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진효영 (1)
이후로도 이예린을 통해서 현재 돌아가는 제약사 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폭풍전야가 확실했다.
이예린을 보고 있으면, 지금 용병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매우 큰 문제로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그녀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의뢰와 의뢰꾼 용병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칭해 줄 용병이 줄어드는 것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선, 하얀 전쟁의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했었지. 신경 쓸 게 별로 없었으니까.’
기억을 거슬러 가 보면.
원작의 하얀 전쟁은 주인공 장시환에게 조금 시끄러운 이슈 정도였을 뿐이었다.
일단 주 활동 영역인 서울 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데다가.
이 무렵부터는 심판의 지옥 공략을 끝으로 국외 활동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더 높은 곳으로의 성장을 위한 여정이었고, 이때의 장시환에게는 국내 무대가 너무 좁았다.
‘내게는 현실이군. 이게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인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자신이 신강후가 아닌 채관형이나 케이시 렉스 같은 인물에 빙의했다면?
그때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을까? 상상으로는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채관형으로 빙의했다면. 부역자 엔딩으로 가는 친구 장시환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을까?
케이시 렉스였다면. 미국의 포르투나 길드를 이끌고 한국의 정화 길드부터 쳤을까?
만약은 없다지만, 생각을 곱씹어볼수록 흥미로웠다.
어쨌든 현실은 신강후다.
원작에서 주인공의 숙적이었지만 결국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 암살자.
그 운명을 비틀어야 한다.
“선규 씨?”
“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니. 잠깐 생각 좀 정리하느라.”
강후가 한참을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 말이 없자, 이예린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떤 의뢰를 받고 싶어요?”
“일단 팀적으로 호흡을 맞춰야 하는 단체 의뢰는 전부 거절하겠습니다. 제안도 하지 마시고.”
“그 말은 블라인드 포지션을 원한다는 거죠?”
블라인드 포지션.
무슨 말인가 하면, 제약사를 대신해 대리로 치르게 되는 전면전은 다른 용병들이 하고.
그 안에서 1인으로 눈치껏 혼자 움직이는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용병들이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느슨해진 보안을 뚫고 제약사에 잠입하는 것이다.
전투를 이용하는 셈.
물론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과 위험을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했다.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될 가능성이 커요. 사망률이 높은 포지션이기도 하고요.”
“원래 그렇게 살아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지금 바로 착수 가능할까요?”
“잠시. 잠깐 휴식 시간을 갖고 얘기할까요?”
“그래요. 마침 커피 한 잔이 절실하던 참이었는데. 마시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준비해 오죠.”
“캔커피 하나.”
“굿 초이스. 10분 후에 봐요.”
이예린과의 대화에 잠시 쉼표가 찍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강후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안영호였다.
신호가 두 번을 채 가지 않았는데, 안영호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 아앗, 형님! 선규 형님! 이렇게 드디어 전화를 처음 해 보네요! 그렇죠? 반갑습니다, 형님!
“잘 지냈고?”
- 물론이죠, 형님! 이제 일본으로 오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만약에 내일 움직인다고 하면 가능할까?”
- 아앗! 내일요?
“편하게 답해도 돼. 미리 얘기해 두지 않은 건 나니까.”
- 사흘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리코우 길드가 전면전 중이라서…….
“토우시 길드와 얼마 전에 상호 평화 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아는데?”
- 그거 위장이었어요.
“양아치들이군.”
- 사흘만 주시면 그 안으로 제가 어떻게든 자리 꾸려볼게요. 충분히 가능해요.
“아냐, 됐어. 길드 상황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 정말 괜찮아요, 형님!
“뒤통수 걱정하면서 던전 다니고 싶진 않아.”
- 아…….
“전황에 여유가 생기면 얘기해. 항상 조심하고.”
- 죄송해요, 형님.
“죄송은 무슨. 다만 이젠 일본으로 갈 준비 끝났으니까, 세팅되면 얘기해 주고.”
- 알겠습니다!
그렇게 안영호와의 통화가 끝났다.
별문제가 없으면 용병 의뢰보다는 일본에서의 암흑기 파밍에 충실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 듯했다.
리코우 길드와 토우시 길드의 관계는 국내로 따지면, 정화 길드와 군벌 심연의 사이와 같다.
사실상 앙숙이다.
정화 길드와 심연은 아직까지 전면전을 벌인 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피를 제대로 흘리고 있는 모양.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전화를 끊은 강후가 이번엔 박동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동재는 안영호와 달리 시간이 한참 흘러서 받았다.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 서, 서, 선규 님……. 어흑.
“자고 있었나 보네요.”
- 네, 새벽에 던전에서 복귀했거든요. 간만에 달렸더니 몸이 버티질 못하네요.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요.”
- 잠시. 잠시만요. 제대로 눈 좀 뜨고 전화 받겠습니다. 잠결에 받고 싶지 않아서요.
잠깐의 기다림.
이내 몇 번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걸걸했던 박동재의 목소리가 맑게 바뀌었다.
-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세혁 님에게 받은 던전에 가려고 하는데. 한 번 손발 맞춰 보는 건 어떨까 해서.”
- 공략할 구성원은 어떻게 되나요? 셋? 넷?
강후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박동재가 수를 잘못 짚었다. 사실 당연한 생각이기도 하다.
“둘.”
- 아? 아! 저와 선규 님만요?
“네. 어차피 난전 콘셉트의 던전은 아니니까, 둘이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요.”
- 좋습니다. 가 보시죠! 던전이야 현재 그냥 대기 상태잖습니까?
“내일 저녁. 어떨까요.”
- 딱 좋네요. 오늘은 푹 쉬어야 할 것 같고, 내일 아침에는 블랙 네트워크 관련해서 일이 있고요.
“그럼 내일 오후 6시에 경주 던전 앞에서 보죠. 위치는 알고 계시죠?”
- 물론입니다. 정시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보기로.”
조율이 끝났다.
일본은 나중으로 미뤄야겠지만, 박동재와 함께 버프 던전에 갈 일정은 잡혔다.
안에서 꼭 얻고 싶은 버프 강화 스킬이 있는 만큼, 의뢰보다 우선시하고 싶었다.
‘일단 이예린에게 받는 용병 의뢰는 보류. 어차피 몸값은 무조건 올라갈 테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수요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 리는 전혀 없으니, 강후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오히려 조급해지고 애달프게 되는 쪽은 고급 인력을 구하고 싶어 하는 의뢰인 쪽일 터다.
이후.
강후는 이예린에게 얼마 동안 용병 관련으로는 의뢰를 절대 받지 않을 것임을 통보하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며, 국내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누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아는 만큼 알려 주는 이예린이기에 그녀의 말이 꽤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헤어지며 나오는 길에.
청안 빌딩에서 북쪽으로 1km쯤 가면 나오는 공터에 순간이동 포인트를 새로 지정했다.
박동재 구출 이후, 새롭게 지정하는 포인트였다. 여차하면 청안 빌딩에 찾아오기 딱 좋은 위치.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난 뒤에야 강후는 오늘 저녁 시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진효영이었다.
* * *
얼마 후.
머물던 호텔 방 안에서 풀 메이크업을 마친 진효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예뻐, 진짜 예쁘다니까.”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유독 냉정하다는데. 진효영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진효영은 자신의 빼어난 외모가 남자를 상대할 때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헌터가 된 이후,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외모를 활용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클립스에서 활동하면서, 일종의 ‘미인계’로 타깃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유혹이지, 사실 유혹해서 데려온 이후엔 신경 쓰지 않았다. 강동현의 소관이었기에.
어쨌든 이런 부분을 강동현에게 인정받으면서, 그녀는 이클립스에서 제법 높은 서열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울러 던전 공략에서도 위험에는 덜 노출되면서, 경험치를 안정적으로 올리는 지원도 받고.
더 나아가 유혹으로 데려온 헌터에게 빼앗은 아이템과 자산 3할 이상은 반드시 수고비로 받았다.
물론 이런 작업을 수월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외모 하나뿐만은 아니었다.
진효영은 중독에 특화된 능력도 함께 갖고 있었다.
특히 몬스터나 헌터로 하여금, 빠르게 수면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른바 수면 중독.
적을 앞에 두고 잠이 드는 것만큼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는 일도 없을 터.
진효영은 이렇게 누군가를 무력화하기에 딱 좋은 조합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강후와는 이미 아까 전화가 끝났고, 함께 서울에서 술을 마시기로 약속이 된 상태.
- 어, 나다.
“동현 오빠. 세팅 다 돼가요.”
- 신강후, 그놈이 물었나?
“안 물고 배기겠어요? 지금까지 괜히 떠본 거죠. 아까 오늘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 수상한 낌새는 없고?
“첫 만남부터 조심하는 게 느껴지기는 했는데. 어차피 제 정보가 노출될 게 없잖아요.”
- 그건 맞지.
“헌터 치안청에 등록된 레벨 데이터 베이스도 조작된 거고요. 수정도 안 됐잖아요?”
- 맞아.
“그럼 저에 대해 제대로 알 방법이 하나도 없는 거죠. 정화 길드에서도 몰랐잖아요.”
- 호텔은 그때 그 호텔인가?
“네. 미리 방 잡아놨어요. 이따가 신강후를 눕히게 될 방이기도 하고요.”
- 차는 미리 대기시켜놨다. 잘 재워서 모셔오라고. 어디 다치지 않게 말이야.
“걱정 마세요. 제 성좌가 몇 개인지 세어 볼 능력이 있는 게 아니면, 저에 대한 진실을 하나도 알 수 없을 거예요. 능력까지도요.”
거울에 비친 진효영의 눈동자에 어느덧 창밖으로 떠오른 저녁달이 빛났다.
전화 너머의 강동현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잘 풀려가는 것 같을 때의 웃음이다.
- 역시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해. 그렇지 않아?
“맞아요.”
- 기대하지. 우리 실력 좋은 헌터님을 정중히 모셔오도록 해 보자고.
“알겠어요.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거울을 보며, 늘 그랬듯, 주문을 외듯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정말 예쁘다니까.”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유독 평소보다 더 야릇하고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달빛이 창문에 막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쿠웅!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온 두 남녀가 한 몸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하아아.”
“후우.”
이내 몽환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은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고.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정적으로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당한 술과 호감,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욕망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협주곡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