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다재다능 (4)
* * *
약 10분 정도.
집중해서 글로리아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살피던 강후가 드디어 침묵에서 벗어났다.
강후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마진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즉사 영역은 응급 상황 대처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본 겁니다.”
“……예?”
“계산이 어느 정도 서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단독으로 트라이해 봐도 됩니까?”
강후의 물음에 마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후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설마 혼자 글로리아를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애초에 그럴 수 없게 설계된 녀석입니다.”
“정공법은 원거리에서 계속 스킬 공격을 퍼부으면서 서서히 죽이는 형태잖아요. 그렇죠?”
“맞습니다.”
“다만 글로리아 자체의 맷집은 상당히 약한 것으로 보이고요. 둘러싼 주변 방어 기제가 문제지.”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면 접근만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싶어서요.”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정공법을…….”
“편하게 예스, 노만 말씀해 주세요. 혼자 도전해 봐도 됩니까? 안 됩니까?”
강후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마진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잔뜩 찍혀 있었지만.
정작 도전해야 할 당사자는 느낌표가 진하게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뭐가 보이는 걸까?
“아직 저희는 정비 기간이고 하니, 시간이야 많이 남아 있긴 합니다만…….”
“그럼 제가 먼저 실례해도?”
“예. 문제없습니다.”
파앗!
마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후를 중심으로 출발한 다섯 개의 그림자가 공간을 갈랐다.
프슷!
그중 그림자 하나가 살인 광선을 맞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마진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림자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터.
그것보다 강후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에, 그냥 허세나 좀 떨어본 건가 싶었다.
생각이 있었으면 진즉에 자신이 직접 움직였겠지. 겁이 나니 그림자를 보낸 것일 터다.
한데 바로 그때.
파앗!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에 강후는 가장 가까운 그림자가 있던 위치로 자연스럽게 이동해 있었다.
사아아앗!
이어서 살인 광선이 사방팔방에서 대중없이 영역 안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미리 위치를 조정해 뒀던 그림자와 강후의 본체에는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파앗!
다시 한번, 강후가 다음 위치에 있는 그림자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방금 강후가 있던 자리에 또 한 번의 살인 광선이 훑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저런 식으로 10m, 20m를 단숨에 넘어가면서 패턴에 맞게 위치를 잡는 건가?”
방금까지 꽉 다물어져 있던 마진호의 입이 벌어졌다. 어느새 강후는 거리를 절반이나 좁힌 상태.
그 와중에도 남은 그림자는 부지런히 움직였고, 몇 차례의 살인 광선을 능숙하게 피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강후 역시 본체가 위험에 빠질 만한 타이밍에는 절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사실 살인 광선도 문제지만, 눅눅하고 축축한 지면은 그 위에서의 이동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래서 이동할 경로를 잡는다고 해도, 깔끔하게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발이 밑으로 푹 빠진다거나, 혹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 광선이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바로 저승행인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그런 귀찮은 과정을 그림자를 활용한 위치 전환으로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뭔데, 갑자기?”
“대장,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글로리아에게 가는 약 100m의 직선주로를 대뜸 횡단 중인 강후의 모습에 팀원들도 놀랐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겠거니 했는데, 자세히 살피니 정말 강후가 글로리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어? 눈에 보는 대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러다가 살인 광선이 스치기만 해도 죽잖아요!”
“다 얘기했다. 그런데도 간 거다.”
“아니, 저게…… 되나?”
다들 주먹을 꽉 움켜쥐는 모습이었다.
앞서 살인 광선에 희생된 동료들의 최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때도 자기는 안 죽을 자신 있다며 호기롭게 횡단하다가, 비명횡사했던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시체? 수습할 수 있는 흔적 자체가 없었다.
바로 그때.
팟! 팟!
최적의 타이밍을 잡은 강후가 두 번의 그림자 활용으로 순식간에 글로리아 앞까지 도착했다.
안대를 쓴 채, 마치 명상에 잠긴 듯이 서 있는 글로리아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보스 몬스터로 구현이 된 것 같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영원히 잠든 존재.
하지만 그녀를 지켜주는 주변의 수호 영역이 절대 건드릴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강후가 뒤를 돌아보자, 만화처럼 턱이 아래로 쭉 내려간 마진호의 입이 보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고생을 하며 잡아 왔던 글로리아가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상상도 못 해서다.
생각이야 몇 번이고 했었다.
접근하면 정말 쉽게 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하지만 생각이 현실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강후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스킬로 손쉽게.
힘껏 도약 스킬을 전개하며 글로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탄 강후가 단검을 움켜쥐었다.
완전 무방비 상태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글로리아가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기에.
그리고.
푸우우욱!
대참수의 파괴력이 제대로 실린 강후의 단검이 글로리아의 왼쪽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심근을 찢고, 그 안까지 균열을 내버린 단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글로리아의 목숨을 앗아갔다.
【레벨이 대폭 올라 130이 되었습니다.】
【대상으로부터 공명의 시야 스킬을 성공적으로 강탈했습니다.】
“이거지.”
짜릿한 레벨업의 쾌감에 강후의 코끝이 벌렁거렸다.
미들 보스 몬스터 에닥스를 잡았을 때, 예상했던 최종 레벨 스코어는 최대로 잡아 120이었다.
한데 경험치를 독식하는 바람에 그 이상으로 레벨이 뛴 것이다.
강후의 기여도 100%. 다른 헌터들의 기여가 티끌만큼도 없었던 완벽한 1인 식사였다.
폭발적인 레벨업.
공명의 시야라는 스킬의 강탈.
호재는 이것만 있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고 숨이 끊어진 글로리아가 한 줌의 재로 산화하면서 남기고 간 것은.
“빨간색 마석이 나왔어요?”
그 정체를 알아본 마진호의 외침대로 빨간색 마석 반 개와 주황색 마석 1개였다.
빨간색 마석은 1개의 기본 단가가 1,000억 원을 호가한다.
즉, 반개라고 해도 시장 가치가 무조건 500억 원은 확정인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
‘전리품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하얀 전쟁 덕분에 수지 맞았군.’
매번 심각하게만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하얀 전쟁이었다.
하지만 하얀 전쟁 때문에 생긴 용병 품귀 현상으로 덩달아 출혈 딜러의 가치도 올라갔고.
그 덕분에 출혈 딜러가 꼭 필요했던 공격대 입장에서 전리품 우선권까지 제안을 해야 했다.
사실 주황색 마석 하나만 나왔어도 대박이라고 했을 상황.
하지만 빨간색 마석이 나왔으니 배가 잔뜩 아파질 것은 마진호와 그루 길드 쪽이었다.
물론 정해진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신의의 문제니까. 이래저래 강후만 제대로 이득을 보게 됐다.
글로리아에 대한 경험치 역시 강후를 제외한 나머지는 조금도 얻지 못했다.
* * *
뒷수습을 마무리하고 나온 강후는 바로 빨간색 마석과 의뢰비 정산부터 진행했다.
착수금, 잔금, 그리고 마석 정산까지 전부 합산해서 입금을 받고 나니 잔고가 850억 원이 됐다.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50억 원이 아슬아슬했던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루 길드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빨간색 마석과 함께 드롭된 주황색 마석 1개를 챙기기도 했고.
중간의 일반 몬스터 정리 구간에서 마석 벌이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공격대 전체 정산 금액으로 따진다면, 못해도 200억 원쯤은 챙긴 셈이었다.
개인 분배를 균등하게 해도, 한나절의 공략으로 20억 원 이상은 챙긴 셈이다.
보통 이것이 일반적인 공략 후 분배금 규모였다.
한데 글로리아가 죽으면서 정말 예상치도 않게 빨간색 마석을 드롭해서 얘기가 달라진 것이다.
마진호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글로리아를 잡은 횟수는 직접 센 것만 100번은 넘는다고 했다.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던 것까지 합치면 곱절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빨간색 마석은 반 개가 아니라 티끌만 한 조각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인데, 전리품 우선권을 강후에게 주었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마진호의 배려로 팀 전체 정산에 앞서 우선 정산이 끝난 강후에게 여유가 생겼다.
다들 강후에게 양질의 전리품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빠른 공략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글로리아 건을 제외하면 경험치도 착실하게 챙겼으니, 사실 크게 불만을 가질 것도 없었다.
강후가 마른 목을 시원한 물로 축이며 숨을 돌리는 동안, 글로리아에게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공명의 시야】
【스킬 숙련도 : Lv. Max】
【중독이나 스킬 강제로 인한 실명 상태에 걸려도 시각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공명의 시야는 사용자로 하여금 세상을 흑백의 형태로 파악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초당 0.5의 마나를 실명 상태일 경우만 자동 소모하며, 마나가 부족하면 능력이 제한됩니다.】
디테일하게 적혀 있긴 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실명 면역이라는 뜻이었다.
눈이 멀어도 공명을 통해서, 흑백 화면 형태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색감을 잃는 것만 제외하면, 평상시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셈.
‘야시가 있으니 밤에도 문제없고. 공명의 시야로 실명인 상황도 대처가 가능하고…….’
핸디캡이 이렇게 하나둘씩 지워지고 있다. 자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발걸음이다.
눈은 정말 중요하다.
괜히 눈에 상처를 입은 헌터들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것이 아니다.
전투력만 줄어드는 수준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고, 뜻하지 않게 던전에서 죽는 경우도 흔했다.
왜곡되고 제한된 시야가 그만큼 정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변수에 대한 대응도 느리게 만든다.
상처만으로도 저런데, 실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헌터라면, 그 즉시 적의 노림수에 의한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오늘은 좀 뿌듯하네.’
빈틈을 못 찾았더라면 글로리아 공략은 구경꾼1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텐데.
‘그림자 걸음’이라는 효율 좋은 위장, 위치 전환 스킬이 있는 덕분에 큰 이득을 봤다.
새삼 빙의한 이후, 착실하게 강탈해 온 스킬의 가치를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역시 스킬은 다다익선이다.
모아 두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쓸 일이 온다.
그리고 오늘 글로리아에게 얻은 공명의 시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후가 자신의 실명 공격에 눈뜬장님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미래의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카운터펀치를 선사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