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히든 스킬 (3)
* * *
그리고.
키엑!
시간차를 두고 땅속에서 올라온 ‘땅굴 거미’가 대참수 스킬에 머리가슴 중간이 꿰뚫려 죽었다.
주인이 밥상을 잘 차려놨을 거라고 생각하고 탐욕스럽게 몸뚱이를 들이민 것에 대한 대가였다.
“응?”
한데 대참수에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찢긴 땅굴 거미의 몸속으로 뭔가가 보였다.
팔을 깊숙하게 집어넣어 쭉 갈라보니,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아이템이 몇 개 나왔다.
아마 몸통 위쪽을 먹혀 버린, 죽은 헌터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산물인 듯했다.
역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쓱쓱 필요한 것만 꺼냈다.
아이템을 쭉 둘러보니, 강후가 쓸만한 것은 하나고 나머지는 팔면 되는 아이템이었다.
【끈질긴 승부 – 팔찌】
【등급 : 4등급】
【체력 +100】
기존에 끼고 있던 6등급 팔찌, ‘상승의 기력’과 비교한다면 무려 체력을 75나 더 올려줬다.
바꿔 착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강후가 바로 새로운 팔찌를 착용했다.
“명복을 빕니다.”
강후가 오래전에 숨이 끊어졌을 아이템 주인의 명복을 빌었다. 너무 참담한 최후를 맞이한 탓이다.
어쨌든.
흑월참 성능이 확실한 것은 이번에 검은 인도자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이런 방식이면, 대다수의 헌터들이 꺼려 하는 검은 인도자를 사냥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암흑기 회복의 문제 때문에 수시로 잡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암흑기가 최대치까지 회복만 되면, 그때마다 검은 인도자 한 마리는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아무래도 무정의 자객에 연동된 궁극기 강화 기회는 분신술에 쓰는 게 맞겠는데.”
강후가 생각을 굳혔다.
박동재를 구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렸던 박준을 죽이고 얻은 성좌, 무정의 자객.
그 이후 어떤 기본 스킬을 궁극기화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고민을 계속했었다.
뭘 해도 당연히 좋겠지만, 이왕이면 꼭 필요한 스킬에 연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흑월참을 써 본 결과.
강후는 히든 스킬의 위력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다만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풀 차징을 하려는 강후의 시도를 눈 뜨고 봐 줄 리 만무했다.
몬스터들이야 헌터의 스킬을 예측하기 어렵고, 생각이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타이밍을 놓치지만.
눈치가 빠른 헌터는 강후의 단검 끝에 암흑기가 응축되기만 해도, 회피 준비를 할 터였다.
그러면 시간과 힘을 들여서 일격을 노리는 백일참, 흑월참의 한 방이 무색해진다.
아니, 무색해지면 차라리 다행이고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목숨이 위협받을 수도 있고.
바로 선택을 마쳤다.
여차해서 아니다 싶으면 최대 3번까지 바꿀 수 있으니, 무르기도 가능하다.
이윽고 ‘분신술’ 스킬이 무정의 자객 성좌의 효과를 받아 궁극기로 바뀌었다.
【분신술】
【스킬 숙련도 : Ultimate】
【사용자의 옵션 설정으로 추가, 변화된 스킬 내용만 표시합니다.】
【분신의 유지 시간이 총 10초에서 20초로 증가합니다.】
【원래 분신을 ‘직접’ 컨트롤해야 하지만, 분신에 ‘학습’ 능력이 추가됩니다.】
【학습 현황은 ‘학습’ 탭 클릭으로 별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무의식의 영역까지 학습시킨다는 건가. 확실히 이게 맞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의 정체성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은신과 분신술이다.
특히 분신술은 활용하는 암살자 헌터의 감각과 대응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죽지 않을 적을 죽일 수도 있고, 죽을 위기를 살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분신의 학습을 위해서라도 백일참, 흑월참과 함께 훈련에 열을 올려야 할 듯했다.
그간 숙련도가 늘 최대치였기에 반복 훈련에 동기부여가 안 됐지만, 이제는 다른 얘기다.
* * *
이후.
진효영을 다시 만난 강후는 서로의 교차 검증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즉, 지도에 기록된 정보에 틀림이 없고, 의도된 오류나 누락도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후에 정화 길드 내의 탐색팀에서 한 번 더 검증 절차를 거칠 테니, 완벽한 정보인 셈.
밖으로 나오기 전.
입구로 향하는 언덕 위쪽으로 올라온 강후가 탁 트인 시야로 보이는 전장을 살폈다.
전장이 조정이 되었는지,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장시환의 팀이 있었다.
‘멋진 건 인정해야겠군. 하기야 내가 짜놓은 그림인데 그렇지 않을 수도 없겠지.’
장시환과 채관형의 연계를 보며 강후가 감탄했다.
장시환이 연달아 공간 개방 마법을 전개하면서, 채관형을 공중 기동시키고 있었다.
채관형에게 날개가 달린 것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채관형은 허공에서 거인족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중력에 이끌려서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장시환이 채관형을 높은 위치로 올려놓았다.
그것은 무한동력, 무한상승과도 같아서 채관형은 공중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비웃음이나 가소로움의 뜻이 아니라, 참 까다로운 적을 만들어 놨구나 싶어서였다.
지상과 공중을 마음껏 활용하는 녀석들을 상대로 암살자인 자신은 어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까.
새삼 필요한 스킬 목록이 한없이 늘어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강후였다.
심판의 지옥 밖으로 나온 강후는 진효영과 함께 탐색 팀으로 복귀, 자료 제출을 마쳤다.
까다로운 검증의 과정이 추가로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별도의 절차는 없었다.
아마 자신감일 것이다.
정화 길드의 이름이 걸린 일에서 장난질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으니까.
찍히는 정도면 다행이고, 뒤통수를 매일 조심하면서 다녀야 할 거다.
그러니 알아서 잘 정리해 왔겠거니 하는 것이다. 나중에 불일치가 발견되면 족치면 그만이다.
강후는 겸사겸사 오늘 술 한 잔을 하자는 진효영의 제안을 다음으로 미뤘다.
일부러 그녀를 한 번 튕겨내면서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전세혁이 박동재와 함께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올라왔다고 해서였다.
전세혁과는 던전 소유권을 인계하는 절차를 매듭지어야 하는 만큼, 그와의 만남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아쉬워하는 진효영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이 이미 와 있다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오늘 처음 본 여자와의 의미 없는 술 한잔 보다는…….
군침을 흘리면서 강탈할 스킬이 널려 있는 던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전세혁과 박동재를 선택했다. 실리를 추구하는 강후다운 선택이었다.
* * *
“이 던전으로 하죠.”
“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게 쓰는 던전 같네요. 저는 정말 기분 좋습니다.”
“원주인의 명성에 걸맞게 저도 던전을 아끼고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동재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저도, 동재도.”
“잔재주가 좀 있었던 게 도움이 많이 되어서 기분이 좋네요.”
사실 장거리 공간 이동 능력이 잔재주라고 할 수 없지만.
전세혁은 강후가 최대한 겸손하려고 한 표현임을 알기에 껄껄 웃으며 넘겼다.
던전 소유권을 대가로 도운 것이라고는 해도 공치사를 늘어놔도 전혀 기분 나쁠 것 같진 않은데.
전세혁이 보기에 강후는 예의가 바른 구석이 많았다. 달리 말하면, 실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전 절차는 다 밟아 둔 상태입니다. 던전 코드만 입력하면 되는 거니까, 여기에 입력하면 영원히 선규 씨 소유가 되는 겁니다.”
박동재도 옆에 있었기에 강후를 선규라고 부르긴 했지만.
전세혁이 던전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기 위해, 모바일로 활성화해 둔 공간에는 본명이 적혀 있었다.
출생신고가 안 된 헌터라면 모를까, 강후도 결국은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는 헌터였기에.
이런 공식적인 절차나 서류에서는 본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 본명이 적힌다 해서, 헌터 치안청의 감시망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헌터 치안청은 전반적인 데이터베이스 관리와 허가, 불허, 회수 등의 여부만 관리할 뿐.
어느 던전이 누구의 소유인지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왜냐면 헌터 치안청 소유의 던전을 관리하기에도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마당에 남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을 수밖에.
‘아무리 낮게 잡아도 이 던전의 가치는 최소 300억 원. 급매로 팔아도 그 값은 받을 테지.’
전세혁이 정말 큰돈을 썼다.
그 이상으로 벌고, 박동재를 아끼는 형이라고 해도 이만큼의 지출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강후는 전세혁의 감사와 호의 안에 어느 정도 자신과 단단한 인연의 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속내를 읽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본인이 의식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지 몰라도, 분명 무의식에 내재된 이유는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 사람과 인연을 깊게 만들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
강후가 이현석을 상대로 노렸던 ‘마음의 빚’ 같은 감정 말이다. 분명 가능성은 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의도였건 간에 던전의 소유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이제 영원히 강후의 것이다.
그리고 전세혁은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큰 인물이었다.
그는 꽤 정의로운 사람이다.
이현석과도 죽이 잘 맞고, 경상권으로는 제법 인맥도 넓다.
게다가 정화 길드와 이클립스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강후와 공감대도 일치한다.
【현재부터 경주, 분류번호 331번 던전의 소유권 일체가 ‘신강후’ 헌터에게 이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후가 다시 감사를 전했다.
300억 원짜리 구출 미션이라.
다른 기회가 있다면 또 하고 싶을 만큼, 강후에게는 너무 쉬웠던 의뢰였다.
물론 상대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오쇼 용병단의 잔당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강후는 경주 331 던전, 약칭 경주 던전의 메인 보스의 스킬에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다.
녀석이 사용하는 스킬은 자신에게 걸린 버프를 강화하는 스킬이었다. 일종의 버프 증폭이다.
나중에 혼자 혹은 최소 인원으로 던전을 공략하려면 버프 효과의 극대화는 필수였다.
구성만 잘 맞춰지면, 정말 강후와 박동재 둘이서도 어지간한 던전을 휘젓고 다닐 수 있다.
둘이서 셋, 아니 넷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도, 실제로도 가능하다.
그때.
“저기…… 제가 지금은 수중에 돈이 없는데, 이거라도 꼭 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박동재가 멋쩍은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앞에서 전세혁이 통 큰 감사를 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보답이 상대적으로 형편없게 느껴진 모양.
“뭔데 그래?”
강후보다 전세혁이 더 궁금했는지, 옆에서 박동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박동재가 움찔하더니.
보자기에 곱게 싸 두었던 뭔가를 꺼냈다.
시골의 할머니가 쓰실 법한 보자기에 소중하게 담긴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