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춘천행 (2)
* * *
다음 날.
정확하게는 순간이동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왔을 그 무렵.
강후는 춘천 북쪽에 도착해 있었다. 정문 제약의 제1 연구소가 있는 위치였다.
물리적인 거리만 놓고 보면, 그라운드 제로도 생각보다 멀지 않은 위치이기도 했다.
한편 강후가 있는 곳으로부터 500m 정도 북쪽에 위치한 곳부터는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공적인 통제가 아니라, 용병들이 사적으로 진행하는 통제였다.
임의로 세운 팻말도 보였다. 위험 지역이므로 출입을 엄금한다는 내용이었다.
통제를 진행하는 주체로 보이는 이름을 팻말에 적어 넣었는데, 이름이 가관이었다.
[정의수호]
정의. 신물이 나는 단어다.
정의를 자꾸 운운할수록 역설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표적인 곳이 이클립스.
그들의 대표 슬로건은 두 개다.
하나는 익히 잘 알려진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를 쓸모있는 일꾼으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라진 정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이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다. 온갖 불의에 손을 대고 있으니, 어떻게든 그 색을 지워보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테러 조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심연이 나았다.
심연의 슬로건은 ‘진실된 믿음에는 진실로, 그릇된 신념에는 죽음으로’다.
이현석은 정화 길드에 맞선다고 해서 정의를 운운하거나, 강조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연구소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국적 용병대가 세운 팻말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는 박살 난 헌터 치안청의 차도 여럿 보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 용병대가 패악질을 부렸음에도 정화 길드나 헌터 뉴스에서 한 마디 없는 것을 보면.
무조건 정화 길드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99.9%라고 자신할 수 있다.
‘끝까지 최선은 다 해 봐야지.’
강후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이예린에게 경우에 따라 의뢰를 중간에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는 미리 해 뒀다.
그렇게 될 경우, 당연히 레드 키도 반납할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물론 실패할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한 보험은 확실하게 들어 둔 상태였다.
‘기공수가 문제인데…….’
강후는 연구소 주변을 지키는 용병들 중에 중국에서 건너온 ‘기공수’들을 가장 꺼렸다.
중국 쪽에서 조직적으로 육성된 클래스 중 하나인 기공수.
그들은 공간을 격변시키는 작업에 뛰어난 헌터들이다. 혹은 무형의 기를 다뤄 상대를 공격한다.
변수 창출이 탁월하기에 계산된 플레이를 즐기는 강후로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톡톡. 톡. 톡.
강후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현장 지도를 확인했다.
동선 최종 점검이었다.
눈을 감고, 상황을 그려본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내용은 매우 긴박하게 흘러간다. 여유 있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한 건 맞지만, 포기하기에는 의뢰 보상으로 걸려 있는 ‘각신환’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훗날 상용화되면 지금보다 가격이 10배는 더 뛰고, 헌터의 필수품이 된다.
지금 아직 상용화 전 단계일 때 활용할 수 있으면, 이 역시 변수 창출에 도움이 될 터다.
‘아무리 돈만 좇는 놈들이라고 해도 목숨 귀한 줄은 알겠지. 그래, 이 루트로 간다.’
최선의 경로를 선택한 강후가 곧바로 횡 이동과 함께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암살자는 어둠 속에 살고, 어둠을 먹고 산다.
날이 어두워진 것은 물론,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지금이.
접근하기에는 가장 좋을 시간이었다.
여기서 더 늦추기에는 언제 다국적 용병대가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만큼, 서둘러야 했다.
* * *
한편.
제1 연구소를 포위하고 있는 다국적 용병대의 대장들이 한곳에 모여 회합 중이었다.
각자 자기 휘하의 헌터들이 맡은 바와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정보를 교환했다.
“우리 쪽은 기존 포인트는 누락 없이 전부 장악을 끝냈고. 저격수들도 꼼꼼히 배치해 뒀다.”
“우리는 외곽 경계를 담당한 만큼,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던 헌터 일곱을 처리해서 정리를 마쳤지.”
“클라이언트에 계약 갱신을 요청하고 있고, 한 시간 내로 처리가 될 예정이라고 답변받았다.”
“음. 그럼 톱니바퀴는 거의 다 맞아떨어지는 분위기네. 계약 갱신만 되면 서쪽 게이트를 통해서 진입하면 되겠지?”
“그렇겠지. 서쪽 게이트는 이미 많이 무너진 상태니까. 저격수도 그쪽에 많이 붙여 둬서, 허투루 나올 생각도 못 할 거다.”
“어차피 내부 정보가 다 폐기되었더라도 상관없어. 사람의 머릿속에도 정보는 있는 거니까.”
다수(의) 용병단으로 이뤄진 용병대 전체를 이끌고 있는 남자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그의 이름은 증선락.
레벨 550의 기공수 헌터로 중국의 신수 길드의 간부이기도 했다.
신수 길드는 신투 길드의 위성 길드로 대외적인 이미지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편이었다.
신수 길드는 그간 법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 ‘악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단죄해 왔다.
민간인을 상대로 폭행을 한 번이라도 한 헌터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잡아서 죽이기도 했고.
중국 내에서 지명수배가 걸린 헌터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잡아서 ‘처단’하는 길드이기도 했다.
국가의 법 심판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한 규율에 맞춰 임의로 범죄자들을 처리하기에.
호불호의 영역에서 극명한 반응의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물렁한 법 집행에 염증을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의구현’을 반겼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조만간 한국 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될 자료는 정문 제약의 비리와 범죄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제약사에서 손 한번 댄 적 없는 마약 유통과 제작에 대한 혐의도 이미 세밀하게 날조된 상태였다.
판을 다 짜준 마당이니, 최선을 다해 뛰어 놀아 주는 것은 인지상정.
증선락은 클라이언트의 최종 계약 갱신이 이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입금이 끝나면, 정문 제1 연구소는 총공격 대상이 된다.
어지간한 헌터나 관계자는 모두 죽이고, 핵심 인력만 남길 생각이었다.
기억만 살아 있으면 되니, 어설프게 반항한다면 손발을 잘라 버릴 생각도 이미 끝내 뒀다.
바로 그때.
“침입자 발견! 남동쪽 ‘흑선’ 라인으로 들어온 헌터 하나가 빠르게 북서진 중!”
외부에서 접근하는 불청객의 등장을 알리는 경계 보고가 들렸다.
앞서 그렇게 나타났었던 헌터는 하나도 남김없이 저승행 급행열차를 탔건만.
아직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학습되지 않은 얼빠진 헌터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 얼뜨기 같은 놈이 온 모양이군.”
다들 경계 보고를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증선락도 마찬가지.
오히려 쏠쏠한 돈벌이의 기회로 여겼다. 헌터는 죽어도, 아이템은 현장에 남기 때문이다.
죽은 헌터의 아이템은 갖는 사람이 임자다. 당연히 여기에 있는 대장들에게 우선권이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괜히 현장 접근을 욕심내다가 죽은 헌터에게서 제법 재미를 본 상태였다.
한데 바로 그때.
“……?”
곳곳에 설치해 둔 CCTV 화면 속의 ‘침입자’의 움직임을 살피던 증선락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침입자의 위치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십수 미터를 단숨에 이동하는 도약 형태의 스킬 활용은 기본이고.
타깃이 될 만한 구조물이 있으면, 바로 횡 이동을 써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횡 이동에 은신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스킬 숙련도 최대를 찍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레벨 200 근방의 숙련된 암살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고.
타앙! 타앙!
시간차를 두고 마탄 저격수들의 저격이 이어졌다.
각각 은폐된 포인트에서 타깃을 노리기에 피하기가 가장 껄끄러운 견제이기도 했다.
실제로 연구소로의 접근을 시도했던 헌터 대부분이 ‘저격수 저지선’에서 거의 처리됐다.
그만큼 숙련된 저격수의 조용한 저격은 저승사자와 같았다.
오죽하면 헌터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자리 잡은 저격수가 가장 X 같다’는 말도 있을까.
“잠깐. 이거 뭐지?”
증선락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화면 속 침입자가 위치를 빠르게 갱신하며 이동하는 동안.
다들 어어? 하면서 놀라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면서 시간을 보냈다. 두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마탄 저격은 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발도 침입자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빗맞지도 않았다.
심지어 중간 지점에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요량으로 대기시켜 두었던 용병 무리도 피해를 입었다.
저격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물리적으로 침입자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 배치해 두었던 용병들.
하지만 그들은 암살자로 보이는 침입자가 펼친, 말도 안 되는 광역 공격에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갑자기 원형의 마법진 같은 것이 깔리더니, 공중에서 전류 폭풍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증선락도 이게 웬 어이없는 조합인가 싶을 정도의 스킬 연계였다.
장막을 깔고 완벽하게 은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 구조물을 끌고 와 방어벽으로 쓰는 것!
여기에 한술 더 떠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방어 결계까지 만들어내면서, 환영을 부려대기까지!
이 모든 것이 암살자 한 명으로부터 파생된 스킬 조합이었다. 보통 놈이 아닌 듯했다.
“X발, 이거 X 됐다. 예진빈! 길 뚫어! 어서!”
자신이 구축해 놓은 경계선을 과신한 나머지, 허를 제대로 찔려버린 증선락이 소리쳤다.
예진빈은 증선락과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다른 용병대의 대장으로 공간 활용 능력의 보유자였다.
그러자 예진빈이 바로 ‘초집중’ 상태에 들어가서는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길을 열었다.
이 스킬은 외부에서 쓰는 스킬이므로, 강후로부터 반경 15m 안에서 적용되는 다섯 번째 성좌 특전인 공간 이동 스킬 억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증선락이 강후에게서 1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거물 등판이군.’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성좌 정보만 봐도 레벨 500은 훌쩍 넘어갈 실력자가 등장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강후가 계속 도약과 가속을 섞어가며 이동하고 있었기에.
증선락도 후방으로 강하게 기를 방출해내며, 움직임에 속도를 붙였다. 나름의 자체 가속이었다.
‘기공수군.’
곧바로 증선락의 본질을 알아봤다. 레벨 높은 기공수라면 일대일로는 아예 상대가 안 된다.
게다가 여기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스킬을 극한까지 끌어다 쓴 덕분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후폭풍을 뒤로 유예하기는 했지만, 몸에 걸린 부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폭주하듯 마나를 끌어다 쓰면서 스킬을 사용한 탓에 몸 전체가 매우 무거워져 있었다.
그때.
스읏.
엄지 지문 쪽에 중지 손톱을 갖다 대는 증선락의 손가락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손가락에 묻은 뭔가를 튕겨 낼 때에나 할 법한, 두 손가락을 원형으로 만드는 동작!
강후가 다음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곧바로 보호 결계를 펼쳤다. 본능적인 방어 연계였다.
그리고.
타아앙!
파칭!
증선락이 손가락으로 튕겨낸 기공탄 한 방에 강후의 보호 결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
웬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