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히든 스킬 (2)
* * *
강후는 진효영과 약속된 포인트에서 만났다.
강후만큼이나 빼곡히 종이를 가득 채워온 그녀의 지도는 전략적인 가치가 커 보였다.
강후에게 지도를 넘겨받은 진효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꼼꼼하시네요.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정화 길드에서 좋아하겠어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 아닙니까. 기회를 주었으면 열심히 해야죠. 그래야 나중에 찾아줄지도?”
“별일은 없었나요?”
“조용하더군요. 가끔 지표면에서 연기가 솟아오를 때면 깜짝 놀랄 때가 좀 있긴 하지만.”
“이제 서로 갔던 길을 가야 할 차례네요. 교차 검증이 가장 귀찮아요, 그렇죠?”
“정보가 공짜는 아니니까.”
“괜찮으시면…… 잠깐 쉬면서 한잔하실래요? 들어오기 전에 챙겨온 캐모마일 차거든요.”
진효영이 메고 있던 백팩 안에서 꺼낸 것은 보온병에 담은 캐모마일 차와 종이컵이었다.
강후도 따로 백팩에 마실 생수를 챙겨오기는 했지만, 따뜻한 차 한 잔도 괜찮을 듯했다.
물론 그녀의 호의 – 매우 사소하지만 – 가 수상하긴 했지만, 차 한 잔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리고 혹시나 의심되는 중독에 대해선 역신의 숨결이 있으니, 걱정을 한 움큼 내려놓아도 됐다.
“잘 마시겠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위는 제가 대충 닦겠습니다.”
강후가 마침 그녀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편평한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먼지가 좀 쌓여 있었지만, 강후가 옷소매로 무심하게 닦아냈다.
어차피 던전에서 활동복으로 입을 요량으로 입은 것이기에 더럽혀져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매너가 좋으시네요.”
“찻값만 하는 겁니다. 차를 마실 일이 없었다면, 닦지도 않았을 겁니다.”
“호호. 재치도 있으셔.”
이게 재치인 걸까.
강후는 유독 진효영이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의 호감이나 리액션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차를 한 잔 따라놓고는 손부채질을 하며, 자연스럽게 옷소매를 걷고는.
목선이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으며, 고무줄을 입에 물었다.
드러난 목선을 따라서 은은하게 전해지는 진한 향기는 덤이었다.
과몰입, 과반응일 수도 있다.
별 것 아닌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후는 진효영이 첫 만남부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었던 것이 신경 쓰였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라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같이 호흡을 맞출 상대도 아니고, 레벨에 관련된 거짓말은 분명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거리를 둬서 나쁠 건 없지. 어차피 진효영은 내게 필요한 사람도 아니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진효영이 어떤 속내인지를 궁금해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든 볼 일이 있다면, 계속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거리감을 좁히던가.
하지만 과한 걱정이었다면, 모든 일은 해프닝이 되고 그녀와의 인연도 끝나겠지.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면 될 듯했다. 생각과 판단도 거기에 맞추면 되고.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강후와 진효영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끝자락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거인족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착각이긴 하지만, 이쪽까지 지면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진효영은 별말 없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강후를 옆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강후도 그런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체했다.
몇 번이고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 보였기에, 더욱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때, 진효영이 운을 뗐다.
“저기.”
“네.”
“혹시 이번 탐색 일 끝나면, 밖에서 한잔하실래요? 밥에 술도 좋고, 가벼운 칵테일도 좋고.”
“칵테일, 괜찮겠네요.”
“서울에 제가 자주 가는 단골 바가 있어요. 주인이랑 친하기도 하고. 어때요?”
“그러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된 ‘유혹’이 통하지 않으니까, 아예 직진하는 식으로 방법을 바꾼 듯했다.
남녀 간에 누가 먼저 호감을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대도 지났고.
하지만 자신이 진효영에게 딱히 호의를 베풀거나 호감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분명 따로 있을 듯했다. 본능이고 직감이며, 확신이었다.
그래서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었다. 정말 순수한 호감이었다면 즐겁게 술 한잔하면 되는 거고.
아니면…….
‘뒤에 숨은 놈을 찾는 거지.’
* * *
서로에 대한 교차 검증을 위해.
강후와 진효영은 각자가 갔었던 길로 향하며 헤어졌다.
이제는 상대가 정리해 온 정보가 실제와 일치하는지, 그것을 꼼꼼하게 체크할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
구조 신호를 상징하는 붉은 조명탄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던전 안에 별도의 구조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상황일 때의 약속된 신호다.
물론 강제된 것은 아니기에 신호를 보고, 구하러 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음.”
강후의 발걸음이 조명탄이 터진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쪽 방향에서 조명탄을 터뜨릴 일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를 만났을 때밖에는 없다.
거인족은 아닐 것이다.
있었다면 강후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보통의 헌터면 일찌감치 피했을 테니까.
‘검은 인도자?’
다른 가능성도 점쳐졌다.
바로 검은 인도자.
망령의 집합체로 예전에 강후가 그라운드 제로에 갔을 때, 마주친 적 있는 몬스터이기도 하다.
그때의 강후에게는 검은 인도자를 죽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모두 없었다.
힘은 둘째 치고.
검은 인도자를 죽이려면 녀석과 상극인 힘, 혹은 완전히 동기화된 힘이 필요했다.
즉, 신성력을 활용하거나 그와 똑같은 암흑기를 활용할 수 있어야 했다.
지금은 암흑기 스탯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이 존재한다.
강후가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
상대할 방법이 있는데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검은 인도자라는 몬스터가 너무 큰 유혹이었다.
특히 녀석은 임의의 확률이기는 하지만, 암흑기 스탯을 영구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제7의 스탯인 암흑기의 성장도 중요해진 만큼, 녀석을 착실히 잡을 필요가 있다.
특히 암흑기는 보너스 포인트의 투자도 불가능하므로,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올리는 게 맞았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 * *
“얼른 빠져나가자고! 괜히 검은 인도자한테 잘못 엮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살이야.”
“죽을 거면 혼자서 죽을 것이지 조명탄은 왜 터뜨려가지고. 우리까지 휘말릴 뻔했네.”
“그러게. 도망가자!”
강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헌터들은 전부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흘깃 강후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도망치는 것이 더 급했는지 별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아마 자기들끼리 나눈 말이 충분한 정보 전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검은 인도자의 위치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독 햇빛이 잘 닿지 않는 절벽 아래쪽이었다.
조명탄을 쏘아 올린 것으로 보이는 헌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시체의 상태가 온전치 않은 것으로 봐서는 검은 인도자의 하수인에게 당한 듯했다.
검은 인도자는 절대 혼자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손발을 맞출 몬스터가 반드시 있다.
“…….”
잠시 기다렸다.
여기까지 와서 남 좋은 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만큼, 주변인들이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찍이서 눈치를 보던 헌터 두 명을 끝으로 이쪽에 관심을 갖는 헌터가 모두 사라졌다.
다들 검은 인도자를 상대할 방법이 ‘전혀’ 없다 보니, 포기하고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터벅터벅.
의도적으로 소리를 내면서 검은 인도자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녀석도 그것을 인지했는지, 절벽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고개를 스윽 돌렸다.
수많은 망령이 한데 뭉쳐 만들어진 검은 인도자는 정해진 모습이라는 게 없었다.
예전에 그라운드 제로에서 만났던 검은 인도자는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녀석은 주름이 가득한 노인, 그것도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약해지게 하려는 전략인 걸까? 아니면 흉내 낼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 걸까.
어쨌든 강후에게는 전혀 영향도 줄 수 없는 수작질과 함께 검은 인도자가 접근해 왔다.
‘어차피 저놈은 다른 스킬로 공략 못 해. 한 방에 끝내지 못하면 미련 없이 빠진다.’
계산은 이미 끝냈다.
신성력, 암흑기.
두 가지 경우로만 제거할 수 있는 만큼.
흑월참을 이용해 공격하고, 여기서 숨통을 못 끊으면 바로 빠질 생각이었다.
아까 스킬 시연을 위해 전부 소모했었던 암흑기는 순흑의 구도자 덕분에 100% 회복된 상태였다.
자리를 잡은 채 기다렸다.
【흑월참】
동시에 차징을 시작했다.
어떤 동작으로 스킬을 준비해도 상관없지만, 이번에는 기본 동작에 충실했다.
옆구리 쪽으로 단검의 날을 살짝 숨긴 채, 암흑기를 열심히 응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키히이이…….
검은 인도자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강후와 거리를 좁혔다.
녀석에게 감싸지면 강후라고 한들 답이 없었다. 즉, 감싸지기 전에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빠르면 녀석이 눈치채고 피할 수도 있기에, 최대한 뚝심 있게 기다렸다.
드드.
아주 미세하지만 지하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검은 인도자의 하수인일 터.
어떤 몬스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에서 땅굴을 파면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녀석일 것이다.
“…….”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암흑기 100을 투자한 흑월참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놓아 주기만 하면 되는 상황.
크키키키.
검은 인도자는 강후가 회피하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확신했다.
이 인간이 겁을 집어먹는 바람에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앞서 죽은 인간이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그는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다가 선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만약.
검은 인도자가 흑월참을 활용한 공격에 죽는다면, 강후는 이후 그라운드 제로를 꼭 갈 생각이었다.
검은 인도자는 어지간해서는 잡기 어려운 만큼, 보상도 꽤 짭짤하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치솟은 경험치는 당연한 얘기고.
마석이나 아이템 측면에서도 의외의 고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장시환도 암흑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이후, 이쪽 계열의 몬스터만 골라잡아 레벨을 대폭 높였다.
장시환을 레벨 800이라는 전대미문의 고레벨이 되도록 만든 과정의 지분 2할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쿠오오오!
어느덧 강후와 다섯 걸음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온 검은 인도자의 몸이 거대해졌다.
마치 몸을 웅크리고 있던 독수리가 탐욕스럽게 검은 날개를 펴고 힘껏 먹잇감을 덮치듯이.
검은 인도자 역시, 통째로 강후를 집어삼킬 요량으로 자신의 몸집을 최대한 부풀렸다.
악마의 포옹.
녀석에게 안기는 순간, 모든 기억과 시간은 멈춰 버린다. 영원한 어둠, 죽음 속에 갇히는 것이다.
화아악!
이윽고 강후를 휘감기 시작한 검은 인도자의 역겨운 숨결이 강후의 얼굴에 막 닿았을 때!
크시잉!
짙은 어둠 속에서.
검붉은 반월 검기가 선명한 호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검은 인도자의 몸 중심을 덮쳤다.
다음 순간.
퍼어어엉!
깔끔하게 터져버린 검은 인도자의 몸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프스스스!
주인을 잃고 사방팔방으로 정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망령은 덤이었다.
닿을 수 없고, 만질 수조차 없기에 대부분의 헌터가 절대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존재.
그래서 늘 입맛을 다시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림의 떡인 존재.
그런 존재가 강후에게는 좋은 경험치 공급원이 되어 버렸다.
강후는 어느새 히든 스킬의 이득을 똑똑히 체험하는 중이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공략되지 않은 몬스터이기에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대폭 올라, 103이 되었습니다.】
레벨의 두 단계 상승!
성능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