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잔챙이 (2)
* * *
대전역 앞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이예린을 보며 강후가 말했다.
“요즘은 대전역 일대가 조용하네요? 안정화가 많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흑사자가 요즘 조용해요. 이클립스는 괜히 저희랑 꼬이기 싫어서 일부러 무시하는 편이고요.”
“청안의 위상이 달라졌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이클립스가 신경 쓸 게 많아졌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외부적으로 신경 쓸 일이 늘었잖아요?”
그녀의 말에 강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후를 척살 리스트에 올린 것은 이클립스의 수많은 일거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 공격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는 이클립스는 여기저기서 많은 충돌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권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아서 기존에 기득권을 붙잡고 있는 세력을 내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강동현이 관심을 가지는 지역은 보통 패권을 움켜쥔 조직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무혈입성보다는 치열한 교전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당연하게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희생자와 관련된 사람들이 고스란히 적이 됐다.
어쩔 수 없이 쌓게 되는 업보를 이클립스는 수시로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아예 관계가 나쁜 청안과는 속 시끄러워질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타세요. 안전 리무진이에요.”
“감사합니다.”
이예린의 배려 덕분에 안전하게 리무진을 타고 청안 빌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차 안에선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다만 중간에 한 번, 이예린이 진지하게 건넨 질문이 있기는 했다.
“서연이와는 요즘도 종종 연락하세요?”
“얼마 전까지는 했었지만, 최근에는 없네요.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는 편이라.”
“그렇군요. 서연이가 정화 길드에 들어간 이후로는 도통 소식이 없어서요.”
“그렇습니까?”
“네. 개인 메시지도 확인을 전혀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요. 번호가 바뀐 건 아닌 거 같은데.”
사람이 연락이 안 되는 일이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 비약할 것까지는 없지만.
하필이면 정화 길드에 들어간 다음의 연락 두절이라 강후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안영호라던가 정유리의 건을 생각하면 안 좋은 생각부터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냉정하게 말해서 한서연이 정화 길드가 욕심을 낼 만큼 아주 뛰어난 헌터는 아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다.
“위성 길드에서 스카우트가 된 거니까. 어찌 본다면 적응기가 좀 오래 걸릴지도요.”
강후가 무겁게 가라앉던 분위기를 풀었다.
적응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어쨌든 국내의 명실상부한 1위 길드로서 요구받는 품격이나 조건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해어화 길드 소속으로 익숙해졌던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떨쳐낼 시간도 필요할 터.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고 믿었다. 그녀는 꼼꼼한 사람이니까. 큰 실수는 안 할 것이다.
“죄송해요. 너무 사적인 얘기를 주절거렸네요. 강후 씨와 관련된 이야기도 아닌데.”
“아주 무관한 얘기도 아니니까요. 친한 언니로서 하는 걱정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이예린은 이런 인간적인 부분에서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용병단장으로서 완벽하게 비즈니스만 추구한다고 하기에는 인간적인 면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과 죽이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타협과 절충, 회유를 잘하는 사람이다.
* * *
청안 빌딩에 도착한 강후는 이예린의 안내 아래, 최근에 새롭게 만들어진 방에서 얘기를 나눴다.
손님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VIP 룸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해서 살폈더니, 마석에 연동된 결계가 끊임없이 활성화되며 치유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은 어디에서든 적용된다. 헌터의 문명 세계에도 마찬가지다.
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눅눅해져 있던 몸에 생기가 확 불어 넣어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죠, 이 방?”
“돈이 많이 깨졌겠네요.”
“시범적으로 VIP 룸만 이렇게 구성했는데, 이젠 청안 빌딩 전체를 바꿀 거예요.”
“훈련 시설까지?”
“물론이죠. 저희 청안 용병단의 차별화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을 생각이에요.”
“꽤 매력적이겠네요.”
“그렇죠? 이런 구조면 훈련량도 평소에 비해서 최소 2배 이상 늘리는 것이 가능해요.”
강후는 청안 빌딩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럴 재력이 그녀에게 있음에 놀랐다.
청안 용병단은 규모로만 판단하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소중대로 나누면 중형쯤 된다.
하지만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으려면, 대형 용병단 이상의 자본력은 필수였다.
즉, 그녀의 의뢰 수완이 상당하다는 얘기가 된다.
청안 용병단의 실력이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력이 압도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고.
아마 의뢰를 통한 수수료나 별도의 커미션으로 챙기는 비용이 상당할 터다.
그녀가 거래하는 의뢰꾼이 자신 한 명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말이다.
“일단 해외 얘기를 할까요.”
강후가 화제를 돌렸다.
근황 확인은 이쯤이면 됐고, 오늘의 핵심 이슈는 바로 해외 의뢰에 대한 얘기였기에.
“사실 매력적인, 돈이 많이 되는 제안은 보통 두 나라에서 들어와요. 얼추 짐작은 가시죠?”
“중국. 러시아.”
“맞아요. 땅덩어리가 넓은 것은 둘째치고. 사실 길드 간의 전투나 전쟁이 활발한 곳이라서 그래요.”
“그만큼 차지하거나 빼앗고 싶은 이권이 많아서겠죠. 헌터로서도 호기심이 많이 가긴 합니다.”
강후가 긍정했다.
중국과 러시아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던전이 상당히 많다.
심판의 지옥 같은 초대형 규모의 레이드 던전도 상당수 존재한다.
완벽한 대외비에 부쳐지고 있지만,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던전도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는 설정. 하지만 원작자로서 떠올린 ‘무의식’ 중에는 있는 기억이기에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강후 씨가 싫다고 하셔서 완전하게 제외할게요. 중국, 러시아 쪽에서의 의뢰 수주는 거부.”
“우회 형태의 의뢰도 전부 차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확실히 중국이나 러시아에 관련된 의뢰가 한 번 꼬이면 걷잡을 수 없죠.”
“재수 없으면 카르텔과 카르텔의 대립 한복판에 던져지는 경우도 있더군요. 본인은 모르고.”
“그러니까요. 운영의 묘가 많이 필요하다 보니, 저도 중개자로서 썩 내키지 않긴 해요.”
이예린이 웃었다.
립서비스성 발언이기는 했다.
그녀의 수완은 많은 헌터가 이미 인정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내키지 않는 의뢰가 있을 리가.
강후도 그녀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 일부러 편드는 발언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나라를 제외하면 어떤 나라에서 의뢰를 받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대신 조건을 좀 달죠.”
“말씀해 보세요.”
“이왕이면 던전 탐색이나 공략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미들 보스나 메인 보스 몬스터가 많을수록 우선순위를 올릴 겁니다.”
“잠시만요.”
“네.”
“혹시 보스 위주의 공략을 선호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사적인 호기심이라기보다, 클라이언트 유치에 도움이 될 듯해서요.”
“경험 쌓기 좋아서, 라는 이유를 댄다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질 것 같은가요?”
정확한 이유를 말하자면.
강탈할 스킬이 많아지는 조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예린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줄 수는 없으니, 적당히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전리품에 관심이 많다?”
“그것도 맞네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리품 = 스킬’이라는 공식으로 대체한다면 말이다. 꽤 들어맞는 말이다.
“알겠어요. 그럼 그 점을 집중적으로 어필하면서 의뢰를 받아볼게요.”
“주제넘게 조건을 계속 걸고 있긴 한데, 이왕이면 가까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요.”
“알겠어요. 요즘 동남아 쪽에서도 국외 의뢰가 활발해요. 제 인맥을 믿어보세요.”
“안 그래도 늘 믿고 있습니다.”
강후가 주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 이유다. 이예린의 수완을 믿고 그녀의 실력을 믿는다.
대안으로 김수경 용병단도 있지만, 확실히 이예린의 청안 용병단에 비해선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이후로도 강후는 그녀와 생각보다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얻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국내 정세에 관련한 정보를 세심하게 들었다.
물론 그만한 정보료를 먼저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정된 어떤 가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진 정보의 가치와 의미를 높여 주었다.
강후도 알고 있는 뻔한 정보도 있었지만, 전혀 몰랐던 정보도 있었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까로나 길드가 정화 길드 내의 기밀을 탈취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소식이었다.
까로나 길드는 러시아에서 까쉬마르 길드 다음가는 길드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원작에서도 이름만 딱 한 번 언급된 길드인 만큼, 기밀을 탈취하려던 계획의 배경이 궁금했다.
그 배경이 과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일까, 반대일까,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
어쨌든 흥미로운 정보들을 잔뜩 수집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해외의 각 국가에서 주로 들어오는 의뢰의 형태와 현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의뢰가 확보되기만 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 의뢰도 꽤 있었다.
솔직히 기대가 많이 됐다. 모험과 도전에 대한 욕구가 자극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그녀와 2시간에 가까운 긴 미팅을 마치고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할 즈음.
이예린이 대화 내내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던 화제를 꺼냈다.
“청안 빌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클립스의 저격수 헌터들이 있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었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예린 님을 노리나 보죠?”
“아뇨.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아서 몇 번 직접 대주려고 나갔는데 안 쏘더라고요?”
일부러 저격을 유도해 봤다는 얘기다. 그것도 다 자신이 있어 시도를 해 본 거겠지.
“그러면.”
“우리 고객 중 누군가를 노리는 게 틀림없거든요. 근데 강후 씨가 마침 척살 명단에 있으니까.”
“제가 정리하죠.”
“네?”
“어차피 이클립스와 척을 진 마당에 잔챙이 몇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고요.”
“안전 리무진으로 모실 수 있어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아뇨. 한 번 짚고 갈 때는 됐습니다. 이클립스에 경고를 해 줄 때도 됐고.”
강후는 밖에 있다는 저격수들이 자신을 노리든 말든 상관없이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다만 정황상, 자신을 노릴 가능성이 상당히 커 보였다.
이예린의 주요 고객 중에 이클립스와 척을 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예린도 오랜 갈등 관계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오히려 무뎌진 축에 속했다.
이참에 손이나 풀 요량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예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안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지 않은 건 배려입니까? 아니면 의도적인 방치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