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스킬 풍년 (1)
‘상대도 저를 죽여야 합니까?’
【나와 순흑의 위선자는 서로 앙숙이다. 그런 이유로 녀석의 계약자에게도 같은 시험이 주어진다.】
‘그럼 상대도 저를 알고 있다는 겁니까?’
【후후. 날 너무 하찮게 보는구나.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녀석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너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 상대의 정보를 알려 주십시오. 시험에 임하는 가장 기초적인 정보일 테니까요.’
【시험에 응하겠느냐?】
‘당연한 말씀을.’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성좌도 아니고 순흑의 구도자의 힘을 더 얻어내는 시험이다. 포기할 이유가 없다.
강후의 동의에 이내 순흑의 구도자가 타깃이 될 대상의 얼굴과 이름 정보를 표시했다.
【계약자 방성훈】
‘가명이었나. 하긴, 그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익숙한 얼굴의 등장.
성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은 분명 시스템으로 등록된, 고칠 수 없는 진짜 이름일 터.
방성훈이라는 이름의 상대는 현재 이클립스의 서열 8위, 고경호였다.
그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것은 고경호가 이클립스에서 강동현 다음으로 잘 알려진 얼굴이라서다.
잘 알려졌다는 뜻은 같은 말로 가장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뜻도 된다.
고경호는 이클립스가 일으킨 다수의 납치, 밀수에 가장 지분이 많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헌터들은 고경호를 강동현의 ‘행동대장’으로도 부른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에.
원작의 흐름대로면, 지금 레벨은 300대 후반일 터다.
‘일단은 인지만 해 두자. 어차피 고경호 같은 놈을 죽일 명분은 충분해. 하지만 승패는 좀 다르지.’
신중히 접근하기로 했다.
고경호의 수준도 수준이거니와, 녀석을 단독으로 노리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설계를 해 놓고, 놈을 칠 때를 봐야 한다. 호위와 마주칠 각오도 해야 하고.
물론 동기부여는 확실했다.
이클립스 자체가 악인들의 집단이기도 하기에 그 자체로 정의 구현도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순흑의 구도자의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순흑의 위선자 성좌도 강탈할 테니까.
【서두를 건 없다. 네가 내킬 때 하거라. 그저 난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지켜볼 것이다.】
‘확실히 기억했습니다.’
이클립스의 서열 8위, 고경호.
성좌로부터 직접 ‘살인 의뢰’를 받은 첫 번째 헌터가 생겼다. 그것도 쉽지 않은 상대로 말이다.
* * *
이후.
박동재의 양보 덕분에 강후는 가짜 신부로부터 꽤 많은 아이템을 쏠쏠하게 챙길 수 있었다.
앞서 그가 죽인 헌터로부터 취한 아이템까지 전부 포함해서 빼앗은 것이기에 더 가치가 높았다.
전부 현금화하면 어림짐작으로도 350억 원은 충분히 확보될 느낌이었다.
그중 강후가 착용할 만한 아이템은 없었기에, 전부 던전을 나서는 대로 처분하기로 했다.
한데 박동재가 아이템들 몇 개에 관심이 있었는지, 자기에게 전부 팔아줄 수 없냐고 제안했다.
강후의 입장에선 마켓에 파나, 박동재에게 파나 현금화 측면에서는 매한가지인 상황.
그래서 전부 박동재에게 인계했다. 값은 전자기기 사용이 가능해지는 던전 밖에서 치르기로 하고.
박동재는 그중 몇 개의 아이템은 곧바로 착용했다.
마나가 대폭 늘어나서인지 상당히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강후에게 마나 아이템은 의미가 없지만, 박동재 같은 버퍼에게는 가장 꿀 같은 옵션들이다.
‘이번 아이템 판매 대금까지 합치면 얼추 1,750억 원쯤은 될 느낌인데.’
제법 차오른 잔고를 보니, 욕심이 났다. 조금만 더 모으면 2,000억 원의 잔고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2등급 아이템 2개를 족히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부위에 투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더 많이 모아서 1등급의 아이템 구매를 노려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이다.
선택의 문제다.
전신의 모든 아이템의 2등급화를 노리느냐, 아니면 확실한 무기 하나를 노리느냐.
어느덧 해 보게 되는 행복한 고민에 강후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결론이 빨리 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들 보스 몬스터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던 강후와 박동재는 드디어 타깃을 찾을 수 있었다.
루페스라는 이름의 녀석은 전신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구성된 몬스터였다.
마치 석상이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다른 표현으로는 ‘돌 골렘’이라는 수식도 어울릴 듯했다.
“형. 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어때? 단검으로는 상처도 못 낼 것 같은데?”
“실망이군, 박동재.”
“응? 아! 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까다로울 것 같아 그러지! 형을 무시한 건 절대 아니야!”
“그럼 더 실망인데.”
“헉…….”
“바위는 부수는 게 아니야. 부서지게 하는 거지.”
묘한 미소를 짓는 강후의 모습에 박동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동재의 반응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강후도 일부러 장난스럽게 반응을 해 본 것이기도 했다.
헌터들이 기피하는 몬스터 종류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이 바로 석상류였다.
기본적으로 물리 공격이 잘 먹혀들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레벨이나 수준이 낮은 경우에는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루페스 같이 보스 몬스터류로 분류되는 경우에는 얘기가 전혀 달랐다.
뚫어도 안 뚫리고, 찔러도 끄떡도 없다. 터지거나 부서지게 하는 일?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박동재가 괜히 힘 빼지 말고 다른 녀석을 찾자는 제안을 꺼낸 것이다.
“믿어봐. 충분히 거리 두고 보조만 해 줘. 나머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알겠어.”
“간다.”
강후가 바로 루페스에게 달려들었다.
접근을 인지한 루페스가 강후를 노려보고는 이내 양팔을 가드하듯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시잉!
황야의 전략가로부터 받은 특전 중 하나인 ‘직관’이 발동했다.
일전에 증선락과 다국적 용병대를 상대할 때도 쏠쏠하게 재미를 봤던 직관이었다.
당시 저격수의 저격을 미리 인지하고 피할 수 있어, 단 한 번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지금, 루페스에게도 적용됐다.
녀석이 힘주어서 펀치를 내뻗기 전, 타깃을 지정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정조준이다.
‘플랜 A보다 더 빠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군.’
나름의 전략이 있던 강후가 루페스의 특징을 인지하고는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후웅!
순식간에 공간을 가르며 날아드는 루페스의 펀치를 가속을 활용한 이동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따로 신속 회피나 횡 이동 스킬을 쓴 것이 아니라, 몸을 직접 움직여 피한 것이다.
가속 버프에 이기적 탐닉까지 걸려있는 지금은, 이런 형태의 초고속 회피 기동이 가능했다.
그만큼 몸에 잔뜩 무게가 실리게 되지만, 전투 초반에는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압박이었다.
루페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약이 오른 듯한 느낌의 눈빛이었다.
전투에 돌입하면서 주변 지형지물의 상태를 인지한 강후는 곧바로 유인에 들어갔다.
루페스의 필살기성 펀치 공격을 계속 피하고, 또 피하는 한편.
환영술을 활용해 환영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바로바로 해체시켜 연막 효과를 유발했다.
그러다 보니 외곽 시야가 계속 희뿌연 연막에 가려지고, 조금 더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루페스는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는 몸의 움직임이 굼떴다.
그래서 강후를 노린 공격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바짝 약이 올라 더 적극적으로 덮쳤다.
회피, 회피, 또 회피.
닿을 듯 닿지 않는 강후의 몸은 루페스의 화를 머리끝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귓가를 아른거리던 모기를 눈앞에서 보고도 잡지 못할 때의 느낌이랄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냥에 열이 바짝 오른 루페스가 아예 강후를 덮칠 요량으로 몸을 날렸다.
강후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몸뚱이로 깔아뭉개 죽이는 것. 루페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연막에 가려져 있던 시야에 하필이면 낭떠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전투에 돌입한 순간부터 환영술의 연막을 이용해 끊임없이 가려왔던 이동 경로의 끝이었다.
치치치치잇!
가까스로 두 다리 끝을 지면에 붙인 루페스가 어떻게든 몸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를 맞춰서 횡 이동으로 뒤를 잡은 강후가 루페스에게 전력으로 충돌해 버렸다.
쿠웅!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중심을 통제할 수 없었던 루페스는 약간의 충격에도 그대로 밀려버렸다.
남은 것은 발 디딜 곳 없는 허공.
그렇게 루페스는 한참 높은 낭떠러지 위에서 추락했고, 볼 것도 없이 즉사했다.
강후의 말대로 스스로 부서지게 된 셈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자살’이기도 했다.
그렇게 죽은 루페스에게서 강탈할 스킬의 목록이 출력됐고, 선택은 바로 이루어졌다.
【석화】
【스킬 숙련도 : Lv. Max】
【초당 10의 마나를 소모해, 신체 전면부를 단단한 돌의 형태로 일시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단, 변화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이동 속도가 기존의 10% 수준으로 저하됩니다.】
【맷집 스탯에 비례해 추가 내구력을 획득할 수 있으며, 기본 물리 내성 15%를 가집니다.】
세부적인 툴팁을 살펴보니, 보호 결계보다 내구력이 훨씬 더 뛰어난 것으로 판단됐다.
게다가 이동 속도가 제한될 뿐, 그렇다고 해서 공간 이동 스킬이 억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신속 회피라던가 도약 같은 스킬은 얼마든지 연계 가능한 것이다.
방어력이 대폭 높아진 신체 전반을 방패처럼 쓰면서, 작정하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도 가능하다.
‘암살자가 대놓고 탱킹도 해 볼 수 있다고? 정말…… 내가 생각해도 끔찍한 혼종이군.’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기분이 정말 좋아서 내는 웃음이기도 했다.
강후가 생각하는 암살자의 핵심 키워드는 신출귀몰, 변화무쌍이었다.
그런 점에서 카멜레온처럼 다른 직업군의 장점만 쏙 빼 오는 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 큰 강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상식과 예측을 깨고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택지이며, 상대에게 더욱 파괴적이다.
“형, 미안해! 너무 늦게 빠져서 경험치 독식이 안 됐네, 형이.”
“괜찮아. 전략 공유를 안 했으니까 당연한 거야. 통보해 줄 시간이 좀 부족했네.”
“진짜 대박이다! 형이니까 이런 유인도 하지, 나였으면 진즉 낭떠러지 끝에서 오줌 지렸을 거야.”
“이런 녀석들은 몸을 제어하고 제동하는 게 어려운 타입이지. 그래서 발동이 걸리면 멈추기가 쉽지 않아.”
“피하자고 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야.”
“잘 봐 둬. 못 잡는 몬스터는 없어.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답은 반드시 나와.”
“리스펙트! 존경 그 자체!”
박동재가 강후를 향해 양쪽 손가락으로 엄지를 세워 보였다.
추락한 루페스에게 전리품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후로서는 스킬 ‘석화’를 얻은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였다.
앞으로 여러 가지 활용도로 석화 스킬을 사용할 일이 많을 듯했다. 전략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이후.
강후는 박동재와 함께 계속 전진하며, 추가로 미들 보스 몬스터 2마리를 더 사냥했다.
그렇게 추가한 스킬 2개 역시, 앞서 루페스에게 얻었던 스킬처럼 가치가 높은 스킬이었다.
【굳건한 중첩】
【생존 본능】
그랬다.
스킬 풍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