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심연 (2)
* * *
강후의 요청에 대화 장소가 바뀌었다.
두 사람은 넓어도 결국 막힌 공간인 펜트하우스에서 나와 잘 조경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강후는 안에서 유예했던 대답을 밖에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위선이 진실을 집어삼킨 조직을 살갑게 여길 수는 없겠죠.”
“좋은 대답이네요.”
“세상에 절대선, 절대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차라리 솔직한 악은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말룸 길드 같은 곳 말입니다. 걔네들은 아예 자기들이 악당이라고 하잖습니까.”
“이름도 그렇게 지었죠. 말룸이 라틴어로 악을 상징하는 단어였던 가요?”
“그럴 겁니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까쉬마르 길드나 정화 길드처럼 위선을 떠는 게 아니라.”
담백하게 대답하는 강후의 말에 특별한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오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현석에게 듣기 좋으라고 해 준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는 없다.
다만.
앞으로의 방향성이 이현석의 지향점과 맞다는 생각은 했다.
이현석의 심연은 단일 조직으로는 국내에서 정화 길드와 ‘유일’하게 붙어볼 만한 조직이다.
괜히 정화 길드에서 각종 SNS와 언론 매체를 이용해 심연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오산에서 활동하던 바스타드나 평정 같은 조직은 적당히 누명을 씌워 박살을 내버리면 됐지만.
심연은 그게 안 됐다.
게다가 다른 길드 혹은 조직과 연대해서 심연을 견제하기에는 몸집이 컸다.
정화 길드에게 협조적인 단체도 심연 길드와 맞서자는 제안을 하면 물러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화 길드가 위성 길드를 여럿 두고 있듯이, 심연도 위성 조직이 꽤 있었다.
울산에 있는 조직인 ‘태화강’이 대표적인 예다.
공태수가 부상을 입은 이후, 그들은 주변 세력을 규합해 공태수의 ‘붉은 피’를 쳤다.
현재 울산의 지배 세력은 더 이상 붉은 피가 아니다. 태화강이었다. 심연의 세력권이 된 셈이다.
강후는 심연의 조직력과 결속력을 무기로 쓰고 싶었다.
그들이 계속 정화 길드의 발목을 잡아 준다면, 열세 개의 별을 견제하는 것도 쉬워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중립보다는 심연에게 한 발을 푹 담그고 있는 정도의 깊이가 좋다.
강후는 딱 그 스탠스에 맞춰 이현석과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세혁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박동재 씨 구출 건도 그렇고. 던전 공략 얘기도 그렇고.”
“제 얘기를 하시던가요?”
“요즘 녀석의 주 관심사가 강후 님입니다. 원래 실력 좋은 헌터에게는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
“기분 좋은 얘기네요.”
“사실 세혁이가 개인적으로 심연에 강후 님을 영입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었습니다.”
“그건.”
“압니다. 용병으로 썩기에는 강후 님이 아까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함부로 욕심을 부릴 수는 없죠.”
“음.”
“왜냐면 그 욕심 하나만으로도 더 많은 포커스를 받게 될 수 있고. 위험에 빠지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현석은 신중했다.
강후는 이현석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 인재를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현석이 말을 덧붙였다.
“저는 강후 님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저도 이현석 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강후의 진심이었다.
이현석에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고독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거대한 세력 하나만 더 있었다면, 현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오히려 정화 길드가 수도권 밖으로 쫓겨나고, 심연이 서울의 주인이 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강후 님 같은 인재가 정화 길드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강후의 단호한 대답에 이현석도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증까지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장시환에게 그들의 은밀하고도 더러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네트워크라고 하시면?”
“장시환, 채관형과 같은 네임드로 구성된 일종의 흑막 같은 조직 말입니다.”
“…….”
다만 뒤에 덧붙인 말이 강후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현석은 마치 열세 개의 별의 존재를 인지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된 구성원과 원작의 내용 전체를 아는 강후가 아니라면.
지금 시점에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데 이현석은 그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현석은 앞으로 게임 체인저로서 써먹기에 손색이 없겠어.’
강후는 확신했다.
이현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알아내려고 하고 있다.
정화 길드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은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더 차갑고 날카로웠다.
원작에서는 이 시점에 그가 죽어버리는 탓에 심연 전체가 와해되면서 국내 판도가 정리됐지만.
강후의 도움으로 배신자 문유석을 제거하고, 달라진 그의 미래는 분명 드라마틱할 것이다.
제대로 변곡점이 찍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강후에게 아주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다.
“어쨌든 실력은 변변찮지만, 혹시 암살자가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출혈 셔틀, 가능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만 강후 님을 위해서라도 연락은 아껴두고 싶군요.”
“편하실 대로.”
“던전 관련해서는 수현이 번호를 드릴 테니, 그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무조건 1순위로 처리할 테니, 던전 공략에 차질을 빚을 일은 없으실 겁니다.”
“던전 관련 자료도 민수현 님에게 받으면 될까요?”
“예. 녀석에게 꼼꼼하게 준비하라고 일러뒀으니, 제대로 할 겁니다. 강후 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크고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이현석과 심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영향권에 한쪽 발을 힘껏 내디뎠다.
앞으로는 영리한 줄타기를 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대놓고 심연의 그늘 아래서 활동하면 정화 길드의 타깃이 되기에 딱 좋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심연과 거리를 두면, 나중에 그들을 유용하게 써먹을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
어떻게 상황을 조율하고 끌고 갈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력에 달린 문제이기에.
강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냉철하고도 정확한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 * *
그 무렵.
심판의 지옥 1차 공략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위해 던전 밖으로 나온 장시환과 채관형.
두 사람은 앞서 모여 있던 다른 저스티스의 구성원을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인사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빈센트가 화제를 꺼내면서 히든 스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빈센트가 몸이 바짝 달아올라서는 장시환에게 채근하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장시환. 분명히 심판의 지옥을 공략한 암살자 중에 히든 스킬을 얻은 녀석이 있어.”
“그렇게 배가 아파?”
“얘기했잖아. 히든 스킬은 부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부리는 거야. 개나 소나 다루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샌드백이 필요한 거면 얘기를 해. 치안청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헌터 범죄자도 꽤 있으니까.”
“그런 놈은 맛이 없어, 맛이.”
무슨 맛인가 하면, ‘죽이는’ 맛이 없다는 얘기다. 다들 빈센트가 말한 맛의 뜻을 잘 알아들었다.
장시환이 팀 구성에 관한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1팀은 내가 관리를 하고 있었으니 논외. 그리고 7팀까지는 암살자 클래스가 없다.”
“이 녀석은 단독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단독이라…… 그렇다면 짐작가는 암살자가 있기는 한데.”
장시환의 눈이 붉게 빛났다.
채관형은 굳이 피곤하게 저래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빈센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 장시환과 빈센트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잠깐의 생각을 거친 뒤.
“신…….”
이름이 확실히 떠오른 장시환이 히든 스킬 획득자로 의심되는 암살자의 성을 읊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충분히, 그리고 몰래 히든 스킬을 획득했다고 의심해도 될 듯했다.
* * *
이현석과 헤어진 후.
강후는 그 길로 리셋이 끝난 자기 소유의 던전이 있는 경주역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혼자서 공략하기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던전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소유인 던전이기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언제든 머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전세혁의 배려로 던전을 상시 살펴주는 관리자도 상주하고 있어, 더욱 안심이 됐다.
물론 관리자가 강후의 던전 하나만을 관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리하는 던전마다 다수의 CCTV를 설치하고, 주변 확인을 수시로 하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했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던전에 들어오면, 적어도 경고용 조명탄 정도는 날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혼자서는 빡세네.”
던전의 수준이 제법 높다 보니,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날쌔고 영리하다.
박동재의 버프를 달고 있을 때는 평지를 가볍게 뛰는 느낌이었는데.
혼자 있는 지금은 급경사 지대를 뛰는 느낌이었다. 상대적인 압박감이 느껴졌다.
“버퍼가 괜히 마약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버프 뽕맛을 본 헌터는 쉽게 못 끊으니까.”
헛웃음이 나온다.
박동재가 강후의 실력에 감탄하고 강후와의 팀플레이를 갈망하게 된 것만큼.
강후 역시 박동재의 버프를 두른 팀플레이가 그리워지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선 버프 스킬북을 구해다가 꼼수로 학습해서 상시 활용하고 싶을 정도.
하지만 버프 스킬북은 헌터 스킬북 중에서 가장 드롭율도 낮고, 구하기 힘들었다.
아주 하찮은 버프여도 절대 시장에 나오는 일이 없었다.
공식 마켓에서 일 년에 두 권, 세 권 거래되면 진짜 많이 거래됐구나 할 정도다.
심지어 자세히 알아보면 그것도 지인 사이에서 기록을 남기기 위한 거래였을 뿐이었다.
강후가 이 던전을 찾아온 이유는 공략이 목적이 아니었다. 훈련이 주목적이었다.
전세혁처럼 돈으로 떡칠한 훈련장을 차리기에는 아직 돈으로 사고 싶은 아이템이 많았다.
그래서 던전을 개인 훈련장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실전까지 겸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았다.
강후는 온종일 주력 스킬을 다듬는 데 모든 집중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초반에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역시 분신술.
학습 능력까지 탑재된 분신이라 그런지, 훈련하면 할수록 움직임이 다채로워졌다.
종종 직접 분신을 다루지 못하는 공백기가 생길 때도 적절하게 분신이 좋은 움직임을 보여 줬다.
마치 학습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AI를 보는 느낌이었다.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납치 스킬도 훈련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주로 타깃을 끌고 와서 공격할 용도로 많이 썼던 납치 스킬.
하지만 이제는 상대할 적의 수준과 위력이 올라가다 보니, 납치 스킬의 리스크가 매우 커졌다.
자칫 잘못 끌고 왔다가는, 오히려 공격 기회를 제공하는 치명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는 탓이다.
그래서 납치를 주변의 구조물을 끌고 와 시야를 차단하고 방해할 용도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꼭 몬스터나 헌터를 끌고 와야만 스킬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응용은 자유다.
다만 아까부터 여분이 있는 적요석 2개와 맞물려, 자꾸 눈에 밟히는 스킬이 있었다.
요즘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드는 스킬 옵션에 변화를 줄 수 있을 만한 선택지가 떠오른 것이다.
그간 요긴하게 써 왔지만, 화력의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는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