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진효영 (3)
* * *
“난 너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
쿵!
진효영의 목숨줄은 안타깝게도 길지 못했다. 자기가 하려던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나도 이 공격에 네가 죽을 줄은 몰랐지.”
강후가 쓰러진 진효영을 향해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왜 죽이냐는 그런 말이겠지.
곱씹어 볼수록 개소리다.
살아서 납치를 당하든, 인신매매를 당하든 하는 것이 오히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할 줄 알았다면, 이런 짓거리를 할 리도 없었겠지.
지옥에 데려가려 해 놓고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헛소리를 유언으로 남길 줄이야.
진효영의 쓸만했던 능력과 외모를 생각하면 참 아쉬운 최후였다.
어쨌든 전투 직전부터 관심 있었던 몽마, 심마 성좌를 손에 넣었다.
몽마 성좌는 당장 효율을 볼 일이 없겠지만, 심마 성좌는 제법 요긴할 때가 있을 듯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적이 사용하는 정신계 공격은 완벽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검붉은 외피로 전신을 감싼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꼴사납게 알몸으로 방치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자체가 알몸일지도.
강후는 그녀에게서 아이템을 착실히 벗겨냈다.
마력 위주의 아이템 구성은 전부 판매할 생각으로 벗겼고, 그중에 쓸만한 ‘발찌’를 챙겼다.
현재 착용하고 있는 발찌가 ‘마법사 사냥꾼’이라는 6등급 발찌로 항마 25를 올려주는 녀석이었다.
진효영이 착용하고 있던 발찌는 그것보다 훨씬 옵션이 좋았다.
【이화(梨花) - 발찌】
【등급 : 4등급】
【항마 +50】
【맷집 +50】
안 바꿀 이유가 없었다.
꽤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지금껏 발찌에 대한 투자를 너무 인색하게 했나 싶을 정도.
【신강후 Lv.103】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670】 【민첩 270】
【체력 721】 【마력 20】
【항마 445】 【맷집 595】
【* 암흑기 100】
오랜만에 전체 화면으로 스탯 상태를 확인해 보니,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마력은 일부러 50 이하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암흑기 스탯의 경우는 ‘*’ 표시가 있는데, 기존의 헌터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스탯이라서다.
히든 스킬의 표기도 마찬가지라서 백일참과 흑월참의 경우, 각각 이름 옆에 (‘*’) 표시가 붙었다.
“얼추…… 50억 원은 되겠군.”
강후가 진효영에게서 빼앗은 아이템의 가치를 가늠했다.
그 정도면 12시간을 투자한 것 치고는 꽤 남는 장사다.
그리고.
진효영의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다. 분명 사주한 사람이 있다면, 전화 한 통은 했을 듯해서다.
그래서 통화 목록을 봤더니 이게 웬걸, 너무 익숙한 이름이 강후의 눈에 들어왔다.
“가지가지 하는군.”
최근 통화 기록에 잔뜩 이름을 남긴 사람의 정체는 바로 강동현이었다.
진효영도 이클립스가 보낸 사냥개였던 것이다. 혹은……. 미인계라고도 할 수 있겠지.
강후가 전화를 걸었다.
마침 강동현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연결이 됐다.
- 이렇게 빨리? 효영이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수완이 훨씬 더 좋은걸?
“지랄을 해라, 그냥.”
- 어, X발?
찰나의 순간에 가시 돋친 욕이 오갔다. 덩달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강후는 불쾌감으로 가득한 표정이고, 강동현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강동현이 되물었다.
- 효영이는 죽었나?
“아무리 사냥개들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너무 쉽게 버리는 거 아닌가 싶은데.”
- 효영이의 수면 능력도 안 통했단 말이야? 이야……. 대단한데, 신강후?
“두 번이나 털린 게 부끄러워서 칭찬하는 거면, 그건 인정해 주지.”
- 그래. 꽤 부끄럽군. 인정했으니 됐나?
“왜 자꾸 내게 관심을 갖지?”
-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강동현. 이렇게 된 이상, 이클립스도 이제 앞가림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왜, 불가침 조약을 깨서?
“호감은 용서해도, 스토킹은 용서 못 하지. 너 같은 놈이 질척거리는 건 더 싫고.”
- 그래. 기대하지. 이제부턴 뒤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생각보다 뒤끝이 좀 있거든.
“피차 불리한 건 쪽수가 많은 네 쪽 아닌가? 난 철저하게 혼자인데.”
- 신강후. 이제 더 이상 정선규라는 가명은 쓸 수 없게 될 거야.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지. 어때, 내 배려가?
“하여간 직접 나설 배짱은 없어서 아랫것만 두 번 보낸 놈이 허세는. 꼴리는 대로 하든 말든.”
- 신강후. 조심해라. 다음에 직접 날 만나게 되면, 그때는 다음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오라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궐련이나 태우지 말고.”
- 신……!
강후가 전화를 끊었다.
사실 시작부터 이클립스와 악연이었기에, 이제 와서 공식적인 악연이 된 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청명 수용소를 탈출해서 지금까지 그나마 이렇게 조용히 지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명 건도 마찬가지.
세상에 본명이 알려진다 한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본명을 쓰던 시절에 눈에 띄는 활약을 하던 헌터였다면 숨길 것이 많았겠지만.
강후에게 있어 본명의 의미는, 청명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이었다.
즉, 본명을 따라서 그때의 삶을 캔다고 한들, 고아로 살아온 지난 29년밖에 보이는 게 없을 터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이참에 주변인들에게도 전부 본명을 밝힐 생각이었다.
본명으로 활동하면 라이센스 처리라던가,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일 처리가 훨씬 빨라진다.
물론 헌터 치안청에서 공식적인 모니터링을 할 수 있게 되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니터링이라는 게, 사후에 뜨는 결과만 보는 수준이라 사실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강후가 텅 빈 벌판에 누워 있는 진효영의 시체를 한참 동안 무표정하게 내려보았다.
그녀가 원했던 건 뭘까.
강동현의 인정이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의 외모가 가진 우월성을 확인하고,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었을까?
저벅저벅, 저벅.
무심한 강후의 발걸음이 새벽달을 배경 삼아, 벌판에 무성한 갈대 사이로 사라져 갔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는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어도 어디서든 벌어지고 있으니까.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새벽이었다. 조금 소란스러웠을 뿐이다.
* * *
이후.
경주로 미리 이동한 강후는 호텔 하나를 잡고 푹 쉬었다.
박동재를 만나기로 한 것은 저녁이었기에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넉넉했다.
헌터 뉴스는 전동 제약의 제1 보관 창고가 폭발한 소식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보관 창고는 값비싸면서도 다양한 원재료가 있는 곳이라 보안 수위가 높았다.
그 말은 즉, 이번 폭발에 적지 않은 인력이 투입되었음을 뜻한다.
하얀 전쟁의 불이 제대로 붙고 있는 중이다.
원작의 장시환의 시점에서는 그저 조금 시끄러운 서울 밖의 이슈일 뿐이었는데.
용병의 시점으로 보는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자칫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가까운 현실이었다.
“암흑기 파밍을 확실히 하긴 해야 하는데…….”
강후가 입맛을 다셨다.
물론 암흑기 스탯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고, 암흑기 스킬도 같이 늘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쪽의 공략이 필수인데, 아쉽게도 당장 갈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 리코우 길드의 소유 던전 목록을 보고, 계획을 세워둘 수는 있었다.
예를 들면, 언데드 콘셉트의 던전 위주로 리스트업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옵저버 자격 요구까지는 무리려나.”
길드에 소속되진 않지만, 길드원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옵저버.
스핏파이어 길드로부터 강후가 받은 대우가 바로 이 옵저버 자격이었다.
리코우 길드에서 거기까지 힘을 써 준다면, 활동이 훨씬 더 수월해진다.
안영호를 잘 활용해야 할 듯했다. 외삼촌의 힘이 막강한 만큼, 아주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리코우 길드에 가게 되면 아키야마 타카시도 만나게 되는 건가.”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아키야마 타카시.
현재 리코우 길드 옵저버로 활동하고 있는 헌터다. 동시에 열세 개의 별이기도 하다.
대외적인 활동이 잦은 다른 구성원과 달리, 타카시는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열세 개의 별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만 겨우 들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타카시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신술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아예 분신과 본신이 운명 공동체의 개념이었다.
다만 분신은 밖에서 활동하면서 성장하고, 본신은 집에서 그 분신을 ‘조종’할 뿐이다.
그리고 조종의 과정은 놀랍게도 타카시가 직접 설계한 특수 패드를 통해 이뤄졌다.
즉, 타카시에게는 분신을 조종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게임과도 같은 셈이다.
단순히 시야나 감각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도 공유한다. 분신이 죽으면? 본신도 죽는다.
“지금쯤이면 한창 무사 콘셉트에 심취해서, 분신에 색색깔로 가면을 씌워서 생난리를 칠 때군.”
이번에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보게 된다면 안면은 터두고 싶기는 했다.
처음 가는 던전의 패턴과 디버프 분석에 매우 능해서 원작에서 장시환이 직접 영입한 인재니까.
열세 개의 별에 들어간 것도 사명감보다는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갔을 뿐이다.
“재밌겠군.”
일본에서의 행보를 미리 떠올려 보니 기대도 되고, 한편으로는 살짝 긴장도 됐다.
그곳의 생태계는 한국이랑은 또 다르다. 게다가 한국 헌터에 대해 적대적인 길드도 존재하고.
국외이기에 조심해야 되는 것도 분명 있는 만큼, 신중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 * *
오후 5시 30분.
“왔어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강후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박동재였다.
방금까지 나눈 메시지에서는 이제 막 경주역을 출발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거짓말을 했네요.”
“미리 와서 주변도 좀 살피고, 혹시나 위험 요소는 없는지 체크하고 싶어서요.”
“굳이 그걸 혼자서?”
“생명의 은인에 대한 소소한 감사 표시인 거죠.”
“그나저나 이제 우리, 말은 좀 놓았으면 하는데요. 할 말이 많을 때는 존대도 귀찮아서.”
“알겠습니다. 형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부를게!”
“그래. 그렇게 가자고.”
교통정리가 빠르게 끝났다.
강후가 박동재보다 나이가 많은 만큼, 자연스럽게 형 동생이 되었다.
강후가 물었다.
“내부 브리핑은?”
“필요 없어. 여기는 세혁이 형, 세영이랑 자주 갔던 던전이라. 선규 형은?”
“나도 미리 넘겨받은 자료로 숙지는 끝난 상태야.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강후라고 불러.”
“아?”
“내 본명이야. 정선규는 가명이고.”
“아……!”
“가명을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슈가 생겼거든.”
강후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으로 방금 막 띄운 화면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클립스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신규 척살 대상 헌터의 내용이었다.
사진은 청명 수용소에 수감되기 직전에 찍은 머그샷이었다.
【신강후】
【청명 수용소 출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가명은 ‘정선규’.
추후 다른 가명이 확인될 시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될 예정.
이클립스의 핵심 간부인 차소희와 진효영을 죽인 전과가 있으며, 클럽 하데스에 침투하여 지하 던전을 불법 활용한 전적이 있다.
오늘부로 해당 헌터를 이클립스의 1급 척살 대상으로 지정하며, 아래와 같은 현상금을 건다.】
【생포 시 : 200억 원 및 착용 아이템 전량 지급.】
【제거 시 : 50억 원 및 착용 아이템 전량 지급.】
“헐.”
박동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웬 거물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