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왜곡 각성 (1)
어쨌든 그렇게 랜덤으로 확보한 스탯들은 각각 마나 1, 민첩 5였다.
마나에 관련된 안내가 떴을 때, 강후가 흠칫 놀랐다.
마나가 50이 넘어가게 되면, 야만의 시대 효과를 보지 못하게 돼서다.
그렇게 되면 강후가 짜 놓은 마나 활용 플랜이 꼬이게 되는 만큼 경계해야 했다.
1밖에 안 올랐으니, 아직 50까지는 29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비열한 성직자 성좌를 통해서 이렇게 살인 스탯을 얻을 일이 생길 거고.
그때마다 확률이라고는 해도 마나가 자꾸 오르는 우연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았다.
그런 냄새(?)가 풍기면 성좌와의 계약을 끊어낼 방법도 진지하게 고민할 생각이기는 하다.
그렇게 잔챙이들과 꼬인 전투를 갈무리하고 난 뒤.
강후는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죽은 놈들 입장에서야 황당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겠지만.
강후에게는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특별한 일상이었을 뿐이었다. 놈들의 수준이 딱 그랬다.
* * *
탁 트인 공터.
전투로 살짝 달아올랐던 체온도 식힐 겸, 잠시 바람을 쐬고 있던 와중에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안영호였다.
“어, 영호야.”
- 형님. 일단 리스트업은 다 됐어요. 완벽하게 정리 끝났습니다!
“그래? 내가 몇 시간 전에 본 뉴스는 오히려 전면전이 격화됐다고 들었는데?”
- 상황이 아직 정리되지 않기는 했는데요. 형님을 지원할 준비는 끝난 상태입니다.
“내가 요청한 대로 된 건가?”
- 네. 전부 형님이 요청하신 것에 맞도록 길드에서 배려해 주셨어요.
“역시 리코우 길드네.”
강후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던전이 리스트업 됐다면, 일본에선 암흑기 위주의 파밍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언데드 특성의 던전으로 요청했기 때문이다. 리코우 길드가 배려를 많이 해 줬다.
“영호야.”
- 네, 형님.
“혹시 아키마야 타카시, 그 헌터와 만날 기회를 주선해 줄 수 있을까?”
화제를 돌렸다.
이왕 타카시와 인연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은 김에 리코우 길드의 인맥을 활용하고 싶었다.
사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타카시와 접점을 만들 방법이 거의 없었다.
워낙 외부 활동을 잘 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남을 추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 타카시를……요?
안영호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안영호가 보인 반응이 대다수 일본인 헌터가 타카시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워낙 별종에 괴짜, 히키코모리 인식이 박혀 있다 보니, 곱게 보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응. 좀 만나 보고 싶은데. 힘들어?”
- 아, 아닙니다, 형님. 가능하죠.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고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네.”
- 아……. 그게 아무래도 살갑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라서요. 길드의 옵저버니까?
“조심스럽기는 하겠네.”
- 그렇죠. 하지만 형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해내겠습니다. 가능해요!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던 안영호가 이내 원래의 텐션을 되찾고서는 힘 주어 말했다.
강후도 안영호나 리코우 길드에 무리가 될 수 있는 부탁임을 알면서도 했다.
그만큼 타카시와 인맥을 만드는 작업에 욕심이 났다.
그는 열세 개의 별의 구성원이다. 동시에 가장 소속감과 연대감이 낮은 구성원이다.
그와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를 열세 개의 별에서부터 이탈시킬 수도 있다.
그를 빼낸다는 것은 단순히 적의 규모가 하나 줄어드는 계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하나 줄고, 나는 하나가 늘어나는 셈이니까. 실질적으로는 격차가 두 배가 줄어드는 형태다.
“고맙다, 영호야.”
- 형님, 조만간입니다! 소강상태로만 들어가도 충분하게 형님을 모실 수 있을 듯해요.
“그래. 기다릴게.”
- 정말 금방입니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타카시 님 건도 말씀드리고요!
“그래, 부탁해.”
안영호와의 통화가 끝났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안영호는 참 의미가 깊은 인연이었다. 우연이 만든 인연이기도 하고.
그때 그 바에 없었더라면. 안영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이런 혜택도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타카시와 인연을 만들 방법도 떠올리지 못했겠지.
이래저래 나비효과라는 말을 새삼 더 실감하게 되는 강후였다.
안영호의 전화를 끊은 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으로부터의 온 연락이었다.
바로 김신령의 연락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빨리 연락이 왔다.
“예?”
- 잠깐 통화 가능할까?
“물론입니다.”
살짝 일정이 붕 뜨는 상황이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연락이 왔다. 물론 무슨 내용인지는 아직 모른다.
- 오늘 포항으로 들어왔어.
“포항에도 별장이 있으십니까?”
- 별장까진 아니고 내 개인 저택이 있긴 하지. 훈련장까지 있고 좀 크기는 하지만?
김신령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은근한 자랑이 담겨 있었다.
별장도 아니지만 훈련장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것이다. 속뜻을 잘 읽어야 한다.
“그렇군요.”
- 울릉도에서 얼마 전에 만났을 때의 얘기 기억하지? 파괴된 무기에 관련된 얘기 말이야.
“물론입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신령의 소환수 훈련에 도움을 주면, 그만한 보답을 파괴된 무기로 하겠다는 제안.
서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기에 윈-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 한 가지, 강후가 세운 전제가 있기는 했다.
소환수의 훈련에 도움을 주더라도, 히든 스킬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말이다.
히든 스킬은 입이 무겁거나, 관계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앞에서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일전에 문형서 앞에서 히든 스킬을 썼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쓴 쪽에 가까웠다.
검은 그림자는 그 정도로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대여서다.
- 괜찮으면 최대한 빨리 올 수 있겠어? 이왕이면 할 수 있을 때, 학습을 시키고 싶은데.
“음…….”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일정상으로는 지금 당장 포항에 가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다. 남는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덥석 제안을 받으면, 그림이 좋지 않다.
피차 서로 바쁜 척을 하는 것이 좋다.
기다림과 시간, 그것이 상대에 대한 가치 평가가 되기도 하니까.
- 서둘러 주면 그만큼 내가 사례는 할게. 출장비로 일단 1억 원. 어때?
김신령의 성격이 일단 뭘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서둘러서 추진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보통 저런 성격은 모든 상황을 자기 뜻대로 끌고 가고, 통제하고 싶어한다.
좋게 말하면 주도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처럼 당근을 듬뿍 뿌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 좋아. 오는 대로 골드바로 줄게. 딱, 그 가치를 할 만한 크기로 만들어 둔 녀석들이 있거든.
“주소만 주십쇼. 그러면 알아서 가겠습니다.”
- 좋아. 고마워.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사실 감사 인사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다. 받을 게 있기에, 주려고 가는 것이니까.
다만 김신령의 반응을 보니, 일단 자신을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맞는 듯했다.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저자세는 보통 그 사람의 가치가 높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아마 지난번의 시험이 그녀에게 꽤 의미 있는 어필이 되었던 듯했다. 강후로서는 잘된 일이다.
* * *
포항으로 향하는 KTX 안.
알아서 움직이는 기차는 강후에게 잠깐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교통수단이라도 안전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네.’
문득 떠오른 생각은 대한민국의 각지로 이어져 있는 KTX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 속 이 ‘빌어먹을 세계관’은 종말을 향해서 질주하는 듯한, 내일이 없는 그런 세상이지만.
이 세계에도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은 있었다. 바로 공적 교통수단을 테러하지 않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KTX다.
물론 암묵적인 룰일 뿐, 어떠한 구속력도 없어서 룰이 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헌터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이 룰은 어지간해서는 깨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장을 언급하면 꼭 이름이 나오는 이클립스도 KTX는 테러를 하지 않는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이런 공적 교통수단이 사라지면, 피차 서로가 불편해진다.
그만큼 배치되는 안전 인력이 많은 부분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KTX 운행을 관리하는 철도 공사가 암묵의 룰만 믿고 손을 놓고 있는 형태는 절대 아니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KTX나 항공편은 문제가 좀 덜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할 때, 안전 장비가 없는 자가용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헌터들이 웃돈을 줘서라도 안전 리무진, 안전 택시를 이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방으로 향하는 국도 대부분은 범죄 조직, 혹은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길드와 연결되어 있고.
그들이 악행의 먹잇감으로 삼는 타깃이 바로 힘없는 자들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안전 리무진이나 안전 택시는 잘못 건드리면, 자신들의 희생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자가용 같은 것은 냅다 트럭이든 뭐든 해서 박아버리면 그만이다.
한편, 헌터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해외 소식은 흥미로웠다.
얼마 전에 정문 제약의 제1 연구소를 공격했던 다국적 용병대가 해체했다는 소식.
이에 이어지는 후속 보도였는데 중국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 아편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만큼, 마약에 대한 무관용 원칙으로 유명했다.
최근 헌터들의 마약 남용이 심해지자, 결국은 제대로 칼을 빼든 듯했다.
물론 이 정도로 하얀 전쟁이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국내 문제이기도 하고.
* * *
강후는 포항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버스를 갈아타고, 김신령의 저택으로 향했다.
포항은 타 지역에 비해 안정화되어 있어, 지나치게 치안에 대한 걱정을 하진 않아도 됐다.
주소를 따라서 도착한 김신령의 집은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여기에는 저택이라는 표현보다, 성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보안 시설도 정말 많았다.
가드는 몇 명 보이지 않았지만, 보안 구조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였다.
게다가 이미 외벽 여기저기에는 일부러 지우지 않은 듯한 핏자국이 상당히 있었다.
아마 한 번 안을 털어보겠다고 접근했다가 비명횡사한 좀도둑 헌터들의 ‘생전’ 흔적일 것이다.
그때.
쿠구구구.
저택의 대문은 열리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김신령은 지난번처럼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의 얼굴 그대로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뭔가 들려 있었는데, 한 손으로도 격발이 가능한 마탄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정교한 제작이 필요하고 마력을 응축하는 과정에서 화력의 불안정성이 야기되는 탓에 시중에서는 구매하기 힘들었다.
그런 희귀품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