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잔챙이 (1)
* * *
스핏파이어 길드의 세 사람과는 이야기가 잘 마무리됐다.
골드 카드를 보여 준 순간부터 그들은 완벽한 저자세가 됐다.
오히려 강후에게 나중에 마스터를 만나면 잘 얘기를 해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
그도 그럴 것이 골드 카드의 존재로 이미 길드 마스터의 VIP나 다름없는 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만큼…….
바짝 엎드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예 강후를 상당한 레벨의 실력자라고 믿었다.
담보로 받은 주황색 마석과 별개로 투르보에게 전리품으로 얻은 주황색 마석 3개도 확보가 됐다.
그리고 버프 스킬 강화용 부적 하나까지 가질 수 있었다.
박동재는 스핏파이어 길드의 3인이 떠나고 난 뒤, 강후에게 마석 전부를 내밀었다.
그러자 강후가 물었다.
“이건 왜?”
“왜긴 왜? 형이 고생해 얻은 거니까 형이 가져가야지. 내 소유권은 없어.”
“약속했잖아? 경험치는 내가 몰아서 먹고, 전리품은 다 네가 갖는 걸로.”
“이건 보스 몬스터 공략이 아니잖아.”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지.”
“아니. 이건 별개야. 괜히 양보할 생각하지 마. 안 받으면 버린다!”
박동재의 뜻은 완고해 보였다.
강후도 그의 생각을 읽고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이번에 스핏파이어 길드원에게 도움을 준 전투는 앞서 공략과 별개로 봐 준 모양이다.
덕분에 강후는 담보로 받았었던 마석과 합쳐서 총 600억 원어치의 마석을 확보하게 됐다.
그 대신.
박동재에게 전리품으로 얻은 버프 부적을 주었다.
어차피 자기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버프를 강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는 버프 스킬을 강화하는 것인 만큼.
박동재에게 맞춤형이고, 자신에게는 하나도 접점이 없었다. 양보해서 아까울 게 전혀 없는 셈.
“고마워, 형. 잘 쓸게.”
“나도 마찬가지다. 잘 쓰지.”
“그나저나 형. 도대체 언제 스핏파이어 길드에서 그런 VIP 대우를 받았어?”
앞서 놀랐던 3인 만큼이나 박동재도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골드 카드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고마운 은인에게 주는 일종의 증표와 같다.
그 말은 즉, 스핏파이어 길드의 마스터가 강후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얘기인데.
도무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박동재의 머리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럴 일이 있었어. 슬픈 얘기라서 내용까지 말해 주고 싶진 않지만.”
강후가 답을 얼버무렸다.
박민성의 일을 생각하면, 그의 부모였던 가니에르와 멜리사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꼭 부모가 돼 본 적이 없더라도, 감정에 공감할 수는 있는 것이다.
괜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강후에게 슬픈 감정은 꽤 불쾌한 감정이기도 했다.
뭐랄까.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절대 느껴서는 안 될, 금기 같은 감정이랄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아. 형은 빨리 보석이 되어야 할 사람이야.”
“너는 이미 보석이다.”
“……그건 아니고.”
“어쨌든 복귀하자. 더 이상 진행할 루트도 없고, 이젠 돌아갈 시간인 것 같군.”
“휴식?”
“응. 휴식이다.”
“후아. 드디어……. 언제 제대로 쉬나 했네. 어후.”
강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동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강후와 계속 호흡을 맞추면서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동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후는 더 열정적이었고, 계속 뜨겁게 달아오르는 용광로 같았다.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한 적 없는 사람과 함께 하니, 자신도 그렇게 변했다.
왠지 힘들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미안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지금까지 악으로 깡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력에 한계가 왔다. 미칠 듯한 두통이 몰려오는 것이다.
“확률이 50%이긴 한데. 순간이동으로 돌아가 보자고.”
“나 이거, 전부터 궁금했어. 형이 날 오쇼 용병단으로부터 구해줬던 게 순간이동이잖아?”
“그렇지.”
“100%는 완전 성공이라는 거고. 그럼 50%는 무슨 뜻이야? 몸이 반만 옮겨질 수도 있다는?”
박동재의 기발한(?) 발상에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확률의 문제는 명확히 접근하지 않으면, 해석이 전혀 달라지니까.
박동재의 말과 같은 공식이었다면 강후는 100%인 경우가 아니면 순간이동을 안 썼을 것이다.
그렇잖은가. 몸이 반쪽만 이동되면 즉사인데,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할 리 없다.
“몸은 완전한 이동이 기준으로 잡혀 있어. 완전한 순간이동이 성공하냐 실패하냐의 문제야.”
“아, 간단하구나.”
“응. 순간이동 스킬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디테일하지가 않아.”
원작의 힘이다.
지나치게 디테일하진 않았던 덕분에 순간이동에 변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원작자인 자신이 괴짜였으면 박동재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케이, 이해했어. 형이 가진 스킬은 하나하나가 다 신기하다 보니, 호기심이 매번 생기네.”
“궁금하면 언제든 물어봐. 영업 비밀만 빼고는 알려주지.”
“자, 그럼 이제 운빨을 믿고 순간이동 하는 거야?”
“어. 실패하면 걸어서 돌아가는 거다. 성공하면 한나절 이상을 절약하는 거고.”
“신이시여, 제발…….”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시늉을 하는 박동재의 어깨를 살짝 붙잡은 뒤.
강후가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바로 순간이동 스킬을 썼다.
【순간 이동하겠습니까?】
【2인 이상의 순간 이동은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정확히 50%입니다.】
경고는 무시했다.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다. 글자에 정신 팔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파앗!
순간이동이 이뤄졌다.
* * *
순간이동이 성공해, 단숨에 시작점으로 돌아온 직후. 강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민수현을 구할 때도 50%인데 성공했고. 진효영과 장소를 바꿀 때도 성공했는데. 확률대로 가면 이번에는 무조건 실패 아닌가?’
숫자 개념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50%의 확률인데 3연속 성공.
뽑기 게임에서 이런 경우가 나왔으면 다들 예상할 것이다. 곧 3연속 실패도 하겠구나, 하고.
‘당분간 제물을 좀 바쳐야겠군.’
별 이슈 없으면, 이후 3일 동안은 매번 대기 시간이 초기화될 때마다 써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혼자 쓰면 100%니까, 함께 해 줄 사람 하나가 필요하긴 할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던전 공략은 마무리됐다. 스킬 풍년이라는 말로 모든 설명이 끝난 공략이었다.
입구에서 다른 헌터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니, 카니스 길드는 3차 레이드 중이라고 했다.
재밌어 보였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정예 헌터들이 모여 호흡을 맞추니,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멋졌다.
그래서 한편으론 기대가 됐다.
명가 길드의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미스테리 던전 공략.
그들은 이미 소수 정예로 정평이 나 있는 헌터들인 만큼, 실력으로 의심할 것은 없었다.
* * *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와 박동재가 가볍게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시원하게 속을 달랬다.
강후는 술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장단 정도는 맞춰줄 줄 알았다.
벤치에 앉아 버터구이 오징어에 곁들여 먹는 맥주 한 캔은 정말 맛있었다.
박동재는 이게 자신의 루틴이라고 했다. 살아서 돌아온 자신에게 주는 생명수가 맥주라는 것이다.
루틴은 헌터마다 다양한데, 박동재에게는 맥주 한 잔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인 모양.
강후는 징크스, 루틴 같은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객관적인 생각을 흐리게 하기도 하고.
캔을 반 정도쯤 비웠을까?
지친 몸의 눅눅함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기분 좋은 술기운이 살짝 올라올 즈음.
박동재가 말을 꺼냈다.
“형. 앞으로 조심해. 세혁이 형 이상으로 걱정되는 게 형이야. 점점 적이 많아지잖아.”
“어차피 여기저기 맛 좋은 떡에 손대려면, 결국 콩고물이 몸에 묻을 수밖에 없는 법이야.”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항상 네게 고맙게 생각해. 다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항상 경계하고 있으니까.”
“알았어. 아 참, 혹시 그거 알아? 조만간 세혁이 형이 이클립스 애들을 제대로 조진다 하더라고.”
“생각해 보니 세혁 씨가 그간 좀 조용했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세혁은 강후보다 더 이클립스와 악연이 깊은 헌터였다.
그가 강후와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것도 이클립스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상할 게 없는 행보였다.
오히려 자신이 한 말대로 그동안 조용했던 구석이 없잖았다.
그전까지 전세혁은 이클립스의 크고 작은 아지트를 찾아가 살육을 벌이기도 하는 등…….
강동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만 골라서 했었다.
하지만 워낙 전세혁이 강력하다 보니, 강동현이 쉽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직접 나서기에는 격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참에 전세혁과 같이 시원하게 칼춤이나 춰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순흑의 구도자가 내건 성좌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경호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클립스의 서열 8위, 행동대장 고경호. 능력 욕심이 나는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먹잇감이다.
“동재야.”
“어?”
“정보료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나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겠어. 호의는 거절하지 않겠지만.”
“그럼 나야 좋지? 걱정 마. 정말 중요한 정보는 형에게도 돈 받고 팔 거니까. 나, 호구는 아냐.”
“그럼 나야 좋고.”
“앞으로 블랙 네트워크에 더 투자를 늘릴 거야. 아니, 아예 올인해야지. 난 정보의 힘을 믿어.”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서 박동재가 중요한 키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계속 든다.
그리고 지금 이 관계는 강후에게 매우 편리한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다.
강후는 박동재와의 관계가 역전되거나 비틀리지 않도록, 잘 조율할 생각이었다.
박동재에게 지나친 저자세만 보이지 않으면 된다. 필요 이상의 과도한 감사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박동재는 항상 햇빛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있어 줄 것이다.
버퍼로서 박동재를 아끼는 감정과 전략적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감정의 분리.
절대로 쪼개어질 것 같지 않은 두 감정의 분리가 강후에게는 가능했다.
그것은 큰 장점이자, 그로 하여금 삭막하고 몰인정하게 만드는 단점이기도 했다.
물론 강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은 전부 자신의 것이니까.
놀랄 것도 없고,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다 자신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말지를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그로부터 2시간 후.
박동재와 헤어진 직후에 이예린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강후는 대전역에 와 있었다.
순간이동에 재사용 대기가 걸려 있는 탓에 새벽 KTX를 타고 역에 막 도착한 상황.
오늘 그녀와 대화의 주제로 운을 띄워 둔 화제는 바로 ‘해외 의뢰’였다.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이루어진, 확장성이 큰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