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박동재 (1)
* * *
‘이런 계약서는 몇 개를 얻어도 환영일 것 같은데. 아쉽지만 한 번 맛본 걸로 만족해야겠군.’
강후가 차원 강탈자와 같은 지위의 ‘메인 성좌’로 함께하게 된 순흑의 구도자를 살폈다.
성좌 특전은 메인 성좌가 되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혜택이다.
비틀린 계약서 덕분에 어떤 질서나 균형의 문제 없이 메인 성좌가 하나 늘었으므로.
기존에 차원 강탈자에게서 누리던 특전에 순흑의 구도자가 주는 특전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성좌 시험을 따로 통과한 것은 아닌 만큼, 우선 세 가지 이점을 얻은 상태였다.
첫째는 ‘암흑기’ 스탯 100을 부여받았다.
모든 헌터가 공통으로 활용하는 스탯인 근력, 민첩, 체력, 마력, 항마, 맷집에 제7의 스탯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헌터들은 특수 스탯이라고 부르는데 그 자체로 희소성을 매우 높게 여겼다.
특수 스탯으로만 활용할 수 있는 특수 스킬이 따로 있고, 이것들은 위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아직 마력을 암흑기로 치환하는 스킬은 얻지 못했지만.
이것으로도 암흑기의 기본 베이스가 중간 과정 없이 만들어졌으니, 시간을 엄청 단축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암흑기 스탯을 직접 깨우치는 루트를 타려면…….
구구절절 적기에는 복잡하고 최소 3년 이상의 긴 여정이 필요하다. 그래도 될까 말까 한 것이 냉정한 현실이고.
둘째는 1분당, 암흑기 1을 회복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순흑의 구도자이기에 계약자에게 줄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다.
보통 암흑기는 마력을 암흑기로 전환하거나, 암흑기가 있는 곳을 가야만 회복할 수 있지만.
둘째 특전을 통해 암흑기를 전부 소진하더라도, 100분이면 전부 복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어디서 싸우더라도 암흑기 활용을 아끼지 않았었던 이유 중에 하나기도 하다.
셋째는 암흑기가 가진 고유 성질의 불규칙성, 변동성, 의외성을 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성좌의 힘으로.
이런 능력을 장시환에게서 빼앗았으니, 얼마나 상실감이 클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이를테면 강후에게 차원 강탈자를 빼앗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계산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이제 장시환은 암흑기를 쓸 때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한다.
본인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흑기가 폭주할 수 있다.
아니면, 암흑기가 이유 없이 증발하거나.
달리는 차의 바퀴 하나를 펑크낸 것과 같은 상황이라 ‘안정’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졌다.
‘암흑기 스킬이 관건이네.’
기반은 만들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암흑기 스킬이 없으면 암흑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활용 가치를 높이려면 스킬 강탈이 필수인데, 암흑기 관련 스킬은 국내에서 수급이 어려웠다.
쓸만한 스킬을 가진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가 적어서다. 국외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때.
【다른 녀석이 주 성좌를 넘보는 것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도대체 이놈은 왜 데려온 것이냐?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나와 같은 격을 유지할 수 있는 이 계약이 유효한 것이냐?】
차원 강탈자가 역정을 냈다.
여기서 말하는 ‘이놈’은 순흑의 구도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서열이 상당히 높은 성좌임에도 이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의 패기는 인정할 만했다.
“비틀린 계약서라는 것을 썼지. 대성전의 공인을 받은 계약서니까 문제 될 것은 없어.”
【대성전에서의 일 처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정신 나간 계약서 양식을 폐기를 안 해?】
“그건 직접 가서 물어보시고.”
강후가 웃으며 답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성좌들의 세계에서 나눠야 할 이야기다.
자신은 그저 계약서를 얻은 당사자로서 빈틈을 잘 찾아냈고, 영리하게 활용했을 뿐이다.
다만 이어진 뒷말은 강후에게도 놀라운 얘기였다.
【여기서 헤어진 연인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쓰레기를.】
“……?”
저 말은 즉.
차원 강탈자와 순흑의 구도자가 옛 연인이었다는 말인가? 자신과 한서연의 관계처럼?
【새로운 계약자, 반갑군. 언제부터 날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황스럽구나.】
순흑의 구도자가 철저하게 차원 강탈자의 말을 무시하고는 강후에게 말을 걸어왔다.
본인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주 계약자로서 함께하던 장시환과 갑자기 헤어지더니, 새로운 계약자와 연결이 됐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새로운 계약자의 메인 성좌가 자신의 옛 연인이라면 더욱 경악스러울 터.
“계약을 따라 맺어진 관계이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단순하다. 어떤 계약서를 썼든 간에 대성전의 힘은 절대적이고, 난 존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계약서를 찾아내서 쓸 만큼 영악한 녀석이라면, 새로운 계약자로 손색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기대를 저버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그녀와 나 사이의 일은 우리의 문제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미친놈아! 뭐를 알아서 처리를 한단 말…….】
【성좌 ‘순흑의 구도자’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여, 대화 내용의 발설을 원천차단합니다.】
졸지에 재회한 옛 연인.
둘의 사이는 둘이 풀어갈 문제다. 가뜩이나 적이 많은 차원 강탈자의 머리가 잔뜩 빠질 듯하다.
* * *
미리 잡아둔 호텔로 돌아온 강후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TV로 헌터 관련 뉴스를 보았다.
예능, 영화 할 것 없이 재밌는 컨텐츠가 많은 것이 작금의 방송이지만.
강후는 한 번도 그런 채널을 틀어본 적이 없었다.
TV를 틀면, 항상 보는 채널은 하나였다. 헌터 뉴스 채널로 전문 케이블 방송이었다.
- 약 1시간 전부터 정화 길드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 정화 길드에서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용병과 외부 세력이 추가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토벌 속도를 높이겠다고 밝혔습니다.
- 헌터 치안청에서는 평정의 간부진 13인 전원에게 2급 지명수배령을 내렸습니다.
- 혐의는 마약 밀매 및 유통 그리고 국내 유망주의 납치 및 인신매매 건입니다.
“열 받은 모양이네.”
소식을 보니, 장시환이 열을 받아도 제대로 받은 모양이었다.
헌터 치안청에서까지 저렇게 호흡을 맞춰 주는 것은 무조건 장시환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얘기다.
원작에서야 ‘좋은 의미’로 헌터 치안청과 주인공 장시환의 사이가 좋았다.
정의구현을 위한 협력의 관계였달까.
하지만 엔딩으로 모든 상황의 성격과 본질이 바뀐 지금, 치안청도 악당의 부역자일 뿐이다.
혹시 싶어서 헌터 그램을 켰다.
SNS를 하지는 않지만, 딱 하나 SNS로 챙겨보는 것이 바로 헌터 그램이다.
여기서는 소위 잘나가는 네임드 헌터의 소식을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시환과 채관형은 항상 계정에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들어가니, 방금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전투 영상이 있었다.
말이 전투지, 사실상 장시환의 일방적인 학살 동영상이었다. 제물은 평정-바스타드 연합.
별도 인증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잔인한 장면이었는데, 확실히 장시환의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댓글은 이미 사전 작업이 다 끝나 있었다.
작성자 – 장시환 – 가 고정한 베스트 댓글이 죽은 헌터들의 조작된 혐의를 적은 내용이었고.
그 아래로 장시환과 정화 길드를 응원하는 댓글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5초 단위로 자동 갱신이 될 때마다 수십 개씩 댓글이 늘어났다.
중간에 부정적인 댓글이 달리면 바로 싫어요가 눌리거나, 집중 신고를 당해 1차 필터링 됐다.
조작된 세계.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서울은 장시환과 채관형, 그리고 정화 길드가 쌓아 올린 거대한 요새와 같은 곳이다.
그와 같은 편인 사람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지만, 반대에 선 사람에게는 지옥이 된다.
5분 후.
계속 오산에서의 전투 내용으로 뉴스가 도배되고 있는 터라, 강후는 TV를 껐다.
그리고 습관처럼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전세혁이었다.
“네.”
- 통화, 괜찮을까요?
“쉬던 중이라. 무슨 일이시죠? 제가 딱히 부탁을 드린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세혁에게서 오는 연락이 싫은 게 아니라, 그에게 연락할 거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던전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고 하기에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게다가 그런 연락이었으면 반세영이 했을 것이다. 전세혁은 지켜보는 입장이니까.
‘아. 그건가.’
갑자기 생각났다.
전세혁이 자신을 찾을 만한 일. 왠지 생각난 게 맞는 듯했다.
- 예전에 혹시 동재에 대해 했던 얘기 기억하십니까? 버퍼 박동재. 제가 아끼는 동생.
역시 예상대로였다.
“기억합니다.”
- 음……. 말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전세혁 님 답지 않네요. 말씀하시죠. 어차피 말씀하실 것 아닙니까?”
- 흠흠. 그렇습니다.
머뭇거리는 전세혁에게 일침을 날리자, 전세혁이 헛기침을 했다. 강후의 말이 맞았기에.
그가 말을 이었다.
- 동재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필요한 정보, 접근 방식까지는 해결을 했는데…….
“잠입까지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데, 구출해서 데리고 나오는 게 신경 쓰이시는 모양이네요.”
- 정확합니다.
잠입이라는 게 늘 그렇다.
들어가는 것은 이리저리 빈틈을 찾으면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다.
안에서 어떤 행동적인 이슈가 발생한 이후라서, 잠입할 때처럼 조용히 나오는 게 어렵다.
하물며 인질 구출이라면 더 그렇다. 인질을 지키는 놈부터 제압해야 하니, 조용할 수 없다.
박동재.
강후가 가장 탐내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반세영, 정유리, 안영호와 같은 인물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박동재에 대한 관심도에 비하면 분명 2순위로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솔플을 즐기지만.
팀플을 해야 한다면 1순위, 아니 0순위는 무조건 박동재였다.
“잠시. 제가 한 1분 뒤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 괜찮습니다. 밤인데 죄송하네요.
“전혀요. 다시 연락드리죠. 그럼.”
강후가 전화를 끊었다.
일단 박동재에게 접근만 하면, 그를 데리고 나올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이 끝난 상태였다.
바로 차원 강탈자에게 부여받은 특전 중 네 번째, 순간이동에 관한 능력이다.
다만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차원 강탈자에게 말을 걸었다.
“차원 강탈자 씨. 전 남자친구 분과 이야기 중일 듯해서 미안하지만. 혹시 답변 하나 가능할까?”
【버릇없는 놈. 예를 갖춰 말을 하도록 해라.】
“차원 강탈자 님에게 제가 고견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강후가 신속하게 태세 전환을 하자, 쏘아붙이려던 차원 강탈자의 말문이 막혔다. 이내 답이 돌아왔다.
【말해라.】
“순간이동 능력. 혼자면 100%, 둘이면 50% 성공인 것은 알아. 그런데 혼자의 기준이 무조건 나 자신인가 해서.”
다시 원래의 반말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답을 들려주었다.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릿수를 기준으로 하지.】
“그 말은 두 명이 있을 때.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만 순간 이동을 쓰면 100%라는?”
【맞다. 모르고 있었군. 내용 중 어디도 ‘나’ 또는 ‘자신’이라는 표현은 없지 않느냐.】
차원 강탈자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툴팁이 애매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매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100%의 확률에서 총인원을 나누는 구조인 만큼, 한 명이면 무조건 성공은 맞았다.
‘박동재는 무조건 구하겠군.’
이러면 계산이 쉬워진다.