
그 말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존재의 정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강복화. 그녀가 정유리의 외할머니였던 것이다. 동시에 마스터 K의 부인이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 일대를 꽉 잡고 있는 큰손. 할머니는 경상권의 상계를 잡은 큰손.
양쪽 모두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정유리는 그런 두 사람의 손녀다.
“나도 이번에 살 아이템이 있어서 왔어! 오빠도 괜찮은 거 있나 골라 봐. 할머니가 안목이 좋으셔.”
“이건 정말 의외군.”
“오빠니까 말해 주는 거야. 어지간해서는 말 안 해. 어차피 오빠 입이 무거운 건 내가 잘 아니까.”
“믿어 주니 고맙네.”
“고마우니 믿는 거지. 호호.”
어느덧 도착한 마켓 앞은 방문한 헌터들로 붐비고 있었다.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입장할 수 있는 곳이 강복화의 VIP 마켓이었지만.
강후는 정유리 덕분에 절차 없이 하이패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하는 길도 공개된 일반 루트가 아닌, VVIP 전용 라운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보안 요원과 몇 번 마주쳤지만, 역시 별다른 제지 없이 금방 지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VVIP 라운지에서도 별도로 만들어진 시크릿 룸으로 직행하게 됐다.
이곳은 마켓의 총 관리자인 강복화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이동할 수 없는 루트였다.
그렇게 시크릿 룸의 앞에 도착하자 두 남녀가 정유리를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있는 강후에게는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당연한 반응이다.
둘의 구성은 마치 마스터 K의 곁을 지키는 문형서, 황보혜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게 맞다. 강복화 정도의 인물이라면 누군가에게 노려질 확률도 매우 높아지니까.
강후가 먼저 말했다.
“필요한 절차가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요.”
호위 특성상,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일.
강후의 말에 왼쪽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어가시죠. 전부 저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것 같군요.”
자신만만한 남자의 반응에 성좌 정보를 훑어보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좌 중 하나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딱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지만, 그것으로도 배짱의 이유는 충분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를 강복화를 위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충성심을 가진 듯했다.
덕분에 별도로 무기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이, 시크릿 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강후는 그간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했던 VIP 마켓의 총 관리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이……!”
“아이고, 우리 유리. 그새 얼굴이 왜 이렇게 탔어?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이 됐는지 알겠네!”
“많이 까매졌죠?”
“더 건강해 보이긴 하는데, 이러다가 다음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아 걱정이네.”
“어차피 또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아시잖아요, 저 피부 엄청 하얀 거!”
“알지! 그래도 과도하게 누적되면 아예 살색과 살성이 다 변하니까 꼼꼼하게 체크하고.”
“알았어요, 할머니!”
강복화를 꼭 끌어안은 정유리의 모습은 할머니를 좋아하는 손녀의 사랑스러움, 그 정석이었다.
정유리를 대하는 강복화의 반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깊은 사랑이 묻어났다.
바로 그때.
손녀와의 포옹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강후를 쳐다본 강복화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전에 우리 마켓에 온 적 있죠? 기억이 나네요.”
“……?”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의외의 얘기가 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