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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120화 (120/304)

120화 준비 (1)

“있지.”

과거를 먼저 말하진 않는 편이지만 숨길 이유는 없기에, 강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땠어요?”

“어땠긴, 사귈 때는 다 좋지.”

한서연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강후’의 삶을 거슬러 되돌아보면, 헌터로 각성하기 전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한서연이 헌터가 되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로 사는 세상이 달라지고, 공감대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충돌이 잦아졌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강후가 한서연을 위해서라도 이별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가 헌터로서 실력을 더 만개하려면, 그리고 이끌어줄 사람을 찾으려면…….

헌터가 아닌 자신의 존재는 짐이 될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렇게 강후는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고, 한서연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받지 않았다.

그녀가 싫어서?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일 수 있지만 그녀를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렇게 모질게 헤어져 놓고는 청명 수용소에서 나오자마자 찾았지. 나도 낯짝이 두껍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슬픔을 묻어 두고, 자신을 걱정해 준 한서연이 고마웠다.

부디 그녀가 정화 길드에서 더 꿈을 키울 수 있길 바랐다.

아울러 훗날 그녀와 적으로 마주할 일도 없기를 바랐다. 비극을 원치는 않는다.

생각을 마친 강후가 반세영에게 되물었다.

“넌?”

“저요? 사귀던 사람이 있긴 했어요.”

“헤어진 건가?”

“헤어진 건 맞는데, 음……. 사별이라고 하면 단어가 맞을까요? 그렇게 됐어요.”

“음.”

헌터 커플, 혹은 어느 한쪽이 헌터인 경우에는 사별이 생각보다 흔한 일이 된다.

헌터의 사망률은 비 헌터, 그러니까 일반인의 사망률보다 수십 배는 높다.

던전 안에서 죽는 일도 부지기수고, 이해관계에 엮여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잦았다.

하물며 치안이 좋지 못한 수도권 외곽의 경우면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그러다 보니 반세영의 사별 이야기가 새삼스럽진 않았다.

“기습을 당했거든요. 이클립스 놈들에게.”

“이클립스……. 악연이군.”

“맞아요. 세혁 오빠와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우리 둘 다 이클립스를 정말 싫어하죠.”

“범인은 못 찾았고?”

“네. 남자친구의 유품 일부만 겨우 찾았어요. 시체도 수습하지 못하고 던전이 리셋됐죠.”

“많이 힘들었겠다.”

“뭐, 마음에 평생 묻고 가는 거죠. 남자친구 납골당에서 하나 맹세한 게 있어요.”

“뭐지?”

“납골당에 놓인 남자친구의 사진을 보고도 웃을 수 있으면, 그때 새 사람을 만나겠다고 했거든요.”

“좋은 다짐이네. 남자친구도 네가 평생 과거에 묶여 있지는 않길 바랄 거다.”

“그러게요. 하지만 아직까진 갈 때마다 눈물이 나네요. 웃으려면 좀 멀었나 봐요.”

반세영이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에 항상 활발하고 상큼발랄한 모습만 보여줘서, 힘든 사연은 없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깊은 아픔을 경험한 것 같아 안쓰러웠다.

너무 감정에 몰입했던 것이 멋쩍었는지, 반세영이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오빠는 그럼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만나고 싶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왜요?”

“그건 노코멘트.”

반세영에게 앞으로 자신이 가고 싶은 길, 가야 할 길을 구구절절 말하고 싶진 않았기에.

강후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사랑, 언제 들어도 설레고 기분 좋은 단어지만……. 강후는 자신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곁에 있을 사람을 위해서라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게 맞다 여겼다.

앞으로 휘말리게 될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사랑을 추구할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 * *

그날 오후.

강후는 전세혁으로부터 심판의 지옥 공략 후에, 다시 한번 만나 던전 인계 절차를 밟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하기는 했는데, 소유권 이전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한 탓이다.

당장 던전이 급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약속을 잡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어 박동재와 연락처를 교환한 뒤,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왔다.

심판의 지옥에 대한 공략 일정이 공지됐기 때문이다. 다음날 오후 6시였다.

예정대로 강후는 탐색 팀에 배정됐고, 그래서 본대보다 늦게 출발하게 됐다.

본대는 다음날 오후 3시에 던전에 진입한다고 했다. 3시간의 간격을 두는 셈이다.

본대가 먼저 진입하는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미 탐색이 끝난 안전 루트를 따라서만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확인 지역으로 가는 탐색대가 먼저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동의 L 호텔 안.

강후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루 숙박 단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쌌지만, 그래도 조용히 지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2인 1조. 파트너 진효영. 누군지 전혀 모르겠군.”

강후가 내일 합류에 앞서 넘겨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탐색 팀은 2인 1조였다.

개인행동을 하는데 왜 팀을 짜는가 하면, 내부 탐색 정보의 교차 검증이 필요해서다.

정화 길드는 바보가 아니다.

미지의 영역에 한 사람만 보내 놓고, 그 정보를 신용할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감시역을 하는 역할로 이렇게 2인 1조의 편성을 짰다. 모든 탐색 팀이 똑같았다.

진효영.

첨부된 사진을 살피니 블루블랙 컬러의 머리에 핑크색의 머리띠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소속은 없는 상태. 그렇다면 용병이라는 얘기인데, 어디 출신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나보면 알겠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이상하지.

꿀꺽- 꿀꺽-.

강후가 창밖을 보며, 호텔에 들어오기 전에 넉넉하게 사 온 캔커피를 들이켰다.

몇 모금만 마셔도 없어지는 캔커피지만, 강후는 그 특유의 뒷맛이 좋았다.

달달하면서 씁쓸한, 애매모호한 경계선에서 혀를 자극하고 농락하는 것 같달까?

“일본을 가긴 가야겠어.”

안영호 찬스를 쓸 때가 된 것 같았다.

이번에 순흑의 구도자와 함께하게 되면서, 암흑기 스탯이 생겼기에 든 생각이었다.

암흑기를 활용하려면 암흑기를 기반으로 한 스킬을 써야 한다. 즉, 그런 스킬을 강탈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보스 중에는 암흑기와 연관된 스킬을 가진 보스의 수가 적었다.

있어도 전투에서의 활용 가치가 떨어졌다. 효율 측면에서도 상당히 나빴고.

괜히 헌터들이 상위, 최상위로 갈수록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 한정으로 활동해서는 절대 채워나갈 수가 없는 자원의 ‘결핍’이 존재해서다.

그래서 미국의 포르투나 길드의 마스터인 케이시 렉스도 정화 길드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들 기준으로는 한국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보상 요소가 꽤 있기 때문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는 제법 번호를 공유한 사람이 많아져서, 전화가 온 사실만으로는 누군지 알 수 없다.

발신자를 보니 이예린이었다.

“네.”

- 선규 씨. 잘 지내요?

“무슨 의뢰인가요?”

- 에이! 안부 인사로 시작했는데 리액션 정도는 해 주셔야죠. 이러면 너무 민망하잖아요?

“잘 지내셨나요.”

- 기계 같아.

“많이 듣는 얘깁니다.”

실없는 소리가 오고 갔지만, 이예린은 그런 강후의 캐릭터성이 재밌는지 큭큭 웃었다.

주변에 온통 달변가에 능청스러운 남자 용병들이 많아서인지, 강후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 의뢰가 들어왔어요. 용병 지정 의뢰는 아닌데, 직업군을 지정한 의뢰이기는 해요.

“암살자 말입니까?”

- 네. 제약사에 관련된 의뢰에요. 대충 짐작은 가죠? 타깃을 미리 말할 수는 없지만.

“구성만 들어보죠.”

- 모 제약 회사의 비밀 인체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연구소에 방화를 일으켜달라는 의뢰에요.

“비인간, 비윤리적인 실험을 막고 싶다는 그런 겉 포장이 있을 것처럼 들리는데요.”

- 호호. 맞아요. 포장을 걷어내면 그냥 경쟁사 견제죠.

입질이 왔구나 싶었다.

원작에서 ‘하얀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약사 간 경쟁의 시작이다.

하얀 가루, 그러니까 마약류 각성제의 유통 및 공급 이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

그래서 이름이 하얀 전쟁이라고 붙었다.

굵직한 대형 제약사 위주로 질서 재편이 거의 끝난 미주, 유럽권과는 달리.

아시아권은 다수 제약사가 난립한 구도였다.

게다가 제약사마다도 신념이 달라서, 마약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는 곳도 있었지만.

반대로 돈만 된다면 마약이 아니라 그 이상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다는 곳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기존 제약사 내에서 연구원들이 대거 헤드 헌팅으로 빠져나오거나.

아니면 거대 자본에 제약사가 통째로 인수당해서, 방향성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

하얀 전쟁의 불씨는 지난번 전동 제약 사건으로 확실히 붙은 듯했다.

“일단 보류하죠.”

- 네?

“개인 일정이 좀 있어서. 이것까지 처리하고 나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 그럼 다른 쪽으로 돌릴까요?

“어차피 비슷한 의뢰가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시죠.”

- 알겠어요. 그럼 일 끝나는 대로 꼭 연락 주세요. 선규 씨에 대한 기대가 커요.

“저도 기대하죠.”

- 음?

강후가 묘한 뒷맛을 남기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하얀 전쟁은 사실상 용병과 용병의 전쟁이다. 제약사를 대신하는 대리전쟁이기도 하고.

그래서 국내 용병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거 용병이 투입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값이 싼 용병을 찾는다면 중국이나 러시아 쪽으로 손을 벌릴 것이다.

‘그놈이나 저놈이나.’

피차 어느 나라 용병이건 간에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해전술에는 답이 없는 만큼, 이왕이면 외국 용병들은 적당히 왔으면 했다.

물론 그런 바람은 꿈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은 항상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시궁창이고, 더럽게 흘러가기에. 하얀 전쟁이라고 다를 것 없다.

* * *

다음 날 오후 2시 30분.

강후는 탐색 팀 입장 시간인 6시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미리 집결지에 도착해 있었다.

인근에 있는 카페 하나를 골라 들어온 상태였다.

심판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파주 출판 단지 쪽에 위치했다.

이미 현장에는 취재를 나온 수많은 기자와 정화 길드를 응원하러 온 팬으로 가득했다.

헌터 치안청의 추산으로는 1만 명 이상.

그것도 주요 길목에 있는 인원만 선택적으로 확인한 것이고, 실제로는 몇 배는 더 많았다.

치안청의 치안관들로도 모자라, 군인까지 출동해 통제하는 현장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감회가 새롭네.’

강후가 파주 출판 단지 일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것은 오늘 공략 때문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신강후가 장시환에게 왼쪽 팔을 잃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입었던 치명타와 왼팔의 손실이 끝끝내 신강후의 발목을 잡았고, 돌이킬 수 없었다.

워낙 신념 있고 사연 많은 빌런으로 그려졌기에 그가 장시환에게 죽었을 때 슬퍼한 독자도 많았다.

‘재방송은 안 되지.’

물론 이제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만 한다.

바로 그때.

강후의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향수 냄새가 방금 열린 카페의 문소리와 함께 훅 들어왔다.

짙은 향기는 멀어지기는커녕 빠르게 강후에게로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자, 탐색 팀 파트너로서 만나야 할 여자 헌터가 와 있었다.

“정선규 씨?”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진효영이에요.”

초면끼리 나눌 법한 평범하고도 당연한 인사. 하지만 강후는 그녀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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