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다재다능 (2)
* * *
전략은 단순했지만, 과정엔 디테일함이 있었다.
정면에서 피스치스의 관심을 끌었던 강후는 진짜 강후가 아니었다. 분신으로 만든 가짜였다.
분신의 움직임이 허술했더라면, 피스치스도 이상함을 깨닫고 관심을 돌렸겠지만.
분신 자체의 육체 능력까지 활용하면서 대응한 강후의 연계는 말끔했다.
녀석이 제대로 속았다.
피스치스가 분신에 주의를 잔뜩 빼앗겼을 때, 강후는 횡 이동으로 녀석의 후방으로 이동한 뒤.
기교의 장막을 깔고, 거기에 무영을 연계해서 소리 없이 구동 장치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전투에 잔뜩 몰입해 있던 터라, 피스치스도 후방에 또 다른 강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강후의 작전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챈 팀원들은 내려온 도개교를 따라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전에 없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스치스를 상대로 헛심 쓸 것 없이, 너무 깔끔하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거구의 몸뚱이를 가진 피스치스는 다리 반대편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분노를 표출할 뿐이었다.
이내 상황 파악을 마친 강후가 다리에서 팀원들에게로 합류하자, 마진호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시간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단축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놈이 죽어야 열쇠를 얻는 것도 아니고, 구동 장치만 돌리면 되는 거니까 머리 좀 써 봤죠.”
강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이런 레퍼토리에도 익숙해지기는 해야 한다.
상위, 최상위 던전으로 갈수록 조건부로 길이 뚫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문지기 피스치스는 그런 레퍼토리 중에 그나마 단순한 축에 속했다.
어떤 곳은 정체불명의 문자들을 해석하고 정렬해서 맞춰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곳은 어느 몬스터는 잡고, 어느 몬스터는 살려둬야만 길이 뚫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무식하게 힘으로만 던전을 공략하는 팀들은 레벨 4, 500을 전후로 도태되곤 했다.
진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진호가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신세 졌습니다.”
“어쨌든 한 팀이니까요. 체력을 아끼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됐군요.”
“분신, 붕신. 라임 아주 좋았습니다. 지켜보다 애들이랑 웃었네요. 노리신 건가요?”
“큭, 그럴 리가.”
딱히 노린 건 아니었는데, 아재 개그처럼 재밌게 들렸던 모양이다.
하기야 강후의 얼굴을 보면, 농담의 니은도 안 꺼낼 것 같은 얼굴이라 더 그런 구석도 있다.
개그맨이 애드리브를 하는 것보다, 잘생긴 연예인의 ‘개드립’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원리겠지.
시간이 제법 걸릴 줄 알았던 구간을 순식간에 돌파한 덕분에 공략에 속도가 붙었다.
당초 계획대로면 피스치스를 제압하고, 도개교를 건넌 뒤에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모된 체력 없이, 오히려 팀의 사기가 대폭 올랐다.
강후가 출혈 딜러의 역할 외에도 지능 캐릭터 역할까지 해 주자, 기대감이 고조된 것이다.
“이젠 구경하셔도 됩니다. 얘네는 회복 패턴이 형편없어서 그냥 딜로 잡으면 됩니다.”
“임의로 보조해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야 감사하죠.”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볼 수도 있었지만, 강후는 일부러 전투에 참여했다.
레벨 400대의 몬스터를 상대해 볼 기회가 흔하게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격이 녀석들에게 얼마나 박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울러 난이도를 점검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미리 체험해 둬서 나쁠 건 전혀 없다.
“흐아아!”
강후가 기합과 함께 몬스터들을 잔뜩 도발하는 마진호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가 도발로 주변의 몬스터를 강제로 끌어들이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강후마저 도발에 끌려갔을 것처럼 영향력이 훌륭했다.
물론 감탄만 하지는 않았다.
강후는 도발에 걸리지 않은 몬스터들 사이로 그림자와 환영, 분신을 나눠 보냈다.
몬스터들이 똑똑한 건 아니어서, 일단 동족이 아닌 불청객이 보이자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몰이였다.
강후가 타격하기 좋게 몬스터를 뭉쳐놓은 것을 확인한 궁수, 마법사들이 광역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한 번의 공격으로도 몬스터 네댓 마리가 골고루 피해를 입는 효율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주력의 대미지는 마진호 쪽으로 집중됐지만, 남은 보조 대미지도 강후 덕분에 알차게 쓰였다.
효율 100%.
그렇게 몬스터 소탕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강후의 움직임을 본 마법사 하나가 궁수이자 베테랑인 김지혜에게 말했다.
“누나, 이런 경우는 처음 보지 않아요? 난 암살자 클래스가 몬스터 모아 주는 건 처음 봐요.”
“그러게. 보통은 몬스터의 뒤를 잡으려고 하거나, 치고빠지기를 할 타이밍을 보는데.”
“그러니까요. 근데 그림자나 환영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니, 오히려 공격적으로 움직여 주네요.”
“엄청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환영이든 분신이든 그림자든. 어느 것 하나 엉성하게 움직이는 게 없어.”
“왜 차소희가 죽었는지 알겠어요. 저런 방식이면 어디에 진짜가 있는지 쫓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러게 말야……. 섬뜩하네. 그동안 너무 짐살자들만 봐와서 그런지, 갓살자는 적응이 안 돼.”
“망할 짐살자 새끼들…….”
짐살자.
‘짐만 되는 암살자’의 줄임말이다.
지나치게 후방 공격, 은신 공격에만 치중해서 수동적인 공격 패턴을 추구하는 암살자를 말한다.
사실 단체 공략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 역할군이 자연스럽게 스위칭될 수 있어야 하는데.
암살자에 과몰입한 헌터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습! 이 명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팀원들이 밥상을 차릴 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레벨 200 미만의 구간에서 암살자 직업군 기피 현상이 생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클래스 존재 이유에 충실한 건 좋은데, 너무 융통성이 없다 보니 답답할 수밖에.
하지만 강후는 지금, 전장에서 암살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서브 탱커의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어 한곳에 모아주는 것으로도 탱커의 덕목인 ‘도발’이 성립되니까.
“좋아요, 좋아! 정말 좋아요!”
강후의 노력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은 팀원들이 힘껏 격려하며, 스킬 연계에 더 집중했다.
출혈 셔틀만 해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능동적으로 판을 짜주는 멋진 용병이 왔다.
시작부터 정말 대만족이었다.
* * *
이후, 공략에 속도가 붙은 공격대는 바로 미들 보스 구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문지기 피스치스 구간에서 체력을 완벽에 가깝게 아낀 것이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게다가 중간의 ‘잡몹’ 구간에서도 마진호와 강후가 합을 맞춰 그림을 그린 덕분에.
주요 딜러를 담당하고 있는 네 명의 마법사와 궁수는 정말 편한 사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미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에닥스(Edax).
도마뱀 형태의 몬스터로 기괴하게 큰 입이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출혈이 잠깐이라도 끊기면, 체력이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우르르 올라가는 것이 특징.
그래서 어떤 출혈이냐를 떠나, 출혈을 절대 끊기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투에 돌입하자마자 마진호와 강후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딜러들은 강후가 적당하게 패턴을 살피면서 몸을 사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굳이 플레이 타임을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은 강후는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패턴을 살폈다.
그리고.
와작!
에닥스의 가장 까다로운 패턴인 ‘크게 깨물기’에 숨겨진 사전 동작을 파악했다.
정조준 스킬로 에닥스의 몸뚱이 여기저기를 확대 관찰하면서 얻은 성과였다.
‘크게 깨물기를 하기 직전에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비늘 방향이 사선으로 미세하게 올라가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
스스로는 너무 당연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습관.
야구에서는 이런 습관을 간파당한 투수가 어느 날 갑자기 인정사정없이 통타당하곤 한다.
스포츠야 그렇게 습관을 분석을 당한다고 해도, 고치면 그만이고, 목숨의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헌터의 세계는 다르다.
적에게 습관을 파악당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흐름이 뻔해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진호를 상대하다가 흘깃 후방의 강후를 살핀 에닥스의 복부 비늘 방향이 사선으로 틀어졌다.
다음 순간.
【신속 회피】
와작!
강후가 신속 회피를 시전하며, 에닥스의 깨물기를 피했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오!”
“와! 완전 아슬아슬했어!”
“미리 예측한 건가?”
강후에게 방해가 될까 봐 다들 내색은 안 하고 속으로 숨죽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에닥스의 깨물기는 방어력을 극대화한 마진호 입장에서는 적당히 받아낼 수 있는 일격이지만.
강후 같은 암살자에게는 일격에 몸이 반토막이 날 수도 있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쉽게 공격을 피했고, 무방비 상태가 된 에닥스에게 연계 공격을 퍼부었다.
사족 보행류 몬스터이다 보니, 노림수가 실패했을 때 그다음 동작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순식간에 쌓인 출혈 중첩이 10중첩이 되면서 회복 억제가 되고.
이어 최대치인 50중첩까지 신속하게 오르면서, 과다 출혈 상태로 전환됐다.
과다 출혈 상태가 되면, 임의의 확률이기는 하지만 회복을 시도하다가 거꾸로 체력이 더 깎이는 경우가 존재했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을 헌터들은 ‘데스힐’이라고 부른다.
회복은 됐는데, 죽는 쪽으로 마이너스 회복이 됐다는 그런 뜻.
50중첩에서만 발동되는 과다 출혈 상태에서는 이런 데스힐 현상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쿠에에에엑……!”
급격히 빠진 체력을 확인하고서 회복을 시도하던 에닥스가 걸쭉한 침을 토해내며 비명을 질렀다.
데스힐에 걸린 것이다.
때아닌 대형 사고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에닥스가 화풀이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앞에서 태산처럼 버티는 마진호는 어려우니, 아까부터 귀찮게 굴던 강후를 죽일 참이었다.
【신속 회피】
와작!
첫 번째 깨물기 실패.
【환영술】
펑! 퍼펑! 펑! 펑!
만들었다가 일부러 해체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만들어낸 정신 사나운 연막 효과.
와작!
【그림자 걸음】
그림자를 활용한 위치 전환으로 두 번째 깨물기도 실패. 세 번째, 네 번째도 실패.
심지어 마지막에는.
와작!
【귀요미!】
에닥스가 으스러뜨리겠다는 독기로 깨물은 것이 강후가 아니라, 뜬금없이 만들어진 슬라임이었다.
여기서 에닥스의 남은 인내심과 이성을 간신히 유지하던 끈이 시원하게 끊어졌다.
차분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멍청한 미들 보스 몬스터. 녀석이 맞이할 미래는 밝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억제된 회복 속에서 저승행 급행열차를 탄 에닥스가 결국 집중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기여도가 적었다면, 미들 보스 몬스터를 잡고도 스킬 강탈을 활성화할 수 없었겠지만.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덕분에 강후는 에닥스의 스킬 하나를 보기 좋게 강탈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풍의 속삭임】
【스킬 숙련도 : Lv Max】
【영구적으로 ‘민첩’이 100 상승합니다.】
그간 체력에 투자하느라 꼼꼼하게 돌볼 틈 없던, 민첩 스탯에서의 든든한 소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