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울릉도 (5)
그녀가 옵션을 보지 않고서도 아이템의 특성까지 판단한 마당에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강후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눈에는 보여.”
김신령이 짧게 답했다. 그 말로도 대답이 충분하기는 했다.
강후에게 상대 성좌 정보가 보이는 것도 자기 눈에는 보이니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열 명이 넘는 성좌와 계약하고 있는 김신령. 그녀의 레벨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500 이상이다.
그렇다면 세공과 분해에 특화된 그녀가 아이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의문인 것은.
먹일 수 있는 무기는 그만큼 비쌀 텐데, 자신에게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단지 초면에 마음에 들었다고 비싼 무기를 태우기에는 동기가 부족하지 않은가?
아니면 최하급의 아이템을 던져주고 되도 않는 생색이라도 내려는 걸까?
강후의 눈빛이 다른 의미로 깊어지는 것이 보이자, 김신령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필요 없는 쓰레기 아이템이나 던져주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럴 만한 이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 직접 봐봐. 안 그래도 너 같이 의심 많은 놈은 자기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
김신령이 강후에게 단검을 무심히 던졌다. 단검을 받아든 강후는 바로 옵션을 확인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아이템과 다르게 이 아이템은 시작부터 특징점이 있었다.
【평온 - 무기】
【등급 : 7등급】
【해당 무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손상을 입어, 착용 시 기존의 옵션 혜택을 볼 수 없습니다.】
【근력 +35】【적용 불가】
경고문이 있었던 것이다.
스탯 옵션이 존재하기는 하나,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
강후가 일시적으로 기존의 단검을 탈착하고, 이 녀석을 착용해 봤으나 스탯의 변화는 없었다.
원작에서도 아이템이 이렇게 되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시환의 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보니, 장시환의 아이템은 저렇게 될 일이 없었다.
그래. 주인공 보정이었다. 아주 작은 손해도 보게 하고 싶지 않은 원작자의 욕심이었다.
어쨌든 지금 눈앞에 파괴된 아이템이 있다. 가치를 상실한 아이템인 셈이다.
“파괴된 아이템이네요.”
“맞아. 헌터가 착용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 스탯이 바뀌지 않으니까. 쓰레기가 맞아.”
“아……!”
그때, 강후가 번뜩인 생각에 탄성을 터뜨렸다.
착용해서는 의미가 없는 게 맞다. 하지만 ‘먹이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착용할 경우만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경우는 얘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설정의 맹점이었다.
“이제 이해가 가지? 난 이런 아이템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많이 갖고 있어.”
“…….”
솔깃해진다.
일반적인 헌터에게야 존재 가치를 상실한 아이템이니 버리거나 싸게 처분했겠지.
하지만 김신령은 모종의 이유로 그런 아이템들을 수집해 왔던 듯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네가 내게 협조를 해 주는 만큼 고등급의 아이템을 공짜로 줄 수도 있어. 0원에 말이야.”
“그건 좀 끌리네요.”
“그치? 흥미가 동하지?”
“예.”
“직접 돈 주고 구매해서 먹이려고 하면 아깝잖아? 하지만 공짜로 먹이는 건 기분이 좋을 거고.”
“지금 협조를 원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아냐. 일단 연락처만 서로 교환하자. 필요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게.”
“저도 일정이 많아서 원하는 시간을 비워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양해가 필요합니다.”
“누가 뭐래? 조율해서 만나자는 얘기지. 걱정 마. 갑질하려고 부르겠다는 거 아니니까.”
꽤 흥미로운 이슈가 생겼다.
그녀가 어떤 단검 아이템을 주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고등급의 파괴된 아이템을 건네준다면, 그만큼 많은 스탯이 단검에 추가될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제값을 주고 사서 먹이기에는 아까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
하지만 공짜로 얻어서 먹인다면 강후의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장사였다.
물론 그녀가 어떤 형태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지나치게 호구 잡힌다 싶으면, 판을 깰 생각도 있었다.
끌려가는 관계의 거래는 강후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기에.
그렇게 김신령과의 짧고도 강렬했던 만남은 끝이 났다.
그녀는 거래가 끝나기 무섭게, 별장 지하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에 또 보자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다른 의미로 참 캐릭터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 * *
문형서와는 김신령의 별장을 나와, 시내로 나오자마자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후는 울릉도에 잡아 놓은 안전 호텔에서 잠을 잘 생각이었고, 문형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낙 방문자가 많은 울릉도이다 보니, 조금 위험하긴 해도 밤시간의 배편도 있었다.
물론 만약의 사건 사고를 대비해서 생각보다 큰 배가 움직이기에 뱃삯이 좀 비싸지만 말이다.
전과 다르게 시종일관 정중하고 예의 바르던 문형서는 헤어질 때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오늘 많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신령 님께서도 많이 감탄을 하셨고요.”
“그랬군. 그럴 만했지.”
강후가 만족스럽게 자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함정 구간을 통과했으니까.
“저도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되더라고요. 나름 영감도 됐습니다.”
“그랬다면 나야 기쁜 일이고.”
“혹시 괜찮으시면…….”
“응.”
“다음에 대련을 좀 해 볼 수 있을까요? 암살자 상대법을 좀 다듬고 싶기도 한데.”
“나도 창술계를 상대해 본 경험은 적어서. 피차 서로에게 도움 될 대련 같기는 하네.”
“예,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좋아. 다음에 마스터 K를 보게 되면, 그때 판을 좀 깔아보자고. 장소는 있지?”
“물론입니다. 대련용 장비도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무색 부적은 제가 인계받았으니, 마스터께서 준비되시면 연락을 직접 주실 겁니다.”
“조심해서 가고.”
“예.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 수 있도록 마스터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수고해.”
그렇게 문형서와도 헤어졌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밤의 기운을 빌려 잠을 청하기에는 정신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별장에서 수많은 함정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바짝 올라온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때.
“오늘은 저거다.”
때마침 시야에 들어온 편의점을 본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캔맥주에 버터구이 오징어. 오늘은 왠지 이 조합이 입안에 착 달라붙는 꿀맛이 될 것 같았다.
* * *
1시간 후.
“일본은 아직 스탠바이가 안 됐고. 하얀 전쟁은 지금은 철저하게 간을 보는 게 좋겠고.”
호텔에서 혼자만의 야식 타임을 즐긴 강후가 그동안 짜놓은 판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일본행을 빠르게 추진하고 싶지만, 현지 사정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태.
여기는 강후가 서두르고 싶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만큼, 편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하얀 전쟁은 지금은 시작 단계로 너무 과열 상태다.
용병 의뢰의 9할 이상이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집중되고 있는 상황.
한탕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인 것은 맞으나, 재수가 없으면 시작과 동시에 죽기도 딱 좋았다.
애초에 개싸움이 되는 현장에서 날뛰는 것은 강후가 썩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눈먼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죽음도 복불복의 요소가 된다.
“에밀리아를 만나려고 프랑스에 지금 가는 것은 좀 뜬금없고. 체급이 너무 낮지.”
프랑스 행도 시기상조.
김수경 용병단이나 그루 길드도 갑자기 스킨십을 늘려가기에는 부담이 좀 있다.
먼저 들이대는 모양새를 보이게 되면, 아무래도 유리한 고점을 선점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박동재. 전세혁. 반세영. 이쪽 라인도 이제 좀 가까워진 느낌에. 이예린, 윤상미, 정유리와도 문제없고.”
쓸만한 인맥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그만큼 악연들도 같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원래는 강동현의 이클립스와만 척을 진 사이였지만, 최근에 하나가 더 추가된 상황이다.
바로 러시아의 까쉬마르 길드.
녀석들도 언제,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뒤끝을 보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굽힐 생각은 없다.
“그래. 이현석이 있었지.”
그때, 요 근래 접촉이 거의 없어서 후순위로 밀려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이현석.
조카 민수현을 구해주고 그에게서 받은 피의 증표와 개인 번호는 여전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때의 명분이야 티타임이나 한 번 갖자는 것이었지만.
이현석이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현석의 ‘심연’이 보유한 던전의 개수나 구성을 본다면, 국내에서 이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시기도 괜찮았다.
오히려 너무 미뤄지면, 민수현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감정이 희석될 수도 있다.
딱 지금이 그 감정을 환기하면서 끌어 올려 주고, 생색을 내기에도 적당한 시점이다.
아울러 최근에 강동현의 척살령 이슈로 이름값도 올랐으니, 자연스럽게 어필도 되는 상황.
“다음은 심연이다.”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이제 이현석이 자신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게 할 시간이 된 듯하다.
* * *
그 시각.
이현석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로 정보 확인에 여념이 없었다.
워낙 방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보니, 확인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 부분은 휘하의 정보팀이나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도 되지만…….
직접 보고 판단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현석의 성격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현석의 옆자리에는 핑크빛 긴 머리를 대충 묶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민수현이 있었다.
“수현아. 수현아.”
“우, 우우웅……? 삼촌, 왜요?”
“이거 봐라.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김대만 이 새끼. 까쉬마르 길드랑 커넥션이 있었단 말이다.”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요야! 정화 길드와 까쉬마르 길드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다는 증거지.”
“하아암…….”
“그래, 네게 말한 것이 실수지. 얼른 들어가 자라. 내일부턴 아예 집에서 푹 쉬고.”
“헉, 삼촌!”
아예 집에서 푹 쉬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집에서 쉬는 만큼, 심연 차원에서의 지원과 보조도 같이 쉬겠다는 의미였다. 끊는다는 뜻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분위기를 인지한 민수현이 갑자기 텐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네! 삼촌이 전부터 정화 길드가 까쉬마르 길드랑 접점이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됐다. 들어가라. 이미 내 마음이 짜게 식어 버렸다.”
“삼초오오오온!”
“됐고. 일단은…… 음?”
그때.
이현석이 책상 서랍 가장 위쪽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넘버링 1번인 번호로 걸려온 전화라는 뜻이다. 즉, 강후의 전화였다.
그간 소식이 뜸하다 싶었는데, 이제야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 든 모양이다.
최근 이클립스에 관련된 강후의 이슈를 알고 있는 이현석이었기에 전화가 더 반가웠다.
심연은 정화 길드만큼이나 이클립스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내어 반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충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대되는 연락.
이현석이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서는 강후의 전화를 받았다.
“이현석입니다. 조카 수현이를 구해 주신 은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시작부터 감사함이 물씬 묻어나는 이현석의 멘트.
전화를 건 강후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통화의 시작이었다.
얘기가 잘 풀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