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히든 스킬 (4)
박동재가 꺼낸 것은 마석.
강후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가운데, 전세혁이 박동재의 뒤통수를 쳤다.
“야! 이건 그냥 마석이잖아.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뜸을 들이고 보자기에 싸 오기까지 해?”
“의미가 있는 거겠죠.”
전세혁의 생각과 달리, 강후는 박동재의 마석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동재 성격이 예의를 갖췄으면 갖췄지, 무례하게 장난을 칠 성격은 아니니까.
그러자 박동재가 강후의 말을 반갑게 받았다.
“맞아요! 이 녀석이 제가 던전에서 처음으로 얻은 마석이에요. 이 녀석을 들고 다닌 이후로는 일이 정말 잘 풀렸어요.”
“부적 같은 겁니까?”
“네, 그렇죠. 죽을 위험도 다섯 번이나 넘겼고, 꼭 필요했던 버프 스킬북도 두 개나 먹었더랬죠. 이 정도면 행운의 부적아닙니까?”
“까쉬마르 길드에 납치를 당했을 때는 이 마석을 챙기고 다니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정확합니다…….”
강후가 피식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타이밍인 것 같은데 웃음이 나왔다. 정말 진지하게 부적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럴 수 있다.
징크스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루틴 같은 것이 생기는 이유도 비슷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박동재에게 소중한 마석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됐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예? 혹시 너무 형편없는 답례라서 그렇습니까? 이건 우선 먼저 드리는 겁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제가 돈을 버는 대로 계속 선규 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섭섭하지 않게요.”
“아니,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건 받는 자체가 부담이라서. 그래서 됐다는 겁니다.”
“아…….”
“정 보답하고 싶으시면, 나중에 같이 던전에 갈 때 무료봉사 하시죠. 어떻습니까?”
역제안을 했다.
박동재 같은 버퍼를 무료로 이용해 먹을 수 있으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상당히 빡빡한 던전을 데려갈 생각이다. 그래야 뽕을 뽑으니까.
“물론이죠! 아니, 평생 무료 이용권도 가능합니다! 진짜로요!”
“평생까지야.”
“진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캘빈 쿨리지.”
“오! 어떻게 아셨어요?”
“꽤 좋아하는 명언이라.”
“감사는 정중함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자크 마리탱.”
“와우! 명언 지식이 상당하신데요?”
“두 개 대답했습니다만.”
“하여간 동재 이 자식……. 죄송합니다, 선규 씨. 이 녀석이 워낙 이런 대화를 좋아해서.”
“아뇨. 저도 틈새 지식을 써먹을 수 있어서 좋네요.”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박동재의 캐릭터는 확실해 보였다. 실제로 독서를 매우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박동재가 최고의 버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헌터들의 수많은 논문을 다 읽어봤기 때문이다.
직접 실험해 보거나 도전해 볼 수 없는 것은 논문을 통한 간접 경험과 함께, 연구 재료로 썼다.
“어쨌든 꼭 불러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선규 씨의 요청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찬스 좀 알차게 쓰겠습니다. 마석은 다시 가져가세요. 저랑 던전 갈 때 챙겨오시고.”
“아! 알겠습니다. 하하하!”
긍정의 활기가 가득한 박동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마 저런 캐릭터이기에 진지한 구석이 있는 전세혁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반세영 같은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겠지.
강후 자신과 비교하자면 반대편 끝에 있는 성격이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구석도 있었다.
* * *
술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서울의 장점은 고물가라는 점을 제외하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길을 걸어 다녀도, 전혀 문제 될 일이 생기지 않는다.
두 사람과의 대화에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우선 박동재도 전세혁만큼이나 이클립스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십년지기 친구 둘이 이클립스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찾고 있는 모양.
그래서 박동재가 오랜 설계 과정을 거쳐, 이클립스 안에 내부자를 만들어 뒀다고 했다.
차소희가 강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전세혁이 알 수 있었던 것도 내부자 덕분이었다.
박동재는 자신이 만들어 둔 내부자 라인 전체를 ‘블랙 네트워크’라고 불렀다.
그리고 블랙 네트워크의 영향권에는 국내에 있는 어지간한 길드, 군벌이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보망이 훨씬 넓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다르게 상당히 치밀하고 용의주도했다.
블랙 네트워크에 연결된 내부자 전체의 정보를 박동재는 알지만.
내부자끼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아주 사소한 단서조차 준 적이 없다고 한다.
‘멱살 단단히 잡아야겠네.’
실력파 버퍼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았던 박동재의 기대 가치가 폭등한다.
물론 박동재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눈치지만, 강후에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블랙 네트워크는 도움이 될 일이 많을 듯했다.
지금 박동재의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네트워크 유지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부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더 많은 활동비의 지원이 필요할 테니까.
서로 기울인 술잔의 횟수는 점점 더 늘어갔지만, 이상하게 취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중간에 전세혁이 보안이 필요한 통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강후와 박동재, 둘이 자리에 남았다. 박동재가 강후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고는 화제를 돌렸다.
“세영이랑 세혁이 형에게 들었어요. 미로 던전 최고 기록을 압도적으로 갱신하셨다면서요.”
“그랬죠.”
“게다가 내부 공략에서 거의 원맨쇼로 압살하셨다고 들었어요.”
“빨리 끝나긴 했어요.”
“세혁이 형이나 세영이나, 의외로 외부인에 대한 칭찬은 까다롭게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 냉정하죠.”
“그렇군요.”
“근데 두 사람이 선규 님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칭찬밖에 없어요. 아니, 흠잡을 것이 없대요.”
“미로 던전 공략이 처음치고는 셋이 손발이 잘 맞아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어요.”
“그러니까요. 호흡에서도 진짜 안 맞을라치면, 몇 번을 같이 가도 꼬이고 또 꼬이거든요.”
“꽤 재밌었습니다.”
“저보다 선규 님과 더 성적이 좋았다고 하니까…….”
“상처?”
“아뇨. 그런 사람과 한 번 던전에서 제대로 각 잡고 공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동재다운 말이었다.
도전과 모험을 좋아한다.
그게 화근이 되어, 그라운드 제로에 갔다가 납치를 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 박동재 역시, 평범한 공략보다는 한계를 시험받는 시련 형태의 던전을 더 즐길 것이다.
“이번에 세혁 님에게 넘겨받은 던전. 조만간 공략하러 갈 건데, 그때 손발 한 번 맞춰 보죠.”
“좋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상으로 갑니다! 악수 한 번 하실까요?”
“갑자기?”
“미리 손 한 번 꽉 잡고, 잘 맞는지 맞춰 보는 거죠! 발은 나중에 맞춰 보고요.”
“지금, 농담인 거죠?”
“……재미없으셨나요?”
이래저래 캐릭터는 확실한 박동재였다.
* * *
두 사람과의 술자리는 새벽을 기해서 정리가 됐고, 강후는 그날 저녁까지 푹 잤다.
이후 일정이 없어서 신경 쓸 것도 없었을뿐더러, 오랜만의 과음이라 푹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에 진효영으로부터 가벼운 아침 인사 연락이 왔지만, 자는 중이라 자동으로 씹혔다.
강후가 급할 게 없는 입장이라, 이참에 인내심이나 테스트를 해 볼 생각이었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갈 무렵.
이예린과 만남 약속을 잡은 강후는 그 길로 대전역으로 내려가서 그녀를 만났다.
윤상미의 상태도 겸사겸사 챙길 겸, 이예린과 향후 의뢰의 방향성에 대한 얘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대전역에서 내리자마자, 강후는 윤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오빠.
“몸은 좀 어떤가 물어보려고.”
- 저요? 좋아요. 근데 저 지금 공략 들어가는데? 우리 나중에 통화해요. 그럼!
“…….”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매번 전화를 먼저 끊는 쪽은 강후였는데, 오늘은 포지션이 뒤바뀐 느낌이다.
어쨌든 던전 공략에 들어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아서 마음은 한시름 덜었다.
자신의 일과 엮여서 해결사에게 고생한 윤상미였기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역 앞에서 멍하니 서서 뭐 해요? 뒤에서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요.”
뒤에서 강후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이예린이었다.
원래 대전역에서 좀 더 외곽으로 나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도 역 안에서 나오고 있던 모양.
“아, 통화가 막 끝나서.”
대답하는 강후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이예린의 성좌가 그새 둘이 늘었기 때문이다.
‘급성장에 시동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때지.’
훗날 이예린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슬슬 가파르게 상승하는 성장 곡선이 이상하진 않았다.
아마 이 무렵쯤일 것이다.
공격적으로 소규모 용병단을 합병, 인수하고 그들의 던전을 사들이기 시작한 시점이.
이예린의 용병단 ‘청안’이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인맥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그래서 그간 꾸준히 벌어온 돈, 그러니까 자본이 충분해 인수 자금 조달은 문제가 없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요? 오늘 얘기는 살짝 주제가 무거워서. 보안 유지도 좀 필요하고요.”
“어디로 갈까요.”
“저희 용병단 건물로 가요. 보안 시설이 충분히 되어있으니까 안전하기도 하구.”
“그러죠.”
처음으로 가 보는 그녀의 용병단 건물이었다.
지금까진 보통 대전역 앞에 마련된 청안 용병단의 상설 안내 부스 근처에서 보거나.
혹은 대전역 외 다른 지역에서 만나곤 했었으니까. 오늘은 그러기엔 좀 더 깊은 의뢰 얘기였다.
* * *
대전역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가면 위치해 있는 청안 빌딩.
청안 빌딩 내부에 완벽한 방음 처리가 된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이예린이었다.
“요즘 용병 시장이 심상치 않아요. 용병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는 중이예요.”
“의뢰꾼인 저한테는 좋은 얘기네요.”
“그건 맞죠. 의뢰 단가는 말할 것도 없고 성공, 목숨 수당도 폭등하니까 말이에요.”
“수요 급증에 이유가 있겠죠?”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도 한 번 해 볼 생각으로 강후가 물었다.
이유는 뻔하다.
제약사 간의 전쟁, ‘하얀 전쟁’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일 터다.
“제약사들이 판을 키우고 있어요. 알죠? 지금 전 세계에서 마약류 각성제 가격이 우리나라가 가장 높다는 거.”
“네, 압니다. 외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공급 라인에 연줄을 만들려고 한다면서요.”
“제약사들이 결심을 하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파이를 나눠 먹는 구조가 아니라 독점을 한다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다.”
“그거죠. 이런 흐름에 편승해서 외국 자본도 같이 들어오고 있는 거고요.”
“제약사도 각자의 뒷배가 다를 텐데. 중국이나 러시아 쪽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이번 달에 두 나라에서 입국한 외국인 헌터의 수가 전월 대비 450% 뛰었어요.”
“미쳤네.”
확실히 조짐이 좋지 않았다.
제약사 간의 전쟁은 둘째치고, 이렇게 된다면 용병들 사이에서도 국제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국내가 대단히 시끄러워질 조짐이 분명했다.
차라리 시끄럽기만 하면 다행이고,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이미 하얀 전쟁의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