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시술 (2)
* * *
한편 이예린은 의뢰 고객이었던 정문 제약 측으로부터 현장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후가 레드 키를 안전하게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용병대의 우두머리인 증선락의 추적을 뿌리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증선락의 손가락까지 절단했다고 한다. 반지 아이템을 잃은 것은 덤이다.
“성공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대장에게 한 방까지 먹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이예린이 혀를 내둘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본다는 말은 강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강후니까, 남들은 다 실패한 이 의뢰를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기대도 당연히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강력한 외력의 개입이 발생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증선락은 연구소 주변을 지키고 있던 일개 용병이 아니라, 그들의 수장이었다.
단언컨대 이예린은 자신이 증선락과 맞서 싸웠다면 몇 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레벨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스킬과 스탯의 격차. 여기에 경험의 격차까지 얹어지면, 극복하기 힘든 거대한 벽이 된다.
한데 강후가 이 상식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어느 누가 이 소식을 들어도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정문 제약 측에서는 이후에 강후를 통해서 다른 연구소의 보안 체크를 해 보고 싶다고도 했다.
연구소의 어느 방향이 뚫리기 좋은지, 또 방비가 허술한지를 점검해 보는 작업이다.
실력과 눈썰미가 좋은 헌터여야 이 의뢰가 의미가 있는데, 강후가 제격이라고 판단한 모양.
“자극 세게 오네…….”
이예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의뢰 수주와 안내에 뛰어난 중개자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한 명의 헌터이기도 했다.
강후의 눈부신 성장을 보면서, 부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가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처음 강후를 만났을 때의 레벨을 생각하면, 자신의 성장이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3자의 입장에서는 이예린의 성장도 무척 빨랐다.
하지만 이예린이 강후를 기준으로 상대평가를 하니, 한없이 느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제한을 풀어 버려?”
이예린이 강후에 관련된 파일에 끼워 두었던 메모지 하나를 뜯어냈다.
강후의 현재 수준을 고려해, 의뢰 최대 레벨을 350으로 적어놓은 메모였다.
즉, 레벨 350의 헌터에게 제안할 만한 의뢰까지를 상한선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것도 지금 강후의 레벨을 생각하면, 두 배 이상으로 높게 본 고평가였다.
그런데 이 제한도 의미가 없는 듯싶었다.
증선락의 추격까지 따돌렸을 정도면 레벨 400이면 될까? 아니, 그것도 낮다.
“그래, 풀자. 풀고 제안하면, 알아서 본인이 난이도에 맞게 수락하겠지. 제한 해제.”
꾸드득!
이예린이 구긴 메모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강후에게 제한은 의미 없다. 그리고 선택도 어차피 강후가 하니까 걱정할 것도 없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를 그녀가 재단하는 것 역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잖은가.
실패하지 않을까, 안 되지 않을까 했던 의뢰를 전부 성공시키는 강후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해외 의뢰도 슬슬 받아 봐야겠어. 중개료도 훨씬 비싸고, 매력적인 의뢰가 많으니까.”
이예린이 새로이 방향성을 정했다. 강후는 이제 자신에게 VIP 의뢰꾼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강후에게 매력 있고, 동시에 자신도 크게 수당을 챙길 수 있는 의뢰가 좋을 듯했다.
국내 용병 시장은 분명 한계가 있다. 강후의 활동 반경을 넓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나도 사람은 사람이군.”
강후는 꼬박 하루를 자고 난 후에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을 쳐놓고 잔 덕분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잤다. 그게 하루였다.
덕분에 창밖은 잠들기 전과 똑같았다.
스마트폰에 찍힌 날짜와 요일이 하루 뒤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한없이 가라앉고 부서질 것 같았던 몸이 말끔하게 회복된 것처럼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강후는 최고점과 최저점을 모두 경험한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지금까지는 몸이 이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어, 한때는 몸이 고통을 모르는 건가 싶었었다.
일부 수용 감각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괜한 걱정이었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자신의 몸이었다. 한없이 정직했다.
“기분이 묘하네.”
마치 폭발하듯 솟구치던 성욕을 일거에 해소하는 순간의 느낌, 딱 그 기분이 들었다.
몸을 극한까지 밀어 넣은 다음에 충분한 휴식으로 회복하니, 꽤 후련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변태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쾌감이면 자주 느껴도 환영이다. 그만큼 전장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했다는 뜻이니까.
“방전이었네.”
자는 동안 전화가 한 통도 안 와서 푹 잤다 싶었는데, 스마트폰을 보니 방전이었다.
언제부터 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잠든 지 얼마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던 모양.
충전기를 연결하고 스마트폰을 켜 보니, 가장 먼저 박동재에게서 온 연락이 보였다.
【형, 혹시 알아? 형을 노리는 사람 하나가 최근에 국내에 입국했어. 믿을 만한 정보야.】
【이름은 차소혁. ‘태양’ 소속 헌터고, 차소희의 친오빠. 블랙 네트워크를 통해 검증했고.】
내부자 정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상당히 깊은 곳에서 얻은 정보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쯤 되면 중위급 이상의 간부에 내부자가 있다는 뜻인데, 얼마나 공들인 결과물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강후가 그간 늘 아쉬웠던 것은 혼자서는 확보하는 과정에 한계가 있는 정보망이었다.
이예린도 의뢰 위주의 정보통에 가깝고, 국내 판도를 폭넓게 보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동재는 거시적인 부분에서는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어느 한 분야에서 세세하게, 깊게 파고든 정보에는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강후가 박동재의 쓰임새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버퍼로서도 가치가 높고, 정보통으로도 높다.
그런 박동재가 자신을 믿고 따르며, 꼼꼼하게 신경까지 써 주고 있으니 매우 만족스러웠다.
“차소혁.”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다.
애초에 원작에서 차소희는 강동현의 심복으로 그려졌지만, 비중 있게 다뤄진 헌터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친오빠까지 세심하게 다뤄졌을 리 만무하다.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강후의 삶을 살게 되면서, 차소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이 생기게 됐고.
그 과정에서 차소희가 죽으면서 새로운 악연이 파생됐다. 바로 혈연으로 엮인 악연이다.
죽은 여동생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이 틀림없는 상황.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당연히 피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끝날 때까진 집요하겠네.”
강후가 뻣뻣해진 목을 양옆으로 뚝뚝 풀어 주며, 박동재가 첨부한 추가 자료를 확인했다.
레벨은 350에서 400 사이. 대검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극딜형 스타일의 검사.
엄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암살자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콘셉트 Top 5에 속했다.
힘들지 않은 클래스가 있겠냐마는 저런 극딜형 검사에게는 한 방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서다.
일격필살을 가진 클래스는 상대적으로 버틸 능력이 떨어지는 암살자에게는 분명 상극이었다.
그때.
우우웅!
박동재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아니면 연락을 확인한 것을 알고 바로 전화를 한 건가 싶었다.
“응, 동재야.”
- 형! 내용 봤어?
“봤다. 정보 고마워.”
- 고맙긴 무슨. 어차피 정기적으로 수집하는 정보에 있는 거니까, 딱히 신경 쓴 것도 아냐!
“어쨌든.”
별거 아닌 척하는 게 너무 티가 나는 박동재의 반응이다.
저렇게 말할수록 역설적으로 많이 신경 쓴다는 얘기로 들어도 무방하다. 박동재 같은 성격이면.
- 형! 혹시 던전 갈 생각 있어? 나 이번에 명가 길드 쪽에서 던전 하나를 배려해 주셨거든!
“던전을 배려해줘?”
- 뭐, 들어갈 기회를 주시는 거지? 라이센스 대여라고 해도 되겠다. 그게 맞는 표현이겠네.
이게 인맥의 힘일까.
아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이 가치가 높은 사람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긴다.
던전 공략은 개인 소유의 던전이 적은 강후의 입장에서는 언제든 환영인 제안이다.
특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면 가치는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미들 보스, 메인 보스를 제거하기만 하면 확정적으로 스킬을 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재가 물어온 던전은 당연히 강후가 가 본 적이 없을 테니, 가기만 해도 이득이다.
“어떤 던전이지?”
- 여기는 좀 특이해. 정확하게는 오픈형 던전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입구를 안내받은 셈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바로 던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통로가 나온다는 거군.”
- 맞아! 그 통로의 끝에서 한 번 더 들어가야, 오픈형 던전으로 진입하는 거야.
“또 다른 특이점은?”
- 전 세계의 헌터가 모이는 곳이야. 아마 외국 헌터를 제법 많이 볼 수 있을 거야.
“대신 각자 활용한 통로로 거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 응. 우리가 들어간 통로가 A 통로고, 다른 헌터가 들어온 통로가 B 통로라고 하면. 우리가 B 통로를 이용해서 그쪽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거지.
“대충 구조는 알겠다.”
- 권장 레벨 300. 내부 관리 주체는 카니스라는 미국 길드인데, 메인 구역만 통제해.
“알았다. 원하는 날짜는?”
- 내일 밤 9시. 어때? 만날 장소는 전화 끝나는 대로 지도로 찍어서 보내줄게, 형.
“오케이. 내일 밤으로 하자. 그때 보자고.”
계획에 없던, 하지만 생각지 않은 이득이 될 것이 분명한 일정이 생겼다.
이현석이나 안영호에 관련된 건은 확보된 던전이니까 언제든 얻을 수 있는 기회지만.
이렇게 갑자기 생긴 기회는 다시 생길 일이 흔치 않다. 아예 없을 수도 있고.
다른 나라의 헌터와도 연결되는 던전. 호기심만큼이나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남은 시간.
하루를 꼬박 잔 탓에 더 짜내서 잘 잠도 없는 강후가 문득 떠올린 것은 헌터그램이었다.
AI가 추천해 주는 내용을 관성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나름 유명인의 헌터그램이다 보니, 이름을 입력하자마자 바로 상단에 떴다.
【Akiyama Takashi】
일본의 네임드 헌터 중 한 명인 아키야마 타카시.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된 일원이기도 하다.
타카시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수식어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다.
“변종.”
그런 이유로 세간의 인식은 썩 좋지 않았다. 헌터그램에서도 악플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
게다가 열세 개의 별도 타카시를 변종으로 생각하고,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원작의 내용을 보면, 늘 타카시는 열세 개의 별이 회의를 할 때 다른 짓을 많이 하곤 했다.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다섯 살 어린아이가 집중하지 못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이유로 타카시의 말과 행동은 대부분 신경 쓰지 않았다.
결정되는 사항이 있으면 통보를 하는 쪽에 가까웠고, 타카시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래도 유청화나 에밀리아가 타카시를 누나처럼 케어해 준 덕분에 아주 소외되진 않았다.
다만 채관형은 타카시를 싫어해서, 열세 개의 별에서 쫓아내자는 말도 대놓고 하곤 했다.
“사실 지금 그림만 놓고 보면, 열세 개의 별에서 가장 먼저 떼어놓을 수 있는 녀석이기도 한데.”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속감이 가장 떨어지는 타카시면, 어떻게든 마음을 흔들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안영호 건으로 일본에 갈 이슈도 있는 만큼, 꽤 괜찮은 시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쯤이면 열세 개의 별 중에 여덟이 뭉쳐 있을 시점이다. 아직 다섯은 남아 있는 상태.
놈들이 본격적으로 구성을 갖추기 전에, 그들 내부에 균열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조용히 독을 풀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