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니키타 보로닌 (2)
* * *
별장에서 푹 쉬고 있던 강후에게 마진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로 번호 교환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별장 내에 비치된 직통 전화로 연락이 온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전화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슈가 생긴 모양이었다.
“네, 신강후입니다.”
- 마진호입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실까요? 쉬고 계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자고 있던 건 아니라서. 무슨 일이신가요?”
- 신강후 님을 꼭 뵙기를 원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임의로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기에요.
“저를요?”
- 네, 그렇습니다.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을 알고 있는 지인은 없다. 일일이 알려 주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마진호가 저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외부인이라는 얘긴데,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죠?”
- 니키타 보로닌이라는 분입니다. 까쉬마르 길드 소속의 간부이시고, 한국 쪽 관리자시죠.
“니키타 보로닌…….”
아는 이름은 아니다.
원작에서 까쉬마르 길드 얘기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니키타 보로닌이라는 인물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고위 간부는 아닌 모양.
다만 까쉬마르 길드에서 왔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걸렸다.
물론 마진호 같은 사람은 까쉬마르 길드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정화 길드처럼 잘 포장된 그들의 연출된 모습을 보고 있을 테니까. 숨겨진 진실은 모를 터다.
하지만 까쉬마르 길드와 악연이 생긴 강후의 입장에서는 이 만남이 반가울 수는 없었다.
까쉬마르 길드의 산하에 있었던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이 자신에 의해 해체됐기 때문이다.
전종두의 죽음에 대해서야 여러 갈래로 정보가 유출됐을 거고, 얼굴도 알려졌을 터.
그 대상이 자신, 신강후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터다.
까쉬마르 길드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하다.
여기로 온 것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겠지. 제주 공항에서 정보가 샜을 것이다.
‘정식 만남을 요청한 것을 보면 싸울 생각은 아닌 듯하네. 그랬으면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
마진호까지 중개자 역할로 쓰는 것이 일단은 대화에 초점을 맞춘 듯해 보였다.
만나는 보고 싶었다.
어떤 생각으로 찾아온 건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편으로는 까쉬마르 길드가 전종두 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가늠할 수도 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나보죠. 다만 귀찮게 나가고 싶지는 않은데요.”
-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직접 니키타 님과 갈 겁니다. 자리도 지켜드릴 거고요.
“그럼 여기로 오시죠.”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니키타와의 만남이 이뤄지게 됐다.
까쉬마르 길드에서 온 불청객. 그가 어떤 얘기로 포문을 열지 제법 기대가 됐다.
썩 좋은 얘기는 아니겠지만.
* * *
1시간 후.
별장 외곽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강후와 니키타가 만났다.
그리고 마진호는 본인이 스스로 회의실 경비를 맡기로 했다.
서로 초면인 두 사람이 만나는 만큼 의외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리적인 충돌이라던가, 과격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적당한 사이즈의 원탁을 중심에 두고 마주 앉은 채, 강후와 니키타가 서로를 응시했다.
‘레벨 400대는 되겠군.’
니키타가 보유한 성좌의 개수를 보니 어렵지 않게 그의 레벨이 짐작이 됐다.
까쉬마르 길드의 규모를 생각하면 중위급 간부 정도 되는 레벨. 하지만 결코 낮은 레벨은 아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니키타였다.
“오쇼 용병단을 무너뜨리고, 그 잔당까지 소탕한 신강후 님의 행보는 상당한 쾌거입니다.”
유체이탈 화법이 이런 걸까.
천연덕스럽게 자기 길드의 산하에 있던 용병단을 박살 낸 것을 칭찬하고 있다니.
강후가 어이없는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현장에 베주미예도 있었고.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까쉬마르 길드의 치맛바람 속에 전종두가 있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텐데요.”
강후의 답에 니키타가 웃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글쎄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발뺌을 하겠다?”
“죽은 자의 가치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산 자만은 못 한 법이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었으니 버리고, 새로운 배를 갈아타고 싶다?”
“너무 단순한 말씀이십니다. 저희 까쉬마르 길드는 오래전부터 실력자를 우대해 왔습니다.”
“어쭙잖은 칭찬은 됐고.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제대로 말해 보시죠.”
“까쉬마르 길드에서 뒤를 확실히 봐 드리겠습니다. 강원도 쪽에 세력 구축을 해 보시는 건?”
“제2의 전종두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개소리군요.”
“개소리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저희가 제대로 뒤를 봐주면, 전종두처럼 죽을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진즉에 전종두의 뒤를 그렇게 봐 주지 그랬습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까진 아니어서.”
니키타가 담백하게 답했다.
그러자 강후 역시 살짝 격앙되었던 목소리를 낮추고, 원래의 톤으로 차분히 말했다.
“출혈 딜러가 필요하면 얘기하시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제주도에 와 있었으니까. 러시아도 얼마든지 출장 됩니다.”
“신강후 님.”
“……?”
“범죄를 저지르라는 게 아닙니다. 도태된 헌터에게 새 삶을 주자는 겁니다.”
듣고 난 강후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이렇게 포장할 수 있는 걸까.
방금 니키타가 한 말을 네 글자로 줄이면 인신매매였다.
제멋대로 헌터를 갖다가 인체를 파는 일을 마치 새 삶을 주는 것처럼 지껄여대고 있는 것이다.
“그걸 왜 당신네들이 정해?”
“신규 헌터보다 사망, 실종되는 헌터가 더욱 많습니다. 의미 없이 죽는 헌터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의미를 왜 너희들이 부여하냐고.”
최소한의 예의로 지켜주던 존대와 존중도 거기서 끝났다.
니키타가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신념에 차서 내뱉고 있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치를 운운하며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다.
“내가 회색 영역에 있는 것은 맞아. 하지만 인간이길 포기하지는 않았어. 됐어. 돌아가쇼.”
“아쉽군요. 얘기가 잘 통할 줄 알았는데요.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게 헌터의 소양 아닙니까?”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니까 안 하겠다는 거야. 언제 뒈질지 모르는 짓을 왜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나도 안타까워. 너희가 이렇게 빡대가리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다른 놈 알아봐. 난 됐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번, 천 번 양보해서 니키타의 제안에 응한다고 치자. 과연 그들의 말대로 될까?
강후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강후의 가치가 없어지면, 그리고 그가 위험에 빠지면? 전종두처럼 또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애초에 이 대화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강후도 알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대화가 끝났다.
니키타도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지하게, 강후랑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양. 그래서 더 무서운 인간이었다.
* * *
니키타와 있었던 일을 그저 기분 나빴었던 해프닝으로 묻어버린 이후.
다음 날 정오에 맞춰 그루 길드와 약속한 두 번째 던전 공략이 이루어졌다.
이동 거리가 상당히 짧은 초소형 던전 공략이었고, 그래서 저녁 무렵에 끝이 났다.
강후의 레벨은 딱 알맞게 떨어지는 165가 됐다. 이제 레벨 200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들 보스, 메인 보스에서 전리품으로 나온 주황색 마석을 1개씩 가졌다.
덕분에 던전 밖으로 나와 이것까지 처분하니 통장 잔고가 1,050억 원이 됐다.
또다시.
2등급 아이템 하나를 너끈하게 살 만한 밑천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보스에게서 제법 쓸만한 스킬도 강탈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민첩 강화 A】
【스킬 숙련도 : Lv. Max】
【패시브 스킬. 상시 민첩 스탯의 효율을 7.5% 늘립니다.】
스탯창에서 스탯이 오르는 개념은 아니지만, 상시 적용되는 버프 스킬처럼 기능했다.
민첩 강화는 A가 가장 낮은 단계의 패시브 스킬이다.
이후, 알파벳이 뒤로 갈수록 오르는 퍼센티지가 증가하는 형태로 이번에 첫 스타트를 뗀 셈이었다.
【불의 상흔】
【스킬 숙련도 : Lv. Max】
【패시브 스킬. 화염 절대 내성을 영구적으로 2.5% 증가시킵니다.】
아울러 불의 상흔 덕분에 화염 절대 내성 수치가 총 10%가 되었다.
일전에 얻었던 7.5%에 더해진 수치.
이제 화염계의 공격에 대해서는 무조건 10%의 대미지를 깎고 받아낼 수 있게 됐다.
나중에 100%가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화염 스킬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를 지나가도, 멀쩡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내성 덕분에 말이다.
뜻하지 않은 제안으로 오게 된 제주도에서 강후는 선물처럼 많은 이득을 챙겼다.
스킬만 네 개를 추가했고. 잔고가 말도 안 될 만큼 대폭 늘었다.
게다가 임밸런스 포인트까지 방문하면서 폭발적인 레벨업을 경험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여정이었다.
강후는 그렇게 즐거운 추억과, 그루 길드에 대한 의미 있는 인연을 남기고는 비행기를 탔다.
니키타와 엮인 일도 있는 마당이라 제주도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 * *
엘리자베스. 빈센트. 에밀리아. 유청화. 케이시. 그리고 타카시의 분신까지.
총 6명이 자리에 모였다.
아직 심판의 던전을 공략 중인 장시환과 채관형은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했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먼저 이야기의 포문을 연 것은 빈센트였다.
초면이자 새 동료인 엘리자베스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인사를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우리 저스티스에 들어오게 된 엘리자베스다. 듣던 대로 미인이지?”
빈센트가 언급한 ‘저스티스’. 그것은 바로 열세 개의 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당시는 아직 열세 개의 별 모두가 모인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열세 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아닌 가칭으로 정한 저스티스(Justice)가 이 모임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열세 개의 별이라는 이름이 확정되는 것은 열세 번째 멤버가 들어오고 난 이후.
아직 저스티스의 인원은 13명이 아니었다. 물론 얼마 남지는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 반갑다.
그때,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에게 악수를 청한 것은 바로 타카시의 분신이었다.
전통 무사 코스프레를 하고 참여한 타카시의 분신은 입에 달린 스피커로 타카시의 말을 전했다.
“아. 바, 반가워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얼굴을 직접 뵐 수 없는 분이라고요.”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분신의 손을 맞잡았다. 체온이라고는 하나도 안 느껴지는 차가운 손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엘리자베스와의 첫인사가 진행되는 동안.
빈센트는 자연스럽게 이번 방문 목적에 대한 운을 뗐다.
“다들 봤지? 히든 스킬의 새 획득자가 나타났어. 나는 한국에서 그 주인이 나타났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전부라서 한국에 온 것은 아니지만, 꼭 풀어내 보고 싶은 궁금증이기도 했다.
빈센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케이시 렉스였다.
자수정처럼 짙게 물든 자줏빛의 눈이 인상적인, 포르투나 길드의 마스터였다.
“남 좋은 꼴은 못 봐서 찾아온 모양이군. 히든 스킬을 그렇게 뺏고 싶은 거냐?”
케이시의 말에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남이 잘돼서 그런 게 아니고! 히든 스킬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가지는 게 맞아. 운 좋은 어중이떠중이가 쉽게 얻어서는 안 되는 축복이라는 얘기지.”
“그러니까 배 아파서 그렇다는 거잖아. 뭘 이리 돌려서 말해? 너답지 않게.”
“X발.”
케이시의 말이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