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다재다능 (1)
* * *
공략 일정이 확정됐다.
오후 6시로.
그리고 정오부터 전체 브리핑을 진행하도록 하고는 모두 최종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내려온 강후는 딱히 챙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일찌감치 출발 준비를 해 뒀던 대장 마진호도 마찬가지.
덕분에 할 일이 없었던 둘은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계획에 없던 즉흥적인 자리였다.
“출혈 찌르기 보유자는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애초에 암살자가 품귀이기도 하고요.”
마진호는 얘기하는 내내 근처를 날아다니는 날파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아무리 큰 덩치를 가졌다고 해서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이해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훈련을 좀 많이 했습니다. 출혈로 먹고사는 직업이기도 하잖아요.”
“지금까지는 광전사 쪽으로 많이 구했거든요. 아시다시피 레벨 1 기본 스킬이 숙련도 최대가 되면 출혈 발동이 쉬워지니까.”
“그러셨겠죠.”
“하지만 광전사는 더 구하기가 힘드니……. 이래저래 상위 던전 가기가 참 힘드네요.”
“본격적으로 출혈 유지가 강제되는 던전 레벨이 한 400쯤 되죠?”
“맞습니다. 이때부터 출혈 없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던전이 태반이죠.”
원작의 설정대로였다.
이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될 수 있던 암살자와 광전사가 위로 갈수록 주목을 받게 된다.
괜히 정화 길드 같은 곳에서 암살자와 광전사 클래스를 애지중지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상위 던전에서는 쓸모가 엄청 크기 때문이다. 아니, 없으면 공략 성립이 안 된다.
“밥벌이는 열심히 할 생각으로 왔습니다. 대미지 딜링은 제가 임의로 보태겠습니다.”
“출혈 유지만 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애초에 계약 조건이 그렇기도 하고요.”
마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후를 제외하고, 9인 극딜 공격대로 짰기에 화력에서의 걱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강후가 소소하게 대미지까지 보태준다면야, 금상첨화이기는 할 것이다.
그때, 마진호가 잠깐 멈췄던 말을 이어 붙였다.
“혹시 이번 던전 공략에서 만족할 만한 호흡이 되면, 다음 공략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강후로서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사실 다른 부분으로 요청을 강후가 먼저 해야 했던 참인데, 멍석이 깔렸다.
아쉬운 소리를 상대방이 먼저 하면, 이를 빌미 삼아 요구를 당당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진호의 입장에서는 귀한 출혈 딜러를 이렇게 구했으니까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조급한 마음이 뜻하지 않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일정을 보긴 해야겠지만, 가능하긴 할 겁니다. 다만 협의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탐사를 다녀와 보고 싶은 던전 하나가 있습니다. 그루 길드 소유의 던전입니다.”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던전 공략이 목적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임밸런스 포인트에 다녀오는 것이 목적이다.
일전에 한 번 재미를 봤고, 국내에선 제주도에 있는 이 던전이 마지막 포인트였다.
그리고 남은 세 개의 포인트 중의 하나는 일본에 있다. 두 곳의 위치는 원작에서도 미상(未詳).
“공략이 아니라 탐사요?”
“네. 내부 풍경이 정말 예쁜 곳이 있다고 해서요. 외부인은 갈 수 없는 던전이라 들었습니다.”
“아하. 탐사 정도라면야 문제 될 것은 전혀 없긴 합니다만…….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죠.”
“감사합니다.”
협의가 무난하게 끝났다.
임밸런스 포인트는 그 존재 자체가 사기다. 이 세계의 빈틈을 상징하는 불균형의 증거이기도 하다.
레벨이 최소 2, 30은 거뜬히 오를 수 있는 만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후가 화제를 돌렸다.
“제주도는 평화롭죠?”
“완벽하게 중립이라 가능한 평화죠. 예외가 없으니까. 여긴 누가 와도 평등하게 취급받습니다.”
“공항에서부터 보안이 상당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주도가 평화롭다는 사실을 알고, 그 품에 숨어들려는 개새끼들이 많죠.”
가감 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마진호의 눈빛에는 나름의 정의감이 물씬 묻어났다.
실제로 그는 도내에 잠입해 들어왔던 외부의 범죄자 헌터를 직접 체포한 경력이 상당히 많았다.
말이 체포지, 거의 반병신을 만들어서 데려오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범죄자들도 두려워했다.
“민간인들은 잘 지냅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길드 마스터, 부 길드 마스터 두 분이 자매라서 그런지 세심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여성 헌터나 민간인도 정말 많이 살고 있고요.”
“마음 편히 밤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겠네요.”
“그렇죠. 매년 서울 다음으로 살기 좋은 도시 2위를 차지하는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마진호가 웃었다.
순간 눈빛에 뭔가 많은 생각이 묻어나는 듯한 것이 나름의 사연이 있는 듯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강후가 꺼낸 화두가 그의 깊은 감정을 자극한 것 같았다.
어쩌면 치안에 관련된 이슈로 소중한 사람이나 지인을 잃은 경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출혈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된다면 무리하지는 마십쇼.”
“그럼 밥값이 안 되잖습니까.”
“그건 나중 얘기고. 목숨은 누구나 귀하니까요. 처음 본 동료라고 해도, 눈앞에서 잃고 싶진 않습니다.”
“기억해 두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비를 주고 고용한 용병이라고 해서 도구처럼 쓰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마진호의 험상궂은 외모만 제외하면, 내면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규모가 큰 길드의 3인자로서 원만하게 많은 것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일지도.
* * *
오후 6시.
상세 브리핑과 질답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수준 높은 던전이기는 해도, 던전 자체의 규모가 큰 것은 아니기에 전투 식량은 조금만 챙겼다.
몸이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강후는 던전에 입장하기에 앞서 거의 배를 채우지 않았다.
진짜 많이 먹어야 샌드위치 반쪽 정도? 어지간해서는 속을 비우고 출발하는 편이었다.
입장하자마자 강후는 테스트 차원에서 양해를 구하고, 몬스터 하나와 일대일을 붙었다.
‘누적 대미지를 늘릴 수는 있는데 혼자는 진짜 어렵군.’
결론은 빨리 나왔다.
능숙하게 출혈 유지를 바탕으로 회복을 억제할 순 있었지만, 다들 체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잡으려고 하면 한 놈씩 잡을 수는 있겠지만, 효율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했다.
강후는 아쉬워했지만.
사실 일대일을 지켜보던 다른 헌터들과 마진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레벨 100을 갓 넘긴, 그것도 암살자 헌터가 몬스터와 일대일이 가능할 수 없어서다.
강후는 자신의 부족한 대미지와 길어질 플레이 타임을 탓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레벨이 네 배 차이나 나는 몬스터를 아무렇지 않게 노리는 패기를 높게 평가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정말 솔플도 가능할 것 같아서 놀라기도 했다.
몸풀기가 그렇게 끝났다.
강후는 지금까지 공략해 온 던전과는 조금 다른 몬스터의 생리를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첫 번째 공략 포인트는 앞서 브리핑에서 공유된 정보대로 구조 자체는 단순했다.
엄청난 체력과 맷집으로 떡칠 된 문지기 몬스터가 도개교 형태로 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의 타워 브릿지처럼 다리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당연히 문지기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도개교는 다리가 최대치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
녀석을 제압하거나 혹은 별도의 방법으로 구동 장치를 운전해야만 양쪽을 이을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이 억제되는 왜곡 영역이 폭넓게 펼쳐져 있고, 도약으로 넘기엔 떨어진 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길었다.
즉,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도 도개교를 이어 주지 않으면 답이 없는 상황이다.
사전 브리핑에서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문지기 몬스터를 찍어누르자는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정공법이기도 하고, 다른 방법이 딱히 없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오자, 강후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차피 문지기 몬스터는 말 그대로 문지기라서 주는 보상도 시원찮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녀석을 공들여서 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괜히 체력 관리만 애매해질 뿐.
“잠깐. 제게 한 3분 정도만 주시죠. 쉽게 다리를 통과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다리가 연결됐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달릴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준비야 항상 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생각이신지……?”
“녀석이 순찰이랍시고 가장 멀리 나와 있으니까, 일단 타이밍을 한 번 노려보겠습니다.”
쌔앵!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의 모습이 마진호와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없어진 강후의 위치를 다시 특정했을 때, 이미 그는 저 멀리 도착해 있었다.
문지기 몬스터, 피스치스.
붕어 대가리에 이족 보행의 인간형 모습을 한 녀석은 날카로운 삼지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삼지창의 끝에는 검붉은 액체가 발라진 상태였는데, 마비독이거나 실명독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대놓고 관심을 끌어버리면, 아무리 붕어 대가리여도 목적을 뻔하게 알겠지.’
피스치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쓸만한 옵션은 많았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때로는 상대의 지능을 높게 생각해 두는 것이 전략을 짜는 과정에 도움이 될 때도 많고.
강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간 숱하게 공략한 이곳에서 정공법 외 전술은 아무것도 통한 것이 없는데 무슨 생각인 걸까?
【환영술】
강후는 먼저 환영을 여럿 만들어 내서 간을 봤다.
전에 재미를 봤던 것처럼, 환영 중 하나를 본체처럼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 냈다.
실제 본체는 단검을 옷소매 속에 넣은 상태였고, 가짜 환영이 단검을 보란 듯이 들고 있었다.
“부웅! 부웅!”
붕어 대가리라서 붕붕 대는 건진 모르겠지만…… 피스치스가 위협적으로 삼지창을 찔러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삼지창이 환영 하나를 손쉽게 분쇄해 버렸다.
사라진 환영이 흩어지면서 연막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강후가 그 틈에 그림자 걸음을 전개했다.
피스치스는 강후가 자신의 눈을 속이고 장치로 이동하려는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지만.
오히려 강후는 아무 생각 없었다는 듯, 정면에서 피스치스를 그대로 덮쳐오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위하듯이 피스치스와 거리를 몰아붙이는 상황이었다.
“부웅! 붕!”
피스치스가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에서 달려드는 강후를 향해 삼지창을 뻗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움직임이었다는 듯이, 강후는 상승 도약으로 삼지창을 피해냈다.
오히려 피스치스의 삼지창 윗면을 디딤대로 삼아, 한 번 더 녀석의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우웅!”
피스치스가 기민하게 삼지창을 휘둘러 위를 노렸다.
강후가 예측을 한 번 깨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만큼 피스치스는 자신의 피지컬에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그때.
스파앗!
강후의 위치가 다른 그림자가 있던 곳으로 바뀌었다.
그림자 걸음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위치 전환 능력.
덕분에 피스치스의 일격은 애먼 그림자만 가르고 말았다.
자꾸 약이 오르기는 했지만, 어차피 눈에 보이는 적을 다 걷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환영도 그렇게 걷어냈고, 방금의 공방전으로 그림자 하나도 어쨌든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한데 바로 그때.
끼기기기.
쿠구구구…….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이내 도개교가 내려가며 이어지기 시작했다.
“부웅……?”
피스치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손도 대지 않은 다리가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이내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구동 장치를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강후였다. 강후가 멀리서 피스치스를 향해 말했다.
“그거 분신이야, 붕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