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울릉도 (4)
* * *
‘진짜 짓궂네.’
첫 번째 함정을 통과한 강후가 고개를 숙인 채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성공이었다. 원작에서 조형된 김신령의 성격에서 추론한 그림이 맞아떨어졌다.
누가 봐도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시작 구간.
예쁜 꽃들이 가지런히 잘 자라고 있고, 분위기 있는 벤치와 가로등까지 놓인 공간.
그래서 여기는 시작점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위치에 함정이 있었다.
강후가 분신을 안으로 들여보냈더니, 곧바로 마창이 날아든 것이다.
마법 스킬이 부여된 마창이기에 만약 타격당했다면 그대로 인간 꼬치가 되었을 한 방이었다.
김신령이 원작에서 했었던 대사 중에 강후가 늘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하나 있다.
- 내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한 방을 시원하게 먹였을 때야.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는 전략, 전술적인 측면에서 허를 찌르는 것을 매우 즐긴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입구는 음산하고 어두워 보이는 미로의 초입과는 전혀 다른 밝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강후도 잠깐이지만, 여기는 일종의 대기용 공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신령이 허를 찌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으면 여기서 인생이 끝날 뻔했다.
“흠.”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폭이 상당히 좁아지면서 대폭 어두워지는 길이다.
일단 시험의 영역 전체는 모두 미로 형태로 되어 있고.
동시에 벽은 나무와 가시덤불을 엮어서 만든 단단한 구조물 형태로 되어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나무와 가시덤불을 태워 버리면, 벽이 사라지고 지름길이 나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즉사다.
왜냐하면 나무와 가시덤불의 틈새로 수많은 폭발 트랩이 연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벽을 뚫어보려다가, 뚫기는커녕 벽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강후는 먼저 움직이기에 앞서서 환영술로 만든 환영을 앞으로 슬쩍 보냈다.
아무리 봐도 뭔가 나올 여지가 없는 길이지만,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것이다.
김신령은 상식을 깨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해 보이는 곳에 반드시 빈틈을 만든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는 별다른 준비를 해 두지 않는다.
허에 허를 찔러서, 상대로 하여금 판단에 혼선을 주는 방식이다. 상당히 고약하다.
이윽고 환영이 길목 안으로 접어드는 순간.
콰드득!
방금까지만 해도 평평한 지면이었던 흙바닥이 흔들리더니, 날카로운 창이 솟구쳐 올랐다.
‘잔인하기 짝이 없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지 날카로운 창 몇 개가 올라온 수준이 아니라, 창끝에 독까지 발라져 있었다.
창에 꿰뚫리지 않았어도, 조금만 스쳤으면 바로 중독 상태가 되었을 거란 얘기다.
창이 올라온 상태로 멈춰있다.
회심의 변화구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지나가더라도 별일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강후는 움직이지 않고, 이번에는 그림자 걸음 스킬로 만든 그림자를 보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스우우우웁!
미로의 왼쪽 벽에서 강력한 흡기가 일어나며, 그림자를 쭉 빨아들이더니.
푸슷! 푸슷! 푸스슷!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던, 짧은 창 세 개가 밖으로 나오면서 허공을 찔러댔다.
그림자였기에 허공을 찌른 거지, 사람이 있었다면 등이든 가슴이든 관통당했을 공격이었다.
사탄, 악마.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릴 단어가 쉴새 없이 떠오른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대로 흘러간 것이 없다.
안전해 보이게 포장된 입구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었다.
함정이 하나만 있을 것처럼 연출된 공간에는 함정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다시 분신을 만들어내, 두 차례의 변수가 있던 공간에 또 보냈다.
그러자.
콰드드득!
이제는 아예 양쪽 벽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중간에 작은 틈조차 남지 않게 맞물려 버렸다.
그랬다.
최종 함정은 양쪽 벽에 짓눌려서 압착으로 몸이 으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최악의 함정이었다.
“독하다, 독해.”
강후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쯤이면, 고객 유치가 아니라 살인이 목적인 건가 싶을 정도로 생각이 혼미해진다.
* * *
그 이후.
김신령은 문형서와 함께 모니터를 통해 강후의 대응을 보며, 연신 신기해했다.
나름 머리를 굴려서 짜놓은 트랩을 강후 역시 생각을 하고, 또 비틀어서 대응했던 것이다.
“마냥 신중하다고 하기엔, 과감하게 넘어갈 구간은 또 과감하게 넘어가 버리네.”
김신령의 반응에 문형서도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보고 느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겁을 먹은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친구는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이 많다 보니까, 변수 대처 능력이 훨씬 뛰어난 것 같아.”
“확실히 암살자의 일반적인 스킬 구성과는 전혀 다르죠. 매칭이 잘 안 되는 스킬도 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뭔가 좀 꺼림칙하다 싶으면, 저 슬라임을 쓰는 것도 인상적이네.”
화면 속에는 뜬금없이 불쑥 만들어져서는 온갖 공격을 받아내고 전사(?)하는 슬라임도 있었다.
게다가 정말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겠다 싶을 때는 강후가 보호 결계를 둘러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렇다 보니, 판을 꼼꼼하게 짜놓은 김신령의 입장에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마치 가위바위보에서 자신이 뭘 낼지를 미리 알고서 손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강후의 움직임에 내심 감탄하고 있던 문형서가 슬쩍 운을 뗐다.
“그간 봤던 헌터들과는 좀 다르지 않으십니까?”
“응. 생각을 영리하게 할 줄 아는 아이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설계자인 내 관점으로 보고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가진 스킬 풀이 다양하다 보니까, 이제는 계산이 섰는지 그대로 돌파해 버리네.”
“와. 벌써……! 거의 다 들어온 겁니까?”
“그림자 활용 스킬이 진짜 대박이야. 미리 보낸 그림자로 함정을 체크할 수도 있고. 안전하다 싶으면 위치를 바꿔 버리잖아?”
“예. 맞습니다.”
연신 계속될 수밖에 없던 칭찬에 괜히 짜증이 났는지, 김신령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미친놈이네, 저 새끼! 무슨 저런 암살자가 다 있어? 어디서 온 놈이야?”
그것은 분명 극찬이었다.
* * *
얼마 후.
김신령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별문제 없이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강후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마주했던 함정과 그 구조를 복기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신령은 괴짜가 맞았다.
진심으로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죽이기 위해서 고민한 흔적이 모든 공간에 담겨 있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억지로 들어와서 죽으라고 한 적은 없다.
여기서 생을 마감한 헌터는 모두 자기 의사로 진입했고, 죽었을 뿐이다.
김신령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죽은 헌터가 문제지.
이윽고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만날 준비를 마친 김신령이 응접실로 왔다.
그 순간, 강후가 어지간해선 잘 안 보이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다.
강후의 반응에 김신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웃어?”
“아무리 솜씨가 뛰어나도 그렇지, 대놓고 유명인의 얼굴을 갖다 쓰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김신령의 얼굴은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의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얼마나 감쪽같이 만들었는지, 얼굴만 보면 엘리자베스라고 착각할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얼굴밖에 커버가 안 되어서 목이나 손의 주름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가면 제작도 그녀의 능력이다. 사실 가면보다 인피면구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예쁜 얼굴 나도 해 보고 싶어서 그런다, 왜?”
김신령의 당당한 반응에 강후도 더 뭐라고 뒷말을 붙이진 않았다. 취향은 존중해 주는 게 맞다.
“이 정도면 시험은 충분히 통과한 겁니까?”
“뭐……. 솔직히 훌륭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아주 깔끔했어.”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한 함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신 도전하고 싶진 않네요.”
“네 대응을 보면, 미국에 있는 내 별장에 한 번 도전해 봐도 재밌을 듯한데?”
“죽을 짓 두 번은 사양하죠.”
“어쨌든 얘기를 들어 보자. 내게 사고 싶은 게 뭐라고?”
“무색 부적입니다.”
“무색 부적이 어떤 부적인지는 알아?”
“모릅니다.”
강후가 솔직하게 답했다.
굳이 그녀 앞에서 아는 척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오히려 신뢰에만 문제가 생길 뿐이다.
“기존에 옵션이 있는 부적 아이템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든 거야.”
“아.”
혹시 하는 생각으로 추측은 했지만, 듣고 나니까 훨씬 흥미로운 형태였다.
말로만 들어선 쉽게 가능한 작업처럼 들리지만.
안정성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게 되면 아이템은 분해 과정에서 무조건 가루가 된다.
일부 파손, 능력 상실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이템 세공 실력자도 아이템 분해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
그리고 분해 실력자는 애초부터 전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수가 적었다.
그중 한 명이 김신령인 셈이다.
특히 작아서 더욱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부적까지 분해할 수 있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가격 책정은 일찌감치 해 놨어. 99억 9900만 원. 하지만 특별히 할인해 줄게.”
“얼마입니까?”
“공짜.”
“음?”
할인을 해 준다는 얘기에 많아야 20% 정도를 생각하고, 80억 원 정도의 결제를 생각했는데.
그녀가 제안한 금액은 공짜. 0원이었다.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네 덕분에 내가 만든 함정의 보완점을 많이 알게 됐거든. 자문료로 이쯤 해 주겠다는 건데?”
“이왕 마음 쓰는 김에…….”
“할인 취소하기 전에 닥치고 그냥 이대로 받아. 흥정하려고 하면 입을 못 놀리게 다시 높이겠어.”
“감사합니다.”
강후가 마음 쓰는 김에 자문료에 더 값을 쳐달라고 하려던 말을 신속하게 취소했다.
김신령이 바로 준비해 온 부적을 쓱 내밀었다.
무색 부적이라는 이름처럼 아무 빛깔이 없는 부적이었다.
아이템 창을 보아도 표시된 이름을 제외하면, 어떤 옵션도 없었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했다.
“후처리는 다 해 놨어. K에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사연이 많은 것 같던데. 고생이 많겠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다 그런 거죠.”
“말은 잘하네. 어쨌든 말이야. 오늘 시험에서 보여 준 모습은 참 마음에 들었어. 잘했어.”
“칭찬은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하나 제안을 하고 싶은데. 혹시 한 번 들어볼 생각 있어?”
“네. 말씀하시죠.”
김신령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 많은 어필이 된 모양이다.
이야기가 개인적인 영역으로 접어들자, 문형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이내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김신령이 바로 운을 뗐다.
“내가 요즘 다루고 있는 암살형 소환수가 있는 데 말이야. 학습을 도와줄 수 있을까?”
“소환계였습니까?”
“응. 내 본질은 소환계야. 부수적으로 다루는 것이 세공과 분해지만.”
의외였다.
양립하기 힘든 특성인데 양쪽으로 특화가 된 모양이다. 분명, 보통 능력자는 아니다.
“도와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맨입으로는 어렵죠.”
“네가 들고 있는 단검. 보니까 무기 먹이는 옵션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어때? 내가 먹일 수 있는 무기 하나를 대 주지. 이 정도면 흥미가 좀 동하실까?”
단검의 특성을 바로 꿰뚫어 본 김신령이 생각지도 않았던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단검 ‘타락한 신념’의 ‘왜곡 각성’ 옵션을 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