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제주도 (2)
* * *
꽤 긴 통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예린과 의뢰인의 통화는 금방 끝났다.
전화를 여러 개 쓰는 그녀였기에 아주 작게 들리긴 했지만, 통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맥락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내 이예린이 말을 이었다.
- 협상이 끝났어요.
“뭐라 하던가요?”
- 전부 다 수용하겠다고 하네요. 대신 출혈 유지가 안 되면 원래 제안대로 하겠다고 해요.
“말에 책임을 지라는 거군요.”
- 밥값 하라는 거죠.
“수락하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게 원하는 게 대미지 딜링은 아닌 듯하니.”
- 맞아요.
“제게는 단순한 문젭니다.”
- 착수는 언제로 통보할까요?
“날 밝는 대로 바로 제주 공항으로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오전 8시쯤 되겠네요.”
- 강후 씨는 전부터 그랬지만, 참 행동이 빨라서 좋아요. 머뭇거리지를 않는단 말이죠?
“좋은 의뢰꾼 뒀다고 생각하십쇼.”
- 그럼 바로 관련 자료 보낼게요. 내일 만나야 할 사람에 대한 정보까지.
“네.”
통화가 끝났다.
전화하는 내내 자꾸 진동이 울려서 뭔가 했더니, 윤상미에게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오빠가 신강후였어요?】
【서연 언니가 예전에 오빠 얘기를 했었거든요. 저도 오빠 얘기를 했었는데!】
【그땐 저는 선규로 알았고, 언니는 강후로 알았고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니 같은 사람을 가지고 다른 이름으로 말하고 있었네?】
【방금 서연 언니랑 통화했어요. 이거 괜찮겠어요? 이클립스에 제대로 찍혔는데?】
답장이 없었음에도 뚝심있게 할 말을 다 적어낸 윤상미의 근성을 보니 꽤 심심했던 모양이다.
강후가 답장을 보냈다.
【이클립스 홈페이지 가서 척살 명단 봐. 모가지가 몇 개 걸려 있나. 나 빼고도 200개는 넘게 걸려 있어. 걱정하지 마.】
【하긴. 그리고 오빠라면 위험해질 것 같지도 않긴 해요.】
【아! 지난번에 간호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간호였거든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했으면 좋겠군. 됐고, 잘 지내고 있어. 또 보자.】
【오빠도 조심해요.】
짧은 문자 대화이긴 했지만, 나름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윤상미의 마음은 정말 고마웠다.
진심 어린 걱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분명, 따뜻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빨리 눈을 좀 붙여야겠군.”
강후가 바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클래식을 틀고는 잠을 청했다.
성좌 효과를 듬뿍 받아서 회복에 박차를 가할 시간이다.
* * *
그 시각.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백선태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수 군벌 ‘자강’ 소속인 백선태가 타 지역 소식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악명이 꽤 높은 이클립스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클립스에서 매월 공지하는 척살 대상 명단을 늘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보통 거기에 이름이 올라왔다는 것은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척살 명단에 오르기 전에 조사관, 사냥개로 대표되는 자들에게 모두 제거 당한다.
한데 바로 그때.
“어?”
최신 목록으로 업데이트된 사람의 얼굴이 너무 익숙했다.
정선규라고 알고 있었던 남자.
같은 암살자이면서 동시에 백선태로 하여금,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던 남자.
그 사람이 척살 명단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것도 신강후라는 본명으로.
“선규 님, 아니 강후 님이 차소희랑 진효영을…… 죽였어? 아니, 그것보다 차소희가 언제 죽었지?”
세상 소식에 눈이 어두우면 이렇게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다.
차소희가 죽은 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대외비로 관리되고 있던 탓에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차소희는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뛰어난 화염 활용 능력에 혀를 내둘렀던 헌터였다.
백선태로서는 저런 화염계 능력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을 정도.
강동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사냥개가 강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진효영도 마찬가지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 강후를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연락 좀 해 주지, 진짜 안 주시네…….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이었는데.”
강후가 일방적으로 받아가기만 한 자신의 연락처와 SNS는 아직까지 조용했다.
내심 연락이 좀 일찍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러다가는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여수 생활을 청산할까. 재미도 없고, 골목대장 노릇도 지겨운데.”
습관적으로 캔맥주를 입에 갖다 댄 백선태의 눈빛이 깊어졌다.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여수는 자신에게 좁았다.
그리고 왠지.
강후를 따라가면 정체된 지금의 성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강후라면 뭔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알고 있을 듯했다.
* * *
새벽을 가득 메웠던 어둠이 걷히고, 동쪽 하늘부터 조금씩 붉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 즈음.
오전으로 예약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가려던 에밀리아가 잠갔던 캐리어를 다시 열었다.
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일정을 취소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바꾼 것은 통화하고 있는 상대였다.
“빈센트, 갑자기 여기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는 건데?”
바로 빈센트 마이어였다.
열세 개의 별의 같은 구성원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물론 가깝지는 않았다.
서로 진심을 드러내놓은 적은 없었으니까.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 엘과 갈 거야. 한국 여행도 좀 하고, 이왕이면 볼 수 있는 얼굴들도 좀 볼까 해서.
“그러고 보니 한국에 좀 많이 모여있긴 하지? 케이시도 정화 길드와 협약을 맺고, 그쪽 던전을 공략 중이고…….”
- 유청화도 계속 있고 말이야. 장시환이랑 채관형은 기다리면 던전에서 나올 거고. 여차하면 타카시도 부를 수 있지 않나?
“그 히키코모리는 밖에 안 나와. 와도 무조건 분신이 오지.”
- 분신이 오는 게 본체가 오는 거니까. 그게 그거다.
“이것 참.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갑자기 일정을 잡으면 어떻게 해?”
- 취소한 비행깃값은 두 배로 물어 주지. 그러니까 잠깐 딜레이시켜. 얼굴 좀 보자고.
“알았어. 서울 오는 대로 연락해. 엘리자베스 님과는 처음 인사하게 되겠네.”
- 엘도 너에 대해서 기대가 커. 네가 자기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했단 말이지?
“이상한 데서 싸움 붙이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 이제 곧 이륙이야. 내리면 보자고.
생각보다 자리가 커질 듯했다.
장시환, 채관형, 유청화, 케이시 렉스, 엘리자베스, 빈센트 마이어, 그리고 자신까지.
최소 일곱 명의 참여가 확정적이다. 여차하면 일본에서 타카시를 부를 수도 있고.
동료들을 만나는 일이야 즐겁지만, 빈센트가 왜 한국에 오는지는 궁금했다.
그는 단지 사람이 보고 싶다고 훌쩍 여행을 오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볼 일이 있어야 한다.
어딘가에 꽂힌 것은 맞는데, 그게 뭘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애들 맞이 음식이나 할까?”
평소에도 요리를 즐기는 에밀리아였기에 간만에 요리 실력이나 발휘할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뉴 페이스로 이번에 구성원으로 합류한 엘리자베스의 반응을 보고 싶기도 했다.
구원의 성녀는 진실일까 아니면 위선일까? 에밀리아는 99%의 확률로 후자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진실보다 진실처럼 연기하는 것이 훨씬 더 잘 먹히는 빌어먹을 세상이기 때문이다.
* * *
아침.
예정했던 대로 제주 공항에 도착한 강후는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포근한 기운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시내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온몸을 감싸는 온화한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평화롭고 아늑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마치 마법 같았다.
공항은 헌터 치안청과 그루 길드가 연계하여 수속을 밟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워낙 강도 높은 보안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 검문 검색 단계에서 범죄자들이 대거 적발됐다.
강후가 막 들어선 시점에도 이미 두 명의 헌터가 수갑을 찬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 내에 다수 비치된 전광판에는 방금 체포된 헌터의 정보와 범죄 목록이 적혀 있었다.
【오대기】
【강원도 정선의 공설 도박장에서 헌터 ‘김석’에게 상해를 입히고, 10억 원을 탈취하여 도주.】
【도주광】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 승객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도주.】
보통 헌터 치안청에 접수된 혐의가 기록되기 마련인데, 두 헌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후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은 죽음이나, 죽어 마땅한 상대를 죽였을 경우에는 혐의가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혐의가 있더라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어쨌든 강후는 문제 될 것이 없어 금방 수속을 밟고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는 다수의 길드가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채집, 채굴, 탐험 전문 길드였다.
아마 핵심 요소는 그루 길드가 독점하고, 나머지를 하청 형태로 처리하는 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적극적인 모집 행위가 허용될 리 없다.
바로 그때.
“신강후 씨, 여깁니다!”
강후를 알아본 그루 길드의 관계자가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돌리니, 그루 길드의 상징 문양이기도 한 월계수를 그린 견장을 찬 남자가 있었다.
“그쪽이?”
“네, 맞습니다. 그루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만남 장소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남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조심스럽게 강후가 가야 할 위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전에 정유리 덕분에 한 번 타본 적 있는 안전 리무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후를 태우고 난 뒤,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앞서 받으신 자료가 있겠지만, 가독성을 좀 더 높여서 정리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셔도 됩니다.”
남자가 건넨 것은 앞서 받은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였다.
“감사합니다.”
“현장까지 조용히 모시겠습니다. 제가 필요하시면 벨을 눌러 주십시오. 그럼.”
이내 운전석과 조수석이 완벽하게 방음, 차단되는 내부 차단막이 올라왔다.
동시에 결계도 활성화됐다.
외부 방음과 방탄까지 확실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루 길드 나름의 배려가 느껴졌다.
다시 내용을 살폈다.
앞서 숙지한 대로 함께하게 될 구성원은 9명이었다. 강후를 포함하면 총 10명이 된다.
구성은 전형적인 화력 조합이었다.
탱커 한 명에 마법사 넷, 궁수 넷.
보통 이런 형태를 극딜 팟이라고 부른다. 대미지 딜링에 집중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유일한 근거리 딜러이자 어그로의 핵심인 탱커?
아니다.
“출혈이 없으면 아홉 명 다 병신 되는 거지.”
바로 강후 같은 출혈 딜러의 존재였다. 이 조합에는 가장 중요한 퍼즐이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