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다재다능 (3)
* * *
“일단 정산까지 하고 쉬실까요? 우선권이 있으신데, 당연히 이걸 선택하실 듯해서.”
전리품 정산 과정에서 마진호가 강후에게 내민 것은 시가 100억 원 상당의 주황색 마석이었다.
에닥스가 드롭한 마석이 주황색 하나, 노란색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물론 우선권을 양보한 그루 길드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상황이기도 했다.
강후는 혼자 100억 원을 챙겼고, 나머지 아홉은 10억 원짜리 마석을 나눠 분배하게 됐으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에닥스를 사냥하고 나서도 이렇게 체력 관리가 잘 된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일단 피스치스 구간에서 진을 다 빼고. 거기에서 피로가 누적된 상태로 여기까지 오죠.”
“한 번 더 쉽니까?”
“그건 너무 모양이 빠지니까 에닥스까진 잡습니다. 대신 그러고 나면 무조건 12시간 휴식이죠.”
마진호가 뒤에서 쉬고 있는 팀원들을 보며 웃었다.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휴식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모두 넝마가 되어서, 바닥에 드러누워 쉬기 바빴을 타이밍이다.
강후는 에닥스에게서 강탈한 패시브 스킬, 순풍의 속삭임이 가장 큰 만족이었다.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고도 스탯을 영구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메리트다.
나중에는 모든 부위에 아이템을 착용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아이템으로 추가 스탯을 끌어올리는 작업이 매우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그 시점부터 착실하게 레벨업으로 투자해 온 스탯과 이런 영구 스탯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마진호가 물었다.
“이런 식으로 공격대에 용병으로 자주 나오신 건가요?”
“아뇨. 출혈 딜러로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예?”
마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행이라고 하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강후의 움직임이 너무 깔끔했기 때문이다.
“솔플이나 소규모 인원 공략을 자주 해서, 몬스터와 일대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게 크죠.”
“아. 공략 인원 자체를 최소화하는 쪽을 선호하시는군요.”
“경험치를 너무 많이 나눠 먹게 되면 맛이 없잖아요.”
“아, 그건 인정합니다.”
마진호가 웃었다.
어쨌든 출혈 유지를 주목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얘기였다.
어떤 쪽으로 생각해도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기는 했다. 강후의 모든 움직임이 너무 깔끔했기에.
“요즘 암살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신강후 님이 완전히 바꿔 주셨습니다.”
“좋은 암살자 구하기가 어렵긴 하죠. 센스 있는 힐러 구하기 어렵듯이.”
“그러게요. 다들 반신반의했는데, 지금은 아마 신강후 님의 팬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진호가 뒤를 쓱 돌아보자, 다들 강후를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웃기도 하고, 강후에게 힘껏 손을 흔들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칭찬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공격대 대미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좋아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화끈한 맛은 있네요.”
“저희 길드 최정예들만 모은 겁니다. 그루 1팀이라고도 부르죠.”
“그루 1팀이라…….”
“길드 마스터, 부 길드 마스터가 오시면 저는 바로 2팀으로 쫓겨납니다. 하하.”
마진호의 말대로 그루 길드의 서열 1위, 2위이자 동시에 친자매이기도 한 두 사람은.
마진호처럼 검을 다룰 줄 아는 검사이자 메인 탱커였다.
그가 거구의 몸과 탄탄한 방어력으로 묵직하게 전장에서 중심을 잡는 스타일이라면.
두 사람은 현란한 스킬 활용과 연계를 바탕으로, 몬스터를 늪처럼 잡아 두는 쪽에 속했다.
도발뿐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스킬을 활용해 몬스터 무리의 기동성을 크게 낮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둔화 지대를 만든다거나, 몬스터에게 이동 능력 저하 디버프를 거는 식으로.
그녀들을 지칭할 정확한 단어가 없기에, 보통은 별칭으로 ‘디버퍼 탱커’라고 불렀다.
‘만나 보고 싶군.’
특이한 형태 혹은 능력을 가진 헌터는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원작에서 두 자매는 그저 그루 길드의 주인으로서 간단히 언급만 되고 지나갔었기에.
이번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디버퍼 탱커라. 꽤 재밌을 듯했다.
* * *
그 시각.
콰앙!
서로 술잔을 기울이던 형제 중, 동생이 병과 잔을 올려놨던 탁자를 내리쳤다.
강화된 목재로 만든 나무 탁자였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왜 이리 흥분을 하고 그래.”
“형은 화가 안 나? 이번에 정리된 우리 이클립스 내부 서열도를 보라고. 이게 정상이야?”
“……X발.”
애써 내용을 외면하고 있던 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 살 터울의 친형제인 두 사람의 이름은 최진호, 최진수. 이클립스의 간부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간부도 급이 나뉘는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급이 좀 떨어지는 하급 간부로 분류됐다.
던전 라이센스 관리라는 한직에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
형인 최진호가 서열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위에 있던 진효영이 죽었는데도 우리 인사이동은 왜 적체 상태냐는 말이지…….”
“하다못해 추적자 부대 관리라던가, 추적자 5팀이나 6팀장 자리는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둘은 불만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상태였다.
예전에 차소희가 죽었을 때도, 간부 전반의 보직 이동이 있었다. 당연히 한 단계 상승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최진호 형제는 보직 이동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아래에 있었던 간부들이 차소희의 죽음을 계기 삼아 위로 올라갔다.
즉, 형제의 자리를 제치고 사실상 두 계단씩의 서열 상승을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참았다.
대장인 강동현이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아래 등급의 간부로 부리던 헌터들이 이제는 윗선으로 올라가 버린 상황이었다.
“X발. 한 번에 두 명이 뒈져야 우리 자리가 나는 건가?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그냥 대장한테 가서 들이박을까? 우리가 이클립스에 기여한 게 있잖아!”
“됐어. 강동현 대장 앞에 가서 쓴소리하고 살아남은 놈 봤냐?”
“그러면 언제까지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어야 하는데? 형, 우리도 딸린 식구가 있잖아.”
최진수가 말한 ‘식구’는 가족이 아니라, 두 형제가 부리는 부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어쨌든 자기들을 형님이랍시고 따르는 부하들이 있는데, 이래서야 위신도 안 서는 것이다.
잠시간 적막이 흐른 뒤.
입술을 질끈 깨문 최진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수야.”
“어?”
“아무래도 우리가 현상금 사냥꾼이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무슨 현상금?”
“요즘 대장 관심이 온통 신강후 그 망할 새끼에게 가 있잖아. 그놈을 죽이면, 포상금에 아이템에 승진까지. 삼위일체야.”
“형. 만만한 놈이 아냐. 차소희도 죽고, 진효영도 죽었다고. 우리보다 센 애들이었어.”
“멍청아. 그년들은 자기들 잘난 맛에 혼자 움직였잖아. 우리는 다 움직이면 머릿수만 스물이야.”
“음…….”
“적당히 총알받이를 갖다 쓰면서 우리 주특기를 살리면, 신강후라고 해도 별수 없어.”
“애들을 좀 던져주고, 마탄으로 저격하자?”
“그렇지. 암살자가 아무리 맷집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헤드샷 한 방이면 끝이야.”
“그래. 쪽수에는 장사 없지. 타이밍은 한 번이면 되고.”
최진호, 최진수는 둘 다 거너였다. 정확하게는 반세영처럼 장거리 저격이 전문인 저격수였다.
“그래. 살길을 우리가 뚫는 게 맞지. 매번 떨어질 감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애들 준비시켜. 던전 관리는 신입 한두 명만 붙여놔도 충분할 테니까.”
“희생이 좀 있을 텐데 괜찮을까?”
“X신아. 그렇게 부하들 아끼다가 우리까지 도태되면, 그땐 우리도 죽어.”
“……빌어먹을.”
“준비하자. 신강후 그놈, 자주 출몰하는 곳부터 정보를 수집해 보자고.”
그렇게 두 형제가 움직였다.
강동현이 이클립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한 척살 명단은 분명 파급력이 있었다.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최진호 형제였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만은 아니었다.
대장의 총애를 얻고 싶은 이클립스의 헌터에게 척살 대상자는 정말 매력적인 먹잇감인 것이다.
* * *
앞서 미들 보스 몬스터 구간까지 별 탈 없이 진행된 덕분인지.
이후에 메인 보스 몬스터 구간까지도 아무 사고 없이, 원사이드 게임으로 공략이 진행됐다.
얼마나 공략이 잘 풀렸냐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체력, 마력 포션을 한 번도 안 썼을 정도.
매번 가져온 포션은 다 썼었다는 마진호의 말과 달리, 이번에는 포션 가방을 연 적이 없었다.
레벨도 벌써 113이었다.
출혈 셔틀만 했다면 기여도가 낮아 경험치 쪽에서 재미를 거의 못 봤겠지만…….
강후는 공략하는 내내 적극적으로 대미지 딜링에 임했고, 그만큼의 결과를 얻었다.
이런 흐름이면 보스 몬스터까지 잡을 경우, 잘하면 레벨 120까지 기대해 봐도 될 상황.
고레벨 던전에서 무려 레벨 10 이상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레벨 던전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으면, 경험치를 티끌만큼도 얻어갈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이 노력의 산물인 만큼, 불로소득으로 얻은 부분은 없다.
“하아……. 이제 가장 지루하고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네요. 글로리아.”
마진호가 정면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가리켰다.
강후도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마진호가 한숨을 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글로리아는 신장이 5m쯤 되는 거인형, 여성형 보스 몬스터였다.
글로리아의 특이한 점은 눈 전체를 안대로 가린 채, 허공에 떠 있다는 점이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진행했었던 사전 브리핑에 따르면,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고는 한다.
타락한 세상을 더 이상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글로리아가 스스로 눈을 파버렸다고 했던가?
어쨌든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글로리아는 세상을 다른 형태로 보게 되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체적으로는 공격 능력이 ‘전혀’ 없는 보스 몬스터였다.
비슷한 케이스를 찾자면.
예전에 강후가 정유리와 함께 공략했었던 보스 몬스터 레간트를 닮았다.
당시에 레간트는 강후의 손길이 닿자마자 소멸됐고, 그때부터 던전의 붕괴가 시작됐었다.
레간트에게는 공격 능력이 없었지만, 던전이 붕괴되는 것이 일종의 공격 방식이었다.
글로리아는 조금 달랐다.
가까이 접근만 하면 손쉽게 죽일 수 있는데,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 영역이 문제였다.
얼마나 문제인가 하면, 까딱 잘못 접근했다가는 즉사 공간에 걸려 죽을 수 있었다.
대미지를 입거나, 부상을 입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즉시 죽는 것이다.
보호 영역 안에 즉사 영역이 수시로 바뀌면서 접근하는 헌터들을 위협하고.
더 나아가 영역 외곽에서 즉사기 형태의 공격이 불규칙한 패턴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것을 마진호는 ‘살인 광선’이라고 불렀는데, 스치기만 해도 몸이 한 줌의 재가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글로리아 공략은 항상 원거리에서 꾸준히 대미지를 쏟아붓는 형태로 진행했다고 했다.
출혈 유지도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오랜 시간, 스킬만 쏟아부어야 하는 노동에 가까운 작업.
그래서 다들 장기전을 대비해 체력을 보충하는 고열량의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강후만이 아까부터 계속 글로리아와 주변을 살피며, 시선을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마진호가 옆에서 말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마진호가 말했다.
“무슨 생각 하고 계신가요? 이 녀석은 출혈 유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강후가 물었다.
“즉사 공간만 돌파하면…… 글로리아 자체의 맷집은 정말 약한 편인 거죠?”
그 순간, 마진호는 생각했다.
혹시 이 ‘미친’ 암살자가 예상하지도 못한 색다른 공략 방법을 떠올린 것은 아닌가 하고.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해내는 강후이기에 자연스럽게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