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박동재 (5)
* * *
30초 후.
“거지네.”
죽은 박준으로부터 아이템을 걷어낸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5억 원 남짓의 가치였다.
갖고 있던 아이템을 팔아서 조직 재건 자금으로 쓰기라도 한 걸까?
녀석이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은 그의 레벨과 지위에는 맞지 않는 가성비 아이템이었다.
헌터 사이에서 ‘서민 세팅’이라고 불리는, 딱 겉으로 보이는 꾸미기 용의 세팅이었다.
회피 스킬이 막힌 순간에 이미 박준의 운명은 결정된 상태였다. 강후가 노렸던 바이기도 했고.
만약 박준이 도약이나 가속 스킬을 썼다면, 아슬아슬했더라도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 혹은 ‘신속 회피’는 공간 이동 판정을 받는 스킬이었다.
【다섯째, 반경 15m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의 공간 이동 스킬을 99%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섯 번째 성좌 특전에 회피가 완전히 막혔다.
너무 당연하게 회피로 피할 준비를 했던 박준은 그 순간에 머뭇거리고 말았고.
망설인 시간만큼이 화근이 되어 죽었다. 본능적으로라도 몸을 날렸다면 목숨은 부지했을 터다.
다섯째 특전도 툴팁을 좀 더 자세히 훑어보니, 아군에 대해선 적용을 제외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는 팀킬의 용도로 쓰일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게 시스템이 허술하진 않았다.
어쨌든 강후는 나중에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스킬 전체의 툴팁을 다시 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약해서 적힌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아는 것과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순간이동처럼 말이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순간이동에 자신이 포함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음.”
바닥에 떨어진 박준의 머리.
감지 못한 두 눈이 죽을 당시의 원통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대참수를 목덜미에 찍어 넣은 다음, 바로 혈화를 시전했으니 머리가 버텨낼 리 없었다.
박준의 죽음으로 강후는 꽤 유의미한 성좌 계약 하나를 강탈할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입맛을 다셨던 이유였다. 꼭 갖고 싶은 성좌였기 때문이다.
【무정의 자객】
【기본 스킬 중 하나를 지정하여 궁극기 스킬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
지정 스킬 변경은 최대 3회까지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아마 박준은 레벨 40의 암살자 기본 스킬인 회피를 궁극기로 바꿔뒀던 듯했다.
그러니 강후의 움직임을 확인하자마자, 회피를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한글식 표현으로는 궁극기 혹은 영문으로 Ultimate로 불리는 변화는 체감이 컸다.
전에 강후가 스킬 강화 기회를 이용해 혈화를 궁극기로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일대일 한정이었던 혈화가 일대 다수로 바뀐 것이다.
반경 안에만 있으면, 그 수가 수백이어도 전부 혈화를 발동시킬 수 있다.
‘어떤 기본 스킬에 손을 댈지는 고민을 좀 해 봐야겠네.’
도약. 횡 이동. 출혈 찌르기.
가속. 신속 회피. 무영. 분신술.
이렇게 총 7개가 현재까지 강후가 레벨 성장과 함께 자동으로 획득한 기본 스킬이다.
분신술 스킬에 가장 눈이 가기는 하지만, 다른 기본 스킬도 궁극기 개념이면 계산이 달라진다.
어차피 당장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는 만큼, 잠시 보류 상태로 두기로 했다.
“꽤 치열한 전투를 생각했는데. 상대를 봐가며, 과대평가를 할 필요도 있겠어.”
강후가 찬바람이 불어오는 건물 전체의 황량함을 느꼈다.
오쇼 용병단의 잔당들과 뜨거운 땀과 피를 뒤섞으며, 탈출을 위한 격전을 치를 줄 알았거늘.
박준이 죽을 무렵에 이미 놈들은 미리 만들어둔 비상 통로로 도망치고 없었다.
작정하고 지켰다면 인질 일부를 다시 빼앗아오고, 강후도 위험에 빠지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하찮은 놈들의 생존 본능은 상황을 너무 쉽게 만들어 버렸다.
강후의 입장에서야 좋았다.
덕분에 무정의 자객이라는 활용 가치 높은 성좌를 강탈한 것은 물론이고.
박동재로 하여금 목숨을 빚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계속 생각해 왔던 ‘마음의 채무’다.
* * *
새벽 무렵에 수습이 끝났다.
탈출한 인질들은 전세혁의 연락을 받고 협력하기로 한 김수경 용병단이 수습했다.
그들이 안전히 가족 혹은 지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직접 에스코트 해 주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기로 한 것이다. 지역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김수경의 눈치 빠른 행보였다.
한편, 도망친 오쇼 용병단원들은 쫓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었고, 나름 녀석들에게는 이곳이 홈그라운드라 괜히 기습을 당할 우려도 있었다.
한바탕 전투를 치른 마당.
그래서 모두 전세혁이 미리 통째로 하루를 빌려둔 숙소에서 쉬거나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에 푹 빠진 전세혁과 반세영, 박동재는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잠이 적은 강후는 자연스럽게 잠을 안 자는 그림이 됐다.
그런 이유로 전세혁이 자기 몫으로 잡아 둔 방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약간의 맥주와 안주를 곁들인, 조촐하지만 그렇기에 부담 없는 작은 술자리였다.
박동재는 샤워를 마치고서 살짝 늦게 도착한 강후를 보자마자 그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규 님 덕분에 제가 살 수 있었습니다!”
박동재는 마치 구원자, 메시아라도 영접하는 것처럼 강후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강후도 알았지만 이 정도로 눈물을 흘릴 정도인가 싶었다.
“별일 없어 다행이네요.”
강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던전을 받기로 했으니까 당연히 돈값을 해야죠, 같은 멋대가리 없는 대답이 나갈 뻔했지만.
한 번 숨을 고르고, 다른 말로 돌린 것이 다행이었다.
때로는 상대의 감정을 내 식대로 받아치지 않고, 오롯이 받아주는 것도 중요하기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생명의 은인이세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푹 숙인 박동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강후도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했을 고생들이 눈물에 함께 씻겨나가길 바랐다.
“고마워, 선규 오빠. 오빠가 없었으면 동재 오빠를 구할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뭐, 암살자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자고. 날 믿어줬고, 그렇기에 증명했을 뿐이야.”
“그건 아니지! 세상 어떤 암살자가 순간이동 스킬을 쓰는데? 오빠만 가능한 거야, 그런 건!”
“제 생각도 세영이와 같습니다. 녀석이 아까 우스갯소리로 그 말을 하더군요.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라고.”
전세혁이 맞장구를 쳤다.
강후는 반세영이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암살자를 기본으로 한 것은 맞지만, 강후의 능력은 계속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었다.
실제로 원하고 있는 성장의 방향성 역시 혼자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올라운더 역할이었다.
“할 수 있다면 혼자 다 하고 싶은 건 사실이긴 합니다.”
강후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허황된 욕심도 아니다.
노력하고 도전하는 만큼 스킬과 성좌를 얼마든지 강탈할 수 있으니, 언제든 길은 열려있다.
강후가 이제야 제대로 마음 놓고 볼 수 있게 된 박동재의 성좌 정보를 살폈다.
【태초의 어머니】
【모든 버프 스킬의 효율을 25% 향상시키고, 주 버프 스킬 하나는 55% 향상시킵니다.】
【열정의 모험가】
【미들, 메인 보스에게서 아이템 드롭 시. 한 등급 위의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33% 증가합니다.】
【이타의 사제】
【자신의 버프 스킬을 3개 이상 유지하고 있는 동료의 경험치 획득량이 5% 증가합니다.
그리고 증가한 획득량만큼 자신의 경험치 획득량도 함께 늘어납니다.】
‘그냥 평생 버퍼가 되라고 성좌들이 붙은 수준이네.’
박동재의 성좌 정보를 보자, 그가 버퍼의 길을 우직하게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원작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짜놓진 않았지만, 박동재의 운명에 맞게 찰떡같이 빈칸이 채워진 모양.
‘박동재는 절대 포기해선 안 되겠다.’
강후가 속으로 다짐했다.
아직 본래의 실력이 만개하기도 전인 지금의 성좌 구성이 이 정도라면.
본격적으로 계약 성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그때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버퍼가 될 것이다.
함께만 있으면 무조건 플러스가 되는 박동재를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전세혁과 반세영도 그와 함께하려는 것이겠지.
물론 이용해 먹으려는 속물적인 근성으로 함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가치가 높단 얘기다.
그때, 박동재가 말했다.
“지하 4층을 지키고 있던 녀석이 자기 입으로 레벨 150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선규 님이 제압하신 걸 알았을 때, 레벨이 최소 200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환풍구를 나오자마자 목을 날렸던 간수가 레벨 150이었다고?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실력도 무뎠고, 무엇보다 성좌가 없었다.
허풍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어쨌든 박동재가 그것 때문에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레벨 100을 넘으셨다고요.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 아니,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이번에 진심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십쇼. 그라운드 제로가 호기심 하나만으로 갈만한 곳은 아니니까요.”
“예. 가라고 해도 안 갈 겁니다. 그쪽으로는 볼 일도 안 볼 거고요.”
“하여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진 목숨 빚은 평생 나눠서 갚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선규 님.”
박동재가 다시금 강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서 안영호가 겹쳐 보이는 느낌이다. 고마운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계속 감사해하는 모습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는 간이나 쓸개를 떼어줘도 아깝지 않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 * *
1차, 2차, 3차까지 진행된 술자리는 전세혁과 박동재가 뻗은 이후에 끝이 났다.
박동재는 실로 오랜만에 들어온 알코올의 행복함에 푹 취해 잠이 들었고.
전세혁도 아끼던 동생을 구했다는 기쁨에 가면도 벗어던지고, 실컷 술을 마시다가 뻗었다.
던전 소유권 이전에 관한 건은 강후가 전세혁과 헤어지기 전까지 마무리 짓기로 했다.
전세혁이 보유한 던전 리스트를 전부 받았는데, 그중 구미가 당기는 던전이 몇 개 있었다.
강후는 새삼 전세혁이 가진 재력에 놀랐다.
물론 이번에 강후에게 소유권을 넘길 던전에 비용 청구는 박동재에게 한다고 했지만.
그거야 우스갯소리로 꺼낸 얘기일 것이다.
그는 아끼는 동생을 구한 목숨값을 동생에게 요구할 옹졸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한편.
강후와 반세영은 숙소에 배정된 강후의 방에서 4차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제법 얼굴이 발그레해진 반세영과 달리, 강후는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술을 마시기 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파우더를 바른 느낌?
어둡긴 하지만 새벽녘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은 채, 서로 맥주를 조용히 기울이던 중.
반세영이 슬쩍, 운을 뗐다.
“오빠는 연애한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