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자극 (1)
* * *
K와는 새로 무색 부적을 구할 수 있게 됐을 때,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지금은 ‘방출 가설’이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가설이었다.
그래서 강후도, K도 굳이 다른 가설을 세우고 도전해 보려는 생각은 보류했다.
떠나기 전, 강후는 K에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알아봐달라는 당부를 더했다.
재촉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영역에 있는 문제이기에 K에게 필요 이상의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강후는 박동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이동했다.
박동재가 명가 길드에서 라이센스를 대여받았다는 던전의 입구는 예상과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청주역 일대에 위치한 6층짜리 원룸형 건물 지하에 위치한 창고였다.
남들은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을 법한,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쓰레기장이었다.
물론 지하 창고를 이렇게 만들어 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설령 누군가 창고 안을 들여다보더라도, 안까지 들어올 생각은 못 하도록 말이다.
이런 곳에 던전 입구가 있다고 해서 상시 인력을 배치해 두는 것도 우습고 말이다.
그래서 세밀하게 CCTV를 설치해 두고, 내부와 외부를 위장하는 것으로 대신한 듯했다.
미리 와서 강후를 기다리고 있던 박동재가 강후와 마주치자마자 힘껏 양팔을 들며 인사했다.
“형! 보고 싶었소!”
“손만 들어. 달려오려고 각 잡지 말고.”
“형…… 내가 무슨 남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럴까 봐?”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그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
“하여간 리액션은 영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런 얘기 많이 들어. 그러니까 너도 알아서 적응해.”
“세혁이 형은 잘 받아주시던데, 아쉽네!”
“난 신강후라고.”
원작자의 성격이 그대로 덧씌워졌다면, 자신은 분명 리액션 부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독하리만치 신강후의 성격이 덧씌워져 있는 지금은 격한 감정 표현이 낯간지러웠다.
오글거려서 참을 수가 없는 느낌이랄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들이 있어도 외부로 내색하는 것이 영 어색한 그였다.
“버프 셔틀 진짜 힘드네. 완전히 갈리고 왔어. 목까지 다 쉬어 버렸네.”
박동재의 말대로 그의 목은 잔뜩 쉬어 있었다.
아마도 함께한 팀원들에게 남은 버프 시간, 구성 목록을 외치다 보니 남아나지 않은 거겠지.
박동재가 말을 덧붙였다.
“형이랑 할 때만큼 편한 플레이가 없네. 형 생각이 진짜 많이 났어.”
“나랑 하면 많이 편할 테니까.”
“맞아! 그래서 명가 길드에서 던전을 배려해 준다고 했을 때. 바로 형에게 전화한 거지.”
“전세혁 님이나 세영이는?”
“에이, 매일 붙어사는 동료들도 아니고 이럴 때는 개인플레이지. 항상 함께하는 건 아냐.”
자연스럽게 박동재의 성좌 정보를 스캔하던 강후가 살짝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묘한 표정의 변화를 감지한 박동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헉, 설마……. 두 사람한테 알려 주고 온 건 아니지?”
번지수 잘못 짚는 박동재였다.
강후는 박동재에게 추가된 성좌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전에 만났을 때는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메인 성좌로서 계약이 추가된 모양이다.
벌써 성좌를 하나 늘리다니.
잠재력이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성장 곡선이 생각보다 가팔랐다.
강후에 비한다면 상대 평가에서 떨어지지만, 일반적인 헌터의 측면에서 보면 급성장이었다.
【성체 숭배자】
【버프가 걸린 모든 대상에게 초당 0.5의 체력 회복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디버프가 걸린 아군에게 버프를 걸었을 경우, 해당 디버프 효과가 10% 감소됩니다.】
‘이 녀석 봐라, 은근슬쩍 힐러의 경계에도 발을 담그네. 버퍼가 체력까지 보조해?’
흥미로운 소식이다.
성체 숭배자 같은 성좌는 보통 힐러 계열의 헌터에게 붙기 마련일 텐데.
버퍼인 박동재에게 붙었다. 저 정도면 나름 실력 있는 힐러에게 붙어도 이상할 것 없는 성좌다.
물론 성좌가 계약자의 클래스만 보고 접근하지는 않는다.
계약자가 가진 능력의 확장성, 잠재력, 활용 능력 전반을 꼼꼼하게 검토하기는 한다.
성체 숭배자는 박동재의 가능성을 보고 올라탄 듯했다. 본격적으로 말이 달리기 전에 말이다.
‘원작의 내용대로라면 박동재는 지금 지하실에 갇혀 있었겠지. 하지만 미래가 바뀌었으니.’
원작과 달리 세상에 일찍 나온 박동재는 빠르게 자신의 잠재력을 터뜨리고 있다.
강후 자신이 쏘아 올린 나비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박동재가 자신을 믿고 따라 주고 있으니, 여러모로 윈-윈인 셈이었다.
“내가 왜 알려? 난 당사자가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야.”
“하긴……. 형은 그럴 것 같아. 부모님이 와서 물어도 비밀은 안 알려 줄 듯한 느낌.”
“정확히 봤군.”
“참! 형이 원한다면 차소혁, 그 사람의 동선 파악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도와줄까?”
반가운 제안이다.
그에게 민폐로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니고, 대가 없는 선의를 받는 쪽에 가깝다.
박동재에게는 목숨을 빚진 마음의 채무가 있는 만큼, 기꺼이 우러나서 하는 행동으로도 보였다.
“그럼 그 부분은 부탁을 좀 하지. 하여간 남매가 쌍으로 극성이네. 애초에 날 쫓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솔직히 난 이해 불가야.”
“이해하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마. 머리만 아파. 왜 이해를 해 주려고 해?”
“형을 괴롭히려고 하니까. 그게 짜증 나서 그렇지.”
“막으면 비키게 하면 되고, 죽이려고 하면 죽이면 될 뿐이야. 대응은 간단해.”
“…….”
덤덤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강후의 반응에 박동재가 잠시 할 말을 잃고, 강후를 응시했다.
확실히,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자신도 적이 되면, 언제든 가차 없이 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강후가 자신보다 레벨이 낮음에도 전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 선배 같았다.
가만히 있는 그 자체로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전세혁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박동재가 강후 앞에서는 유독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
“최종 브리핑만 정리 차원에서 한 번 더 하고 들어가자. 내용 숙지는 다 하고 오긴 했는데.”
“응. 그러면 일단 들어갈까? 어차피 바로 던전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그래. 여기는 열린 공간이니까 자체적으로 비밀이 유지되는 통로가 좋겠군.”
“오케이, 갑시다!”
* * *
던전 입장에 앞서 마무리 브리핑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박동재의 ‘블랙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왔다.
지금은 정보전의 세계다.
하지만 워낙 많은 세력이 등장하고, 이들이 취급하고 파생하는 정보가 나뉘게 되면서.
정보는 풍요롭되, 진짜 정보는 빈곤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온갖 가짜 정보, 뉴스가 판치게 되면서 실제 정보와 동떨어진 쓰레기 정보가 폭증한 것이다.
이는 강후가 직접 체감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정화 길드에 대해 알고 있는 선행 중에 7할은 조작된 선행이었다.
범죄 조직이 아닌데 범죄 조직의 탈을 씌워서, 그들을 토벌하고 정의구현을 주장한다거나.
정화 길드 내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유망주의 사인을 의로운 죽음으로 덧씌우곤 했다.
강후가 박동재를 만나기 직전에 스마트폰으로 봤던, 한 헌터의 죽음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정화 길드의 유망주 중에 하나였던 신희성이 죽었다는 것이다. 암살자 유망주 중 한 명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사인은 던전 공략 중에 뜻하지 않게 낭떠러지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생긴 추락사라고 했다.
다시 말해,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살자는 클래스의 특성상, 주변 지형지물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그렇기에 낭떠러지가 있는 곳에서 무리하게 기동했을 리 없었다. 인지를 못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이 새끼들, 설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최근에 히든 스킬을 얻은 헌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직업군을 암살자로 특정한 다음에 예상되는 후보자를 죽인 걸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열세 개의 별에는 타인의 히든 스킬에 집착하는 헌터가 하나 있으니까. 바로 빈센트 마이어다.
원작에서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헌터로 그려졌고, 비중은 가장 낮았던 존재이기도 하다.
부역자 엔딩 때문에 장시환이라는 인물 자체의 아이덴티티가 완전히 뒤집혀버린 지금.
빈센트 마이어, 그가 히든 스킬을 노리고 살인을 벌였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전혀 없었다.
장시환은 알고도 눈감아줄 수도 있고, 아예 모를 수도 있다. 가능성의 방향은 여러 갈래다.
어쨌든.
블랙 네트워크는 그런 가짜 정보를 걷어내고, 실질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루트였다.
박동재는 오래전부터 해 온 투자가 이제야 제대로 빛을 보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필요하면 강후에게 정보 공유를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도, 본인이 먼저 나서서 해 줬다.
혜택을 ‘받기만’ 하게 되는 강후의 입장에선 고마우면서도 정말 큰 힘이 되는 지원인 셈이었다.
박동재의 블랙 네트워크.
강후는 그것이 자신에게 부족한 정보전의 공백을 채워 줄 수 있는 최고의 패라고 믿었다.
이래저래 절대로 박동재를 놔줄 수 없는 이유가 확실해진 셈이다.
그를 제대로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이번 던전 공략에서의 어필은 더 중요할 듯했다.
* * *
브리핑과 대화를 끝내고.
통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던전에 진입한 강후가 사전 작업을 바로 끝냈다.
【이기적 탐닉】
【버프 스킬 지정 : 질주 본능】
전에 로슈에게서 얻은 버프 강화 스킬을 활용하는 작업이었다.
300%의 강화 대상으로 지정한 버프는 바로 박동재의 가속 버프 스킬인 ‘질주 본능’.
곧바로 진행된 작업이었기에 몸에 변화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음?”
그새 박동재가 걸어 줄 수 있는 모든 버프를 걸어 둔 상태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버프 타임이 비지 않게 버프를 거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전투 상황이 아닌 평시라면, 마나를 아끼는 차원에서 버프 스킬을 아끼는 버퍼도 많기 때문이다.
“버프 세팅 끝.”
“빠르네.”
“나 박동재야, 형.”
“좋아.”
강후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내심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이기적 탐닉을 가속 버프에다가 걸었으니, 평소 3배 이상으로 효율이 폭등할 터.
빠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그 효과를 보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가 있다.
자신이 처한 가속 상태에 몸과 눈, 감각이 확실히 적응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훨씬 더 가속된 몸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움직임과 변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저 몸만 빨라진 채.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며 부잡스럽게 허튼짓만 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가속으로 뒤섞인 시야와 감각의 오류 속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강후가 테스트 삼아, 가속에 도약으로 몸 한 번만 가볍게 띄워보기로 했다.
기본적인 움직임의 시작이다.
다음 순간.
“흣…… 으읏!”
발뒤꿈치를 들면서 몸을 살짝궁 띄우려던 강후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른 가속에 휘말린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기 압박을 제대로 받은 얼굴이 뭉개진 찐빵처럼 일그러질 만큼의 미친 가속이었다.
이기적 탐닉!
효과는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