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춘천행 (1)
바로 풍뢰진.
예전부터 스킬 업그레이드를 할 기회가 온다고 치면, 1순위로 생각했던 스킬이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강후가 가진 스킬 중에서 유일하게 광역 공격이 가능한 스킬이라서다.
다만 스킬 업그레이드를 할 경우, 어떤 스킬이 될지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루어 짐작은 가능했다.
원작에서 짜두었던 스킬 설정의 흐름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업그레이드된 풍뢰진은 전류 폭풍이 부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인이 될 가능성이 컸다.
B 게임사의 모 게임에서 ‘사이오닉 스톰’이라고 부르는 그런 형태의 스킬 말이다.
“확실히 광역 공격 쪽에서 내가 부족하긴 하니까.”
냉정하게 스스로를 판단했다.
사실 암살자로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스킬을 가진 자체가 사기지만.
강후의 욕심은 늘 끝이 없었다.
올라운더가 되려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 있게 쓸 만한 스킬 하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거리 공격은 전광비도로 보조가 되고, 근거리 극딜은 대참수가 있다.
정신계 공격은 환각, 얕은 혼돈을 활용할 수 있고 자체 회복 역시 광란적 치유로 가능하다.
여차하면 전종두에게서 강탈한 성좌의 능력 중 하나인 생기 흡수를 쓸 수도 있다.
여기에 출혈 유지는 앞서 그루 길드와의 협력에서 증명했듯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황.
하지만 광역 공격 스킬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풍뢰진이 있기는 하나,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상대를 귀찮게 하는 쪽에 가까웠다.
던전에서도 하급 몬스터가 아니면, 따끔거리기나 할 법한 생채기가 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몰이 사냥을 할 수 있는 그림까지 나오면 완벽한데.”
직업적 특성상, 일대 다수의 전투는 암살자가 선호할 성향의 전투는 아니다.
스킬 전반의 메커니즘이 일대일에 치중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쓸만한 광역 스킬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몬스터를 한곳으로 모은 다음, 광역 스킬로 일망타진하는 그림도 가능하다고 봤다.
그루 길드와 진행했던 던전 공략에서 딱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았던가.
강후와 마진호가 몬스터를 좁은 영역으로 모았고, 마법사들이 그 위에 광역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 있는 스킬을 최대한 키워 두는 것도 방법이지. 적요석을 아껴 두길 잘했어.”
결심을 끝낸 강후가 풍뢰진을 업그레이드할 준비를 마쳤다.
스킬 강화가 아닌 점이 아주 살짝, 아쉽기는 했다.
던전에서 상당히 희박한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스킬 강화는 곧바로 스킬을 궁극기로 바꿔주니까.
하지만 적요석을 통한 스킬 업그레이드도 이에 준할 만큼의 변화는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여차해서 풍뢰진에 힘을 더 실어 주고 싶으면, 무정의 자객 성좌를 이용할 수도 있고.
방법이 다양한 만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곧바로 적요석 2개의 투자가 이뤄졌다.
두 차례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서인지 두 번째에는 스킬명까지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
【뇌격진】
【스킬 숙련도 : Lv. Max】
【반경 8m 안에서 시전자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강력한 전류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스킬입니다.
33% 확률로 ‘감전’ 효과가 유발되며, 대상의 항마 스탯에 따라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초당 10의 마나를 소모하며, 스킬의 최대 지속 시간은 8초입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0초.】
“뇌격진. 이름 좋네.”
풍뢰진이 바람과 전류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느낌이라면, 뇌격진은 콘셉트가 확실해 보였다.
실제로 타격 범위도 풍뢰진의 반경 5m에서 8m로 늘었다. 지름으로 따지면 6m가 늘어난 셈.
게다가 한 자릿수의 낮은 확률이었던 풍뢰진의 감전과 달리.
뇌격진은 그것보다 훨씬 향상된 감전 확률을 가졌다.
항마 스탯이 낮은 적에게는 추가적인 피해를 유발할 수도 있어, 전략적 옵션도 좋았다.
팀원들이 전류 폭풍에 휘말리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달리 걱정할 것도 없겠지.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강후가 마침 앞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나는 몬스터 무리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몬스터는 정말 좋은 샌드백이다. 거짓된 정보를 주지 않는다.
녀석들에게 뇌격진에 혈화를 연계해서 발동하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풀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몬스터의 수많은 핏방울과 살점이 모든 것을 말해 준 것이다.
광역 공격에 광역 폭발.
둘의 연계는 환상적이었다.
아름다웠다.
* * *
적당히 개인 훈련을 마치고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이예린의 연락이었다.
하얀 전쟁 관련 의뢰는 받지 않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둔 상태인데도 전화가 온 것을 보면.
다른 형태의 의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네, 신강후입니다.”
- 강후 씨. 살상과 관련이 없는 의뢰가 들어와서 연락드렸어요.
“정말 그런 겁니까?”
- 적어도 제가 생각한 흐름대로만 따라간다면요?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어요.
“조건부인 게 마음에 걸리네요.”
- 일단 들어보시겠어요?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들어 보죠.”
이예린의 장점은 끊임없이 의뢰를 ‘판다’는 것이다.
의뢰꾼이 특정 의뢰를 원치 않으면, 이를 우회할 수 있는 형태로 제안을 건넨다.
어떻게든 의뢰를 받게 하는 것이 그녀의 수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대에게 의뢰 수락을 강제한다거나, 떠밀 듯이 던져 주지는 않았다.
- 정문 제약 제 1 연구소에 레드 키를 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레드 키(Red Key)라면……. 보통 대규모 결계를 활성화할 때 쓰는 열쇠를 말하는 걸 텐데요.”
- 맞아요. 임의로 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통 세 명의 키(Key) 홀더가 동시에 돌리죠.
“그게 왜?”
- 지금 춘천에 있는 정문 제약의 제1 연구소가 다국적 용병의 맹공을 받고 있어요.
“이유는?”
- 정문 제약에서 조만간 ‘정문환’의 유통을 결정했다는 것 같아요. 오랜 기간 개발해 온, 부작용이 거의 없는 각성제죠.
“기술을 빼돌리려고 한다.”
- 네. 정황상으로 보면 정화 길드가 개입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이슈인데, 너무 조용해요.
이예린의 말대로다.
어쨌든 정문 제약은 대한민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제약사고, 해외 자본 유치도 없는 회사였다.
그간 정화 길드의 행보를 보면, 이런 경우에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개입하곤 했다.
여론 자체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말이다. 실력 있는 국내 제약사를 보호하자는 여론.
그런 여론이 일 때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화 길드가 나서서 영웅 놀음을 하곤 했다.
“뻔하죠. 뒤를 봐주는 거겠지.”
- 만약 그런 거라면. 왜 굳이 바깥에서 손을 빌리는 걸까요? 스스로 나설 수도 있잖아요.
“손 더럽히지 않고 과실만 취할 방법이 있다면, 저라도 직접 나서진 않을 것 같네요.”
덤덤하게 말했다.
정화 길드의 본색을 꿰뚫고 있는 강후와 다르게, 이예린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못한 듯하다.
강후가 말을 이었다.
“의뢰 내용에 집중해 보죠.”
- 키홀더 한 명이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결계 활성화가 안 되는 모양이에요.
“만약 레드 키를 전달한다고 치면. 그때까지 연구소가 버틸 역량은 되는 겁니까?”
- 현재 다국적 용병단의 공격이 멈춘 상태예요. 아마도 입금을 기다리는 거겠죠.
“자본주의 논리 확실하네요.”
- 연구소라고 방어 시설이 없는 게 아니니까, 보수 없이 위험 감수도 않겠다는 거겠죠.
“레드 키를 전달하면, 그다음은 연구소도 문제없는 겁니까?”
- 최소 15일은 버틸 수 있도록 설계를 한 모양이에요. 제대로 연구소에 돈을 발라둔 거죠.
“그렇게 돈을 떡칠해놓고는 키홀더 하나가 없어서 발동을 못 시키는 상황이라니…….”
- 안전 불감증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네요.
“보수는?”
- 착수 50억, 성공 500억. 그리고 성공 시에 각신환 10개를 약속받았어요.
“각신환을?”
- 네. 어떤 녀석인지는 썰로 돌아다닌 정보를 들어서 아시죠? 카더라가 거의 맞긴 하거든요?
“예. 알긴 압니다만.”
강후가 흠칫 놀랐다.
각신환.
정문 제약에서 개발한 알약으로 일시적으로 뇌의 활용도를 극대화해 주는 약이다.
부작용과 후폭풍의 문제로 효과 지속시간은 복용 후 10초로 매우 짧다.
삼키고 안에서 퍼지는 데 소요되는 2, 3초를 빼면 효과를 보는 실제 시간은 7초 남짓.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았고.
정문 제약 내부에서만 극소량으로 취급되는 약이었다. 상용화 전의 임상 실험은 끝난 상태다.
효과는 확실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적의 공격 행위와 움직임에 대한 모든 연산이 가능해지며.
어려운 수학적 문제 해결도 가능하고, 상대적이지만 시간이 매우 느리게 가는 체감도 가능했다.
원작에서 각신환이 상용화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않은 특수 약제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각신환이 무서운 것은 전부 천연 재료를 썼기에 부작용이 적다는 점.
마약류 각성제와 다르게 복용한 후에 감각이나 인지 체계의 교란, 파괴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듯했다.
열쇠만 전달하면 되는 문제니, 이예린의 말대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의뢰는 아니다.
강후가 물었다.
“브리핑 바로 가능합니까?”
- 어떻게 할까요? 화상으로 진행하시겠어요?
“아뇨. 체크할 것이 많으니 직접 가죠. 청안 빌딩으로 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가 바로 순간이동 능력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주변 배경이 순식간에 청안 빌딩을 중심에 둔 풍경으로 바뀌었다.
불과 얼마 전에 진효영을 처단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 * *
통화가 끝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청안 길드에 도착한 강후.
굳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예린은 잔뜩 놀라고 있었다.
강후가 전화를 할 때 청안 빌딩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빠른 강후의 방문은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는 능력에 의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거리 이동 스킬이 생소할 것은 없지만, 그 스킬을 쓴 사람이 ‘암살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잠깐 놀란 수준에서 그녀의 생각은 매듭지어졌다.
강후의 스킬 구성은 생각이 열려 있는 이예린도 이해가 안 되는 구성이 워낙 많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강후니까. 저런 스킬이 있는 것도 강후니까 당연하지, 하는 것이다. 일종의 긍정적 체념이었다.
이윽고 브리핑을 위한 회의실로 강후를 직접 안내한 이예린이 의뢰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보상을 보고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브리핑을 들어 보니 확실히 상상 이상이었다.
“다국적 용병단이 주변 경계를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사실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커요.”
“앞서 실패한 케이스가 몇 번이라고 했죠?”
“일곱 번이요. 전부 중간쯤에서 저격당해서 죽었죠. 공중 침투를 시도했던 헌터들은 뭐…… 바닥을 밟기도 전에 죽었고요.”
“매번 의뢰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데, 앞서 죽은 케이스가 많은 의뢰가 꼭 저한테 오는 듯한데?”
“그거야 강후 씨라면 왠지 해낼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커미션을 더 받은 건 아니고?”
“아주 약간? 약간 챙기는 건 맞지만, 그것도 다 강후 씨를 위한 사전 정보 수집에 들어가요!”
“흠. 그건 그렇다 치고.”
“에이! 그렇다 치고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어쨌든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저도 의뢰자를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얘기도 했고요.”
“지금 이 거리를 무사하게 통과해야 연구소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죠?”
“네, 맞아요. 정말…… 길죠.”
강후가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위성 지도를 따라 손으로 선을 쭉 그었다.
한참 손가락이 움직여야 할 정도로 이동해야 할 거리가 상당히 길었다.
이 정도면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스킬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용해야 할 듯했다.
극한의 극한.
한계까지 몸을 밀어붙여야 하기에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의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의뢰가 될 듯했다.
누군가와 피땀을 뒤섞으며 싸울 전투는 없을 수도 있지만.
한계에 도전하는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