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146화 (146/304)

146화 심연 (1)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늘 사람이 붐비는 인천 공항은 아침부터 출국과 입국을 준비하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최근 하얀 전쟁이 발발하면서, 외국 용병의 수요도 급증을 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중국, 러시아, 몽골 등지의 용병들도 제법 많이 입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국내 테러를 계획하거나 민간인을 공격하는 행위를 한다면 입국을 엄격히 통제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제약사 간의 전쟁에만 참여하는 전쟁 용병인 탓에 입국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국인이 아닌 모든 승객에 대해서 검문검색을 확실히 하기는 했다.

적어도 이름과 정체를 숨긴다거나, 활동 내역을 감추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외국 용병들도 당당하게 입국하기를 원했지, 밀항이라던가 하는 위험한 수단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인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햇빛이 없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선글라스를 낀 그의 모습에서 허세가 잔뜩 묻어났다.

“X 같은 날씨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어! 여기! 소혁아, 여기다!”

그를 알아본 다른 남자가 손을 힘껏 흔들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러자 잔뜩 찌푸려져 있던 남자의 표정도 풀렸다.

“인호 형. 오랜만이네.”

“그래, 소혁아. 중국에서 계속 활동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국내 일정을 잡아서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랄 게 뭐가 있어?”

“국내 활동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서 대장도 너를 중국으로 보냈던 거고.”

“태평하게 지낼 수 없는 이유가 생겼잖아.”

소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대답에 마중 나온 남자, 김인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수긍하기보다는 살짝 의문이 남는다는 눈치였다.

김인호.

그는 전주권역을 장악하고 있는 범죄 조직, ‘태양’ 소속의 조직원이었다.

강동현의 배다른 형인 대장 강태양의 심복이기도 했으며, 수더분한 성격이라 조율에 능했다.

그래서 오늘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동생을 직접 ‘모셔가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너와 여동생은 사이가 정말 나빴잖아? 여동생이 이클립스로 가고, 네가 태양에 온 시점에서 아예 갈라선 걸로 아는데.”

김인호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랬다. 이 남자의 정체는 차소희의 친오빠인 차소혁이었다.

김인호의 말대로 서로의 생각과 신념이 달라, 활동 조직을 다르게 선택했다.

문제는 이클립스와 태양의 대장이 각각 강동현, 강태양이었던 탓에.

서로 원수처럼 반목하며 으르렁거렸다는 것이다. 둘의 사이는 나쁘다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았다.

세간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서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상대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를 죽인 원수, 천륜을 저버린 패륜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원수 같은 둘의 관계는 휘하의 부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차소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갈라선 게 맞지. 하지만 말이야. 소희를 죽여도 친오빠인 내가 죽이지, 남이 죽이게 할 수는 없어.”

“…….”

“신강후, 그 새끼는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그게 오빠의 도리야. 놈의 뼈와 피를 갈아서, 소희의 영전에 바치겠어.”

까드득.

차소혁이 이를 갈았다.

그의 입국 목적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강후의 죽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국내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 *

정오.

자신이 직접 강후를 맞이하겠다는 민수현의 자원을 뿌리치고.

이현석이 직접 나와 약속 장소에서 강후를 맞이했다.

보안이 생명이다 보니, 중간에 통화로 약속 장소를 네 번이나 바꿨다.

그 과정에서 강후의 뒤에 눈이 붙었는가를 살피겠다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미행은 없었다.

이현석을 만나게 된 장소는 심연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관광호텔 안이었다.

이용 고객의 90% 이상이 심연 소속의 헌터였고, 혜택이 많아 사실상 무료 이용이 가능했다.

이현석을 따라 향하게 된 곳은 호텔 내의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서고, 방음 처리를 활성화하는 시설까지 완벽하게 구동하고 나서야.

이현석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는 보안을 확실히 챙겼다.

“이번에 강동현에 관련된 소식을 봤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다시 보게 됐습니다.”

“살려면 싸울 수밖에요.”

“이클립스에서 그래도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영악한 여성 조사관을 둘이나 잡으셨고 말입니다.”

“딱히 영악한 것은 모르겠더군요. 어쨌든 합당한 결과를 얻어갔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차소희는 과하게 의욕적이었고, 진효영은 스스로의 외모와 실력을 과신했다. 둘 다 하자가 있었다.

“수현이 녀석이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것을 말렸습니다. 괜히 실례하게 되면, 자리의 의미가 퇴색될 듯해서요.”

“말괄량이 조카를 두신 모양입니다. 하긴 첫 만남 자체도 평범하진 않았죠.”

강후가 민수현을 구해 주러 가게 됐던 계기를 떠올렸다.

흑골단 대장 신준호의 아이템을 훔쳐보겠다고 혼자 김천 해방구에 들어갔던 것이 민수현이다.

이후 똑같은 ‘바보짓’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던 사고뭉치였다.

“이후로 제가 직접 관리, 감독하면서 녀석의 호기심을 많이 눌러 주고 있죠.”

“고생이 많으십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후는 말 속에 담긴 이현석의 조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삼촌이라기보다, 아빠 같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딸 바보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강후는 자연스럽게 이현석에 대한 성좌 스캔도 진행했다.

원작에서 구현되어 있던 세팅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레벨은 620 언저리일 터다.

왜냐면 문유석의 배신으로 이현석이 죽었을 때, 레벨이 딱 620이었기 때문이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수현이를 구해 준 은인에 대한 보답은 제게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보상의 범위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이현석의 모습이 살짝 무서웠다.

100%의 호의가 아니라, 강후의 됨됨이나 생각을 파악하는 시험일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강후는 생각을 한 번 더 비틀었다. 더 간단하면서도 의미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

“해 주실 수 있는 보답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을 돌려 버렸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다.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느냐는 사실 크게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나저러나, 강후가 이현석이 아끼는 조카를 구해 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보상이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는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맞았다.

대답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되어도 같은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이현석이 강후의 말에 바로 망설임 없이 답을 꺼내 놓았다.

“심연 소유의 던전 다섯 곳에 대한 자유로운 공략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허가하는 겁니다.”

심연 소유의 던전은 심연의 관리를 받으며, 헌터 치안청의 입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즉, 지금 이현석의 말대로 그에게 전권이 있었다. 그가 보장한다고 하면, 완벽히 보장되는 것.

“다섯 곳을 고를 수 있도록 관련해서 던전 정보를 넘겨주실 수 있습니까?”

“2급 미만의 정보로는 전부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던전 선택이 수월하실 테니까요.”

이현석이 강후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1급, 2급 정보는 내부 핵심 공략 및 비밀 루트에 관련된 정보이기에 보호하는 것이 맞다.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할 영역의 정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밀의 영역이다.

이현석이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검지를 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나 더. 지원팀을 꾸려드릴 수 있습니다. 경험치 독식도 보장합니다.”

“전문적으로 육성을 돕는 팀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성장 속도가 아쉬운 유망주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그런 팀이죠.”

군벌 심연은 다양한 정예 조직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억이 맞다면, 육성을 지원해 주는 팀의 이름은 ‘청호대’일 것이다.

그리고 마탄 저격수로 구성된 팀은 ‘적호대’로 부르고, 암살자로 구성된 팀을 ‘흑호대’로 부른다.

그들은 각각 혹독한 훈련을 거쳐 최정예가 되며, 이현석의 든든한 핵심 세력이 된다.

“다섯 곳이라…….”

“부족한 것 같으십니까?”

“아뇨. 고민을 신중하게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강후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심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배려였다.

애초에 심연 소유의 던전은 외부인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용병도 구하지 않았다.

모든 공략을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하기에 베일에 가려진 정보가 정말 많은 곳이었다.

그런 심연에서 강후를 위해 던전 다섯 개를 내어주고.

거기에 지원팀을 붙여, 원활한 경험치 파밍까지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외에 까다로운 아이템 판매나 혹은 쓸만한 아이템의 구매도 도움을 드릴 수 있고요.”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하게 답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외부인에게는 좀처럼 열어 주지 않는 던전을 저에게 배려해 주시는 건데.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신강후 님을 믿는다기보다, 상황을 믿는 거죠. 수현이를 구해주신 것이 거짓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그 상황이 진실이기에 저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과거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 강후 님을 부정하게 되겠죠.”

“우문현답이네요.”

“현문우답으로 하시죠. 하하.”

한마디로 자신에게 신뢰를 보이는 만큼, 혹은 신뢰하지 않는 만큼 대응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은원이 확실한 이현석의 성격에 잘 어울리는 대답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국내에서 성장의 기폭제로 활용할 만한 던전 다섯 곳의 공략 기회를 약속받았다.

심연이 소유한 던전은 대부분이 알짜들이다.

특히 강후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다수인 던전이 꽤 많다는 것이다.

그런 곳들로 리스트 업해서 공략 목록에 넣을 수 있다면, 스킬의 대량 획득도 가능해진다.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

이현석이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강후에게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꾼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깊게, 훅 들어오는 질문이었다.

“혹시…… 강후 님은 정화 길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마음 편하게 대답하기에는 듣게 될 사람에게 의미가 크고 무거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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